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동학농민전쟁의 역사(3)-구미상모교회 100년사를 통해 동학운동의 흔적을 더듬다. <한국유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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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 봉기 당시를 재현한 그림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최근 구미시 죽장사에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기념사업회에서 세운 '한문출 장군 피신비'와 '한중석 항일투사 은거비'를 통해 선산동학농민운동의 역사에 대해 조사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선산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구체적인 사료를 찾아보기는 힘든 실정이었다.
 
선산읍성 옆에 복원되 있는 죽림사 옛터 삼층석탑 앞에 세워진 '갑오전쟁선산창의비'와 '선산을미의병효수지비'를 비롯해 두루 있는 비들에 대해 구미시 새마을과와 선산읍 그리고 구미문화원 등에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명료한 사실을 알 수 없었고 정확한 내막을 알기 위해 알아보겠다는 답변을 듣곤 더이상 진전이 없는 상태이기도 했다.
 
현재 선산동학농민운동에 대해서 구전으로는 전해지고 있지만 실체적인 문서자료는 밝혀진 바가 없다. 오로지 후손들의 노력에 의해 알게된 사실만이 세간에 알려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보다 명확한 사실 근거를 제시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지적도 없지않아 있다.
 
역사란 정확한 사실과 진실의 기반 위에 기록되야만 훗날 후손들이 선대의 기록물을 보며, 역사를 바르게 재조명하고 올바른 민족의식을 함양함으로서 혼란을 겪지 않게된다.
 
죽장사에 세워진 한문출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의 피신비와 은거비 사이에 새겨진 내용에는 선산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상황에 대해 언급되 있는 다양한 얘기들이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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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산 죽장사에 있는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의 기념비
 
김용락 시인의 '조선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선산읍전투에 부쳐'라는 글귀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반의세, 보국안민을 외치든/보름 전 있었던 우금치 전투의 처참한 패배를/ 여기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이 땅의 오랜 주인/ 민중의 아버지와 아들들/ 선산, 무을. 옥성, 낙동, 도개, 해평, 산동, 고아, 구미의/ 갑오농민군 5백을 규합해/ 우두머리는 선산출신 한문출로 일본 침략군의 주준지가 된/ 선산읍성 점령에 나섰다./...(중략)』
 
 
또한 시인의 '눈보라 치는 선산 해평들판'이란 시는 경상도 선산군의 갑오농민전쟁을 기념하는 시에도 한물출 장군과 한정교 항일투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어둠을 등에 지고 흰 두루미같은 한 떼이 흰옷 입은 무리들이/ 이제는 일본 침략군의 병참기지가 된/ 최부자네 고택을 향해 횃불을 높이 들고 돌진한다./ 경상도 동학농민군 우두머리는 선산 출신 한문출 한정교 부자 농민군이다./ 일찍이 무관의 집안에서 뼈가 굵힌/ 애족과 애민의 사람들/ 척양척왜, 보국안민을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에 얼어붙은 낙동갈물이 회답하듯/ 쨍쨍 얼음 갈라지는 소리를 내고 있다./ 멀리 호남 땅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대패했다는/ 쓰디쓴 풍문이 들려오고 있다./ ...(중략)』
 
더불어 채길순 작가의 '웃방데기(갑오년 이야기)'책 속에는 선산동학농민운동 당시에 한씨 장군 부자와 함께 했던 구미 상모동 지역의 인물인 박성빈(박정희 대통령 부친)과 정인벽(구미상모교회 창립자)이 언급되어 있다.
 
 
『P147 바로 이놈들이 공주, 삼례취회를 다녀온 근동의 동학 우두머리들. P148 "선산 한교리, 성주 이성도, 상주 김현영, 예천 최맹순, 김산 편보언, 황간 조재벽, 영동 손해창, 청산 김성원, 옥천 박석규, 보은 김연국 등"...(중략). P264 선산에서는 한교리가 한정교 박성빈(박정희 대통령아버지) 정인벽(구미상모등)을 내세워 선산 옥성 낙동 상주 도개 해평 산동 고아 구미 등지의 동학농민군을 규합하여 일본침략군의 주둔지가 된 선산읍성을 함락했다...(중략) 채길순(2014). 웃방데기(갑오년 이야기)』
 
외에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위이환씨가 쓴 책 속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아버지 박성빈 옹께서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한 사실을 언급했다.
 
 
『P460-P463 대통령 박정희의 아버지이고, 대통령 박근혜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몰락 양반 출신으로 한디니 동학농민전쟁에 가담도 했다. 박성빈은...(중략) 위이환(2013.12.20)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위 내용 모두, 한문출·한정교 부자를 기린 비에 적힌 내용들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찾는다는 것은 퍼즐 맞추기와 같아서 여러 곳에 흩어진 자료들을 취합해 공통분모를 찾아야만 한다.
 
 
비에 기록된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먼저 정인백 옹에 대한 자료가 있는 『구미상모교회 100년사』를 뒤져보았다.
 
정인백 옹은 구미상모교회를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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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모교회 100년사 책 내용에 따르면 1894년 2월 전북 고부에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소식이 경상도 전해지면서 여름이 되면서부터 조직적인 무장활동을 시작했고, 7·8월이 되어 구미가 속한 선산군과 경북 서북부 지역에서도 개혁을 부르짖는 군사 활동이 전개되 지방 관리와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 10월이 되어 일본에서 파견되어 온 병력과 중앙정부군으로 인해 농민군이 초토화 되었고 동학도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고 색출되었다고 한다.
 
