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독립군비단 윤덕보와 정의부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919년 3월 윤덕보는 함경남도 홍원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가입하였다. 군비단은 1919년 5월 함경남도 혜산진(惠山鎭) 대안(對岸) 장백현(長白縣)에서 함경남도 출신의 이희삼(李熙三)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이다.
「탐정을 암살하라」(동아일보 1922년 1월 28일자)ⓒ국사편찬위원회
그는 군비단에서 재무부장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21년 6월 장백현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에 위치한 본부총단의 산하기관인 통신사무국에서 국장 대리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부터는 총단장으로서 총무장 한기호(韓基鎬), 비서부장 한동초(韓東礎)등과 함께 일하였다.
한편 군비단이 1921년 10월 흥업단(興業團) 등 주변 독립운동단체들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조직하였을 때 그는 총무로 선임되었다. 또한 각 단체들의 발기로 독립운동세력을 후원하는 농민회를 조직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광정단의 암살계획」(동아일보 1923년 1월 10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군비단·흥업단(興業團)·태극단(太極團) 등이 대한광정단(大韓匡正團)을 조직하였을 때는 총무장으로 단체의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조직이 확대 개편된 1923년에 대한광정단의 단장이 되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등 8개 단체 대표 25명이 참가한 가운데 길림에서 조직된 정의부(正義府)에서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아 행정위원으로 선출되는 등 통합단체인 정의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5년 7월 임시의정원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국무령제를 신설하였는데 정의부 지도자인 이상룡을 임정국무령(臨政國務領)으로 임명하게 되면서 정의부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였으며 10월에 내각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을 막을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중국 봉천성 경무국 사이에 맺어진 삼시협정(三矢協定)과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이 임시정부를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상위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 상황으로 인해 임정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웠다.
그는 이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장·외교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8월에는 정의부 특별위원으로 길림성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 배경과 정의부 설립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1906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꿈꾸었다. 1909년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 마련과 조직 확대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더이상 평화로운 시위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 모두가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관전현내에 통군부」(동아일보 1922년 3월 11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옛 왕조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나 복벽주의 계열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결국 독립하고 말았다.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통의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만대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正義府)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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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202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홍원 출신 윤덕보 선생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