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일깨워주는 여순민중항쟁(2)-70년간 지속된 빨갱이의 유래 모순과 갈등의 시작, 박정희도 빨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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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70주기 여수MBC 도올 특별강연

 

빨갱이의 유래, 1948년 여순민중항쟁 이후 정부의 뜻에 반대하면 조건없이 '빨갱이'로 왜곡 날조

여순민중항쟁의 주역 육사 3기 김지회 홍순석, 육사 2기 박정희의 절친 오창균의 사상적 동지들

현대사의 가장 구조적인 모순과 갈등의 출발점, 여순민중항쟁을 토벌한 이승만 정권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948년 10월 19일 발생해 10월 27일 종결된 여순.순천사건 70주년을 맞이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도올 말하다! 여순민중항쟁" 여순사건 70주기 여수MBC 특별강연에서 여순사건에 대해 '여순민중항쟁'이라고 정의했다.

(다시 보기: 도올이 일깨워주는 여순민중항쟁(1)-침묵의 1948년, 다시 되새기는 기억의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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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같은 군대간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 여순민중항쟁,  사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날 특별강연에서 도올은 '부용산' 노래를 부르며 가슴 아팠던 시대의 애환을 달래며, 방청객들에게 구슬프게 울려퍼진 부용산 노래의 유래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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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2절은 호주로 이민 간 박기동 선생이 1998년에 자신의 한 많은 삶을 회고하며 완성했다. 

 

6.25 당시 지리산 빨치산들이 고향을 그리며 달밤에 구슬프게 부르던 노래 '부용산'은 노랫말이 애절하고 자신들의 놓인 처지와도 흡사했기 때문에 즐겨불렸고 그런 탓에 금지곡이 된 사연이 있다.

 

박기동 가사, 안성현 작곡의 가곡인 부용산 노래는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다. 아름다운 곡임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나은 비극적 상황이 노래를 왜곡되게 만들었다.

 

여순사건 이후 이 노래가 좌익성향이 있다고 규정된 탓에 작곡자 안성현은 1949년 9월 면직처분을 받았고 이후 6.25전쟁이 발발해 월북했으며 200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또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이 아름답고 슬픈 노래를 운동권의 저항가요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슬픈노래를 손꼽으라면 단연 '부용산'이다.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하는 노래로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슬픔이 베토벤의 웅장한 그것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 노래는 클래식에서 더 즐겨 부르는 노래라고 하며 빨치산과 운동권, 문인들의 술자리 등에서 불려지며 맥을 이어왔다고.

 

부용산의 작사가인 박기동은 벌교 출신으로 목포 향도여중 선생으로 근무했고 그이 여동생인 박영애는 폐결핵을 앓아 결국 24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박기동 선생은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시를 한편 썼는데 그 시가 바로 부용산이다.

 

애잔하고 아름다운 시를 접한 동료 교사인 안성현 선생은 그 역시 자신이 가르치던 16살 여제자 김경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 슬픔에 부용사 시에 곡을 붙였다.

 

디음해 1948년 향도여중 조희관 교장은 학예회에서 처음 이 노래를 학생들을 통해 발표했고 슬프고 아름다운 가사로 인해 삽시간에 목포와 전라도 전역에 퍼져나가 많은 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됐다.

 

도올은 여순민중항쟁의 발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제주4.3항쟁부터 되짚었다.  제주4.3항쟁기간은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 21일까지이며 여순민중항쟁기간은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입산 금지 해제일까지이다.

 

도올은 민중항쟁 기간을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제주는 7년7개월 여순은 6년6개월이다. 77, 66으로 기억한다"라고 했고, 제주도 희생자 수는 3만 명, 여순은 보도연맹 희생자를 포함해 1만 5천 명으로 추산된다고 했다.

 

도올은 부용산 작사자인 박기동이란 인물에 대해 여수사람으로 국어교사, 일본유학, 영문학전공의 시인이며 24살에 폐병으로 죽은 여동생을 벌교 부용산에 묻고 내려오면서 쓴 절절한 시라고 설명했다.