상모교회 100년사에서는 정인백은 동학농민운동이 활발하던 무렵 20대 초반의 나이에 의기 왕성한 젊음으로 동학도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하고 동학도들의 검거와 탄압이 시작되자 정인백은 고향인 상모를 떠나 서울로 잠입해 은신 생활을 했고 정동에서 사역하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정인백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진압이 끝나고 정부의 관심이 약해진 시기인 1900년 경에 고향으로 되돌아 왔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서 상모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구미상모교회를 탄생시킨 배경이 된 역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구미상모교회 100년사'에는 정인백 옹이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와 함께 활약한 사실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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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김천인쇄사에서 찾아본 '구미상모교회 100년사'
 
다음으로는 박성빈 옹의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사실들을 알아보기 위해 구미시 상모동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민족중흥관 사무실과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사무실을 찾았다.
 
민족중흥관 자료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친인 박성빈 옹은 고령 박씨며 중흥시조 직강공의 15대손이란 사실만 언급되어 있을 뿐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사실은 기재가 되어 있지 않았다. 민족중흥관 사무실의 관계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에 대한 사실들만 전시되었을 뿐 박정희 대통령의 가계와 박성빈 옹에 대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는 답변을 주었다.
 
다만 고령 박씨 문중에 연락을 취해보면 관련된 사실을 알 수 있지 않겠냐는 얘기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사무실에도 문의해보라고 했다. 그러나 생가보존회에 문의해봐도 박성빈 옹에 대한 구체적인 사항들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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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빈 옹
 
을미의병으로 유명한 왕산 허위선생의 기념관 사무실에도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오로지 인터넷 상에 떠도는 사실 관계들만으로 옛일을 추정해 볼 수 밖에 현실이다.
 
박성빈 옹의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보니 '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가계도에 대한 설명을 통해 박성빈 옹의 이력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선친 성빈옹은 이조 말엽에 향사(시골 선비로 영농을 하던 무사)로써 무과 벼슬을 받고 한때 영월 군수를 지냈다고 한다. 무과에 급제해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했으나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진 시점이었다.
 
동학의 회오리바람이 천지를 진동시킬 무렵인 1892년에 박성빈 옹은 성주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동학의 접주가 되어 관군에 체포되었다. 이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나라의 형세가 기울어지고 뜻을 이루지 못함을 한탄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성격은 강팍하고 눈에 서슬이 서있어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나 타협을 앞세우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안고 끝장을 보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호방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던 박성빈 옹은 대의명분에 살며 술과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사이버 박정희 대통령' 사이트 내용에는 동학농민운동 당시 보국안민과 정의의 기치 아래 박성빈 옹 또한 호흡을 같이한 무명의 용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언급 되어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역시 선산갑오농민전쟁 당시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와 함께 봉기했던 사실 들은 나와있지가 않았다.
 
그러나 정인백과 박성빈 이 둘은 공통점은 있다.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당시 정인백과 박성빈은 이십대 초반의 혈기왕성하고 의협심이 높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인근 지역에 살며 저작거리에서 만나 의기투합 했을 수도 있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들은 꼬리에 꼬리 물듯이 이어진다.
 
 
박성빈 옹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러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들린 날, 마침 영덕에서 이곳을 구경하러 오신 권홍춘 어르신을 만났고 동학농민전쟁 이후 경북지역의 을미의병과 관련된 사실이 영덕 지역에는 어떤 식으로 남아있는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외람되게 물어본 이유는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후 한문출·한정교 부자는 을미의병을 하며 안동 학봉 김성일 문중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안동지역의 을미의병에 관련된 사실도 더불어 조사해 보기 위함이었다.
 
구미지역과 거리는 좀 있지만 안동지역 문중 사람들은 을미의병을 일으킨 뒤 해산한 시점에 산간 오지인 영덕 등지로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피신해 갔다는 사료가 남아있다.
 
권홍춘 어르신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피신해와 숨어지냈다고 하며 그 장소는 영덕 나라골이라고 알렸다.
 
영덕 나라골은 고려시대 이래로 8대성씨 12종택이 거주하며 전통있는 석학과 양반마을이기도 하다.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는 을미의병이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박해를 피해 어디론가 흩어져 피신하며 생활했던 곳의 역사를 살펴 본다면 일말의 단서가 나오지나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120여년 전의 감쳐진 일들을 오늘에서야 다시금 찾아보며 사실들에 대해 알아 본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사는 세상의 일은 밤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무수한 사연으로 남아 우리나라 곳곳에 흩어져 있지 않을까.
 
꾸준히 관심을 두고 하나하나 과거를 더듬어 본다면, 과거의 모습들이 어렴풋이나마 그림 그려지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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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덕에서 박정희 생가 탐방 오신 권홍춘 어르신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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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동학농민전쟁의 역사(1)-죽장사에 감쳐진 갑오년 선산동학농민전쟁 이야기
[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 을미의병의 숨겨진 역사(2)-학봉 가문, 선산 을미의병 봉기에 도움을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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