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관장, 구미문화예술회관 "경북의 독립운동과 구미" 특강

김도형 0 5,810

(전국= KTN) 김도형 기자= 4일 구미문화예술회관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김희곤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의 '경북의 독립운동과 구미' 주제로 특별강연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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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관장은 경북 지역의 독립운동의 특징에 대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한 투쟁성"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영해 3.1운동의 경우 아주 강했으며 영덕 지역 독립운동 포상자 210명 중 170명이 3.1운동으로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만주지역 독립군 기지 건설의 주역 중 한흥동 건설에 기여한 구미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로 허겸(부민단장), 허필(망명, 자금모집), 김정묵(원평, 독립신문 길림지국, 의열단), 박희광(봉곡, 통의부, 핀일파 처단, 군자금), 허형(신민부), 허형식(동북항일의연군 3로군 참모장)에 대해 소개한 김희곤 관장은 왕산 허위의 종질인 허형식 장군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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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관장은 중국 가경현 추모공원내에 동북항일의연군을 기리는 비석 중 가장 큰 공을 세운 허형식 장군의 비가 제일 앞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으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수많은 사람들 중 중국 공산당원으로써 반일유격대로 활약하며 이름을 떨친 최고의 지휘자였음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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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은 1930년 일본영사관 습격사건으로  체포되어 1931년 선양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사회주의단체를 결성해 반일 선전과 조직활동을 활발히 펼쳐 반일유격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허형식 장군의 본격적인 군사지도자의 길은 1935년 반일유격대와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면서 부터다.  일본군 거점지역과 일본의 농장 설비를 군사적수완을 발휘해 공격함으로서 공을 세운 그는,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성장할 당시 선발대장으로서 2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북만주 서북 방면의 새로운 유격투쟁 지역을 개척했다. 북한의 김일성 또한 허형식과 비슷한 시기에 부각되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조선과 중국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1935년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유격대의 주력 부대인 동만의 유격부대를 조선 혁명의 추진 주체로 인정했고, 이 부대는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했다. 제2군의 3개 사중 김일성은 제3사 사장에 취임해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장백현에 진출했다. 당시 김일성은 과반수가 조선인인 600 여명의 유격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이며 최대 1만명의 군사규모로 성장해 일제에게 있어 중국 침략에 큰 장애물이었다.

 

 허형식은 1939년 5월에 북만주지역 항일연군 3, 6, 9, 11군을 통합한 3로군 군장으로 취임함으로서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대토벌에 견디다 못한 그의 동료이자 부하였던 조상지, 주보중, 김책, 김성주(김일성) 등은 소련행을 설득했지만 최후까지 만주에 남아 무장투쟁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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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은 위줄 맨 오른쪽. 함께 활약하던 동지들, 동그라미속 인물은 만주항일연군 총사령관 조상지이며 허형식의 지휘를 받았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북만주 극한의 추위속에서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큰 전과를 세우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칭안 칭펑리 산골에서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부하 2명과 함께 비장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군에게 있어 큰 장애물이었던 허형식을 사살해 기쁜 나머지 그의 시신은 유린당해 회수조차 불가능했다고 한다.

 

왕산 허위의 5촌 조카이자 이육사의 5촌 외삼촌이였던 허형식은 경북 구미출신의 출중한 독립운동가로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에 의해 재조명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독립운동 포상의 장애로 작용했다. 김희곤 교수는 안동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의 사례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포상의 기준이 되고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한편 김희곤 관장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1919년 3.1운동 직후 4월 10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이 시작이며 이는 독립운동으로 근대국가를 세웠고 금년이 연호로는 101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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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관장은 1948년 정부수립일은 건국일이 아니라는 반증으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내용 중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 독립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며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며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구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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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 관보 1호에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 건국원년이 1919년임을 증명한다는 사실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 역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명시한 것 또한 명확한 증거라고 해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려했던 폐단들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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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투쟁사의 대표 인물인 구미 옥계 출신 장진홍 선생의 혁혁한 공을 알리기 위해 의거 현장을 알리는 선양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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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에도 일제시대 당시 지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김의경, 박몽득, 방하영 선생을 소개했으며 좌우합작으로 시작된 6.10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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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곤 관장은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했던 국민대표회의(1923) 의장 김동삼 선생을 비롯해 경북인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역사에 대해 한말 최초 의병과 자정순국, 유림단 의거 등으로 지킬 가치가 있는 전통을 지켰던 보수였다는 것과 혁신유림과 사회주의를 수용했던 바람직한 진보 그리고 광복회와 6.10만세운동, 국민대표회의 등으로 아우르는 통합을 시도했던 지난 과거를 높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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