 

또 안성현은 일본 유학파 출신의 음악가로 항도여중 음악교사, 일제강점기 시절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조카로 부용산을 작곡했다고 알렸다.

 

안성현이 사랑하는 제자, 천재 소녀 김경희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든 곡이 공교롭게도 부용산 노래와 함께 여수여중에서 상여가 나간 시점이 1948년 10월 10일이었다.

 

한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이 되어 풀려난 송욱은 당시 36세로 여수여중 교장으로 재직했다. 송욱은 여수 인민대회 연설자로 추대된 전력의 서류상 이유로 반란의 수괴로 낙인찍혔고, 그 후 여수지역 여중생들의 희생이 컸다고 한다.

 

도올은 시대 상황과 맞물리며 빨간 딱지가 붙은 비운의 곡이 바로 부용산이며 그로 인해 억울한 누명에 시달려야 했던 박기동 시인이었고 죽은 누이에 대한 애달픔을 담은 한편의 서정시는 시인을 긴 세월, 국가보안법의 박해 속에 시달리게 했다고 설명했다.

 

1948년 잔인했던 여름, 노아의 방주를 방불케 하는 장마와 세 차례의 태풍

 

토지개혁이 일사분란하게 진행된 북한과 달리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로 기아에 허덕이게 된 남한 민중들에게 있어 1948년은 잔혹한 여름이었다.

 

1946년 1월 25일 ‘미곡수집령’을 공포한 미군의 미곡 자유 판매를 허용한 정책의 여파로 터무니없는 낮은 가격으로 쌀을 강제 공출함으로서 매점매석으로 인한 쌀값 폭등을 야기했다.

 

미곡수집령으로 미군정이 저지른 최대 실패작인 미곡정책은 민중의 도탄을 초래했다. 해방 후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꿨던 민중은 더욱 척박해진 현실에 아연실색했다.

 

대구폭동, 대구 10.1 사건으로 알려진 10월 민중항쟁은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이 초래한 생계 도탄과 친일경찰, 관리의 재고용 정책 등에 반발한 민중들이 1946년 10월 1일 기점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10월 3일 구미항쟁에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 선생은 농민들이 점령한 구미경찰서에서 성난 민중을 달래며 경찰들에 대한 살상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박상희 선생은 논두렁을 걸어가다 경찰의 눈먼 총알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참조-[역사를 더듬다] 경북인의 정체성을 찾는다(1)-구미 민중 항쟁의 주역 박상희 선생)

 

1948년이란 시점은 여수, 순천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전국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미군정의 시대였다.

 

양심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되는 김익렬 중령은 제주 4.3 강경 진압을 반대한 이유로 여수 14연대로 쫓겨난 평화주의자였다.

 

제주도 4.3 토벌대 자격으로 제주도에 간 서북청년단은 김익렬의 후임인 박진경 중령의 지휘 아래 한 달 동안 제주도민 5천명을 토벌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을 견디다 못해 반대하고 나선 젊은 군인들이 있었다.

 

문상길 중위는 학살 주동자인 박진경 중령을 대령으로 진급시키는 어이없는 상황을 도저히 견디다 못해 송선호 하사와 함께 급기야 직속 상관인 박진경 중령을 암살한 양심세력이었다.

 

도올은 박진경을 죽인 사건을 두고 "대단한 것"으로 평가했다.

 

박진경 중령은 취임사에서 말하길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 명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민족의 반역자인 박진경에 대한 암살혐의로 법정에 선 문상길 중위의 최후 진술은 이렇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 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가하지 않는다.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나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도울은 문상길 중위의 법정 최후 진술을 읊으며 "나는 우리 민족의 저력,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이런데서 느낀다."라며 민족의 양심을 지킨 한 인물의 업적을 상기시켰다.

 

당시 문상길 중위의 나이는 22살이었다. 총살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 외친 문 중위의 진중했던 발언은 "스물두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 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서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였다.


이에 대해 도올은 "얼마나 우리 역사가 그 엄청난 희생을 치뤘더래도 수많은 양심인과 지사들의 희생을 치루며 반전해온 우리 민족의 역사다."라며 역사속 의인들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했다.

 

문상길 중위가 죽음을 앞두고도 이와 같이 결기어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군대가 전부 빨갱이에게 점령되었다"라고 생각했다고 도올은 말한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피비린내나는 숙군작업이 감행됐다고 말한 도올은 "많은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박정희가 가담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전혀 별개다"라고 했다.

 

도올에 따르면 박정희 문제는 여순문제로 인해서 과열화되기 시작한 숙군작업 과정에서 드러났다고 설명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이뤄지고 제주도의 2개 선거구가 민중 불참으로 국회의원을 내지 못한 불완전 선거였고 이후 8월 16일 대한민국 단독정부가 만들어졌다.

 

국민들은 단선, 단정 반대를 외쳤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이는 민족분열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장한 우리 민족에 대해 이승만 정권은 좌익, 빨갱이로 취급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친탁, 반탁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황에서 신탁 통치를 찬성하면 빨갱이고 반대하면 우익으로 규정했다.

 

도올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 기실 신탁통치라(Trustship)는 말은 "개똥같이 번역이 된 말"이라고 했다. 

 

도올은 신탁통치란 말에 대해 그 당시 시대적 인식은 "일제처럼 식민통치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반대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라고 설명했으며, 그 당시 복잡한 정세를 볼 때 신탁통치가 아닌 밸런스를 취할 수 있는 미국과 소련간의 후견정치(Guardianship)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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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27일자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 번역문(2매)

 
당시 건강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정 기간 미국과 소련의 후견 정치가 국내의 복잡한 정치무대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라고 생각했으며, 혼란을 정리 한다는 판단이었고, 이것이 찬탁의 실상이었다고 한다.

 

도올은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나쁜놈이고 신탁통치를 반대해야했던 시대적 상황과 김구는 우익이어서 반대했다."고 말한다.

 

한편, 최능진은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로 경찰계열의 인물로서 양심있는 인물이었다. 경찰로서는 조병옥과 대립관계였다. 이승만의 정적으로

한국전쟁 중 정전.평화운동을 한 이유로 김창룡에게 잡혀 사형을 당했다.

최능진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결정적 병목에서 막고자 했던 인물이다. 도올은 이승만이 동대문 갑에서 나왔고 최능진이 나왔다면 이승만은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택상과 경찰청이 막았으나 결국은 기호 1번으로 입후보를 했다. 하지만 결국 후보등록을 취소시켰다. 도올에 따르면 이승만은 최능진에 대한 반감으로 암살을 시도하려하니 김구도 같이 죽을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최능진 지지자라는 터무니 없는 관계로 날조 연결된 또 다른 인물인 오동진은 김익렬 중령의 후임으로 부임한 14연대 연대장이었다. 이는 여순문제와 별개의 일이었다.

 

1948년 10월 1일에 최능진과 오동진은 만난적이 없으나 둘이서 볼셰비키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키려는 목적의 혁명의용군사건 혐의로 투옥된 것으로 날조됐다고 한다.

 

10월 1일 체포된 오동진은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잡혀갔다. 연대장이 억울하게 잡혀간 상황 속에서 분노에 치를 떨었던 14연대 군인들이었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주도 토벌대 거부는 당연했다.

 

그 당시 미곡수집령과 태풍으로 인해 폐허가 된 여수는 민중들이 굶주리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도올은 14연대 항명 주동자로 알려진 지창수 상사의 신월리 연설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지창수 상사가 2천 명의 병사를 움직일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올은 지창수 상사가 연설했다는 사실 또한 여순 발발 19년 후 문헌에 등장하는 공산주의와 엮을려는 조작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14연대의 출동 거부를 주도한 진짜 지도자는 김지회 중위였고, 그는 육군사관학교 3기 출신으로 신원보증인이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이며 14연대 대전차포중대장으로 계급은 중위였다.

 

또 하나의 인물은 홍순석으로 역시 육군사관학교 3기 출신으로 14연대 주역이였으며 김지회의 절친한 친구였고  출동거부의 핵심으로 백운산으로 입산 후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1949년 4월 9일 사망했다.

 

이 당시 이들과 뜻을 같이 한 핵심멤버가 40명이 됐다고 한다. 도올은 "40명이 2천명을 설득하는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라고 되묻는다.

 

이들은 모두 육사 3기 출신으로 2기 출신인 박정희의 후배들로 박정희의 절친한 친구인 오일균의 사상적 동지들이었으며 박정희가 모두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곪아터질대로 곪아터졌기에 이 사건이 일어나자 마자 민중항쟁은 군인들이 아닌 전 민중이 즉각 호응해 불꽃처럼 일어났다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은 군대와 친일경찰과의 대립이 너무나 극심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경찰조직에서는 전국이 인민위원회로 조직되어 인민위원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미군정이 동원한 친일세력 경찰들을 다시 복귀시켜 미군정의 수하와 같은 역할로 조직했다.

 

도올은 우리나라의 해방 후 경찰은 친일 잔존 세력의 결집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경찰의 입장에서는 군인들 전부가 빨갱이의 소굴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군대는 자유롭게 뽑았으며 군대내에서는 경찰보다 양심세력이 많았다.

 

영암사건은 1947년 6월 1일 영암에서 발생한 제4연대 하사와 경찰 간의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된 사건이다. 광주4연대 300명의 병사와 영암 경찰 사이의 무력투쟁이 발생해 군인 6명이 사망했다.

 

영암 읍내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경찰과 군대의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재판과정에서 불공정한 재판으로 인해 경찰은 하나도 다치지 안았다. 군인들에게만 중형이 선고되고 경찰은 무사했다.


또 1948년 9월 24일 구례경찰서 경찰과 14연대 사병 사이에 벌어진 말다툼으로 인해 14연대 사병 9명이 구금되고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구례 읍내의 이발소에서 술 취한 경찰이 이발사를 구타하는 것을 목격한 군인들의 제지로 군인들이 경찰서에 구금된 사건으로 14연대 군인들의 경찰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악화됐다.

 

14연대 군인들의 제주토벌 출동명령 거부의 명분은 거창한 사상논쟁이 아닌 '경찰타도'라는 구체적 적대 감정으로 집약되었다.

 

항명의 이유를 밝힌 당시의 벽보는 여순사건이 여순민중항쟁임을 증명하는 내용이다.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동족상잔 결사 반대 2.미군 즉시 철퇴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글을 낭독한 도올은 역사적으로 봐도 궐기 명분이 명료한 사건에 대해 '동족상잔 결사 반대'와 '미국 즉시 철퇴'라는 말은 사실은 오늘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고 했으며 "이 두개의 궐기 명분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완의 문제들이다."라며 우리 민족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할 시대적 당면과제임을 주지시켰다.

 

도올은 "미군이 아직도 있고 동족상잔의 남북통일의 문제가 이러한 모든 평화적인 노력을 지금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반문하며 아직도 이념 갈등의 굴레에 갇혀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되새겼다.

 

도올은 관료들조차도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당위성에 대해 찬동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대한민국 현대사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었던 사건, 여순민중항쟁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 미군철퇴를 외쳤던 것으로 인해 인해 일어난 여순민중항쟁에서 순천은 사흘 만에 진압되었으며 여수는 8일 만에 진압 작전이 종결됐다.

 

당시 구례경찰서 습격을 목표로 기차를 타고 구례로 향한 14연대 주력부대 군인들은 새벽에 여수역으로 이동 기차로 순천으로 이동해 순천에서 홍순석의 부대와 합류했다. 일부는 광양,하동으로 일부는 벌교, 보성 방면으로 진격했다.

 

7일 동안 사상 최초이자 최대의 육해공군 합동 진압작전으로 여수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든 참혹한 역사였다. 정부 토벌대는 타오르는 집의 불도 못 끄게 했다. 토벌 작전 당시, 실상은 14연대는 이미 여수를 빠져 나간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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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의 현지 작전 지휘 모습 

[칼 마이던스(1948. 11. 1.)/<LIFE>(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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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민중항쟁으로 이유없이 희생된 민중들(사진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하지만 정부 토벌대가 쉽사리 여수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여수의 인민들이 끝까지 항거했기 때문이다.

 

여수 14연대의 전투 대상은 오로지 친일파 경찰일 뿐, 민중 아니었다는 사실을 강조한 도올은 "그런데 토벌군의 목표는 여수,순천의 전 민중이었다."라며 함락 후 민중들 모두 공설운동장으로 모이게 했고, 제헌국회에서 아직 계엄법이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10월 22일 여수.순천에 선포된 현지사령관 김백일 중령의 자의적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했다.

 

이에 대해 도올은 "10월 25일 국무회의 계엄령은 이승만의 입술 하나로 무차별하게 발동시킨 명백한 위헌행위이다. 엉터리 국가! 엉터리 법령!"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정부 토벌대는 여수.순천의 학교운동장 등으로 전 민중을 집합시켜 부역자 색출작업을 자행했고 집에 남아 있으면 총살이었다고 한다.

 

인권이란 온데간데 없는 손가락 총

 

학교운동장으로 모인 민중들에 대해 토벌대는 손가락 총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면 부역자라며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했다.

 

도올은 부역자의 원 뜻에 대해 "부역이란 국가가 특정한 사업을 위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지우는 노역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으며 "우리 나라 현대사에서 부역이란 의미는 국가 반역에 동조하거나 가담한다는 뜻"이라는 말로 정부가 왜곡 시킨 '부역'의 의미에 대해 상기시켰다.

 

국민을 반란자로 몰아간 이승만 정부

 

도올은 여순민중항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시각은 "빨갱이는 인간이 아니다"였다고 단언한다.

 

정부는 여순민중항쟁에서 총을 들었던 자를 비롯해 손가락에 묻은 기름때까지 부역자 색출의 기준으로 삼았다. 당시 이승만의 훈시는 "남녀아동까지 다 조사하여 제거하라!"였다.


손가락 총에 의해 근거 없이 자행된 즉결처형


또 여수 인민위원회가 나눠준 흰 고무신도 부역자 색출의 기준이되었고 군용팬티 역시 죽음의 표식었다. 그렇게 죽어간 희생자 수는 1만 1천 명으로 추산된다.

 

여순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한 인류사상 일제강점기보다도 극심했던 정부 주도 극도의 야만행위였다는 사실에 대해 도올은 "세계사에도 유례가 드문 자국민을 대규모로 학살한 비극이었다."며 제노사이드(genocide) 1등으로 평가했다.

 

도올은 이러한 대학살이 자행되면서 '전라도는 빨갱이'라는 말로 해방정국에서 오늘날까지 모든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전라도는 빨갱이로 이미지가 자리 잡은 것과 그 대표적인 희생자가 김대중이었던 암울했던 지난 역사가 현재까지 이어여 온 사실을 상기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장 구조적인 모순과 갈등의 출발점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다.

 

도올은 여순민중항쟁을 시작으로 모든 우익 파쇼가 가능했으며 우리 민중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의 굴레에 70년 동안 속아온 지난 역사를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올은 "지금 70년이 지난 비로소 오늘에야 그 파쇼로부터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려 한다."는 말과 함께 청중들에게 "여기서 모인 것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를 다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떠나 반드시 이 역사는 바로 잡아야하는 역사, 그리고 이미 우리는 승리하고 있다"고 했다.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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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올이 일깨워주는 여순민중항쟁(1)-침묵의 1948년, 다시 되새기는 기억의 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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