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교육학 박사/한국유통신문 뉴질랜드 지국장
행사장에 줄지어 놓인 의자들, 그중에서도 고급스러운 천이나 붉은색으로 장식된 내빈석은 우리 사회의 민낯을 조용히 드러낸다.
축제와 기념행사, 그 화려한 무대 뒤에서 의자는 늘 묵묵히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자리에 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박수를 받는 사람과 땀을 흘리는 사람의 차이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필자는 뉴질랜드에서 수많은 지역 축제와 커뮤니티 모임을 경험했다. 그곳에서 ‘내빈석’이라는 단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혹 ‘지정석(Reserved)’이라는 팻말이 붙은 좌석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대개 이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장애인, 혹은 후원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행사장에서는 누가 앞에 앉는지, 누가 더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는지가 행사의 품격을 결정하지 않았다. 최고의 리더는 주민들 사이에 앉아 소탈하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으며,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는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다.
반면, 한국의 풍경은 어떤가. 지역 주민을 위한 축제라지만 가장 좋은 자리는 늘 내빈석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인과 지역 유지, 권력자들이 차지한다. 행사장 한가운데,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름표가 붙는다. 그 이름표는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긋는 듯하다. 결국 그 자리는 특별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는 암묵적인 신호인 셈이다.
주민 화합과 참여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주민은 뒤로 밀려난다. 선거철에만 얼굴을 내미는 정치인이 수십 년간 동네를 지켜온 빵집 사장보다 앞자리에 앉는 게 현실이다. 자원봉사로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구석에 서 있고, 힘 있는 자들은 박수갈채를 받는다. 축제는 어느새 ‘위선의 전시장’이 되어버린다. 진심은 가려지고, 역할은 왜곡된다. 의자 하나가 사람을 나누고, 공동체의 온기를 식힌다.
이 풍경은 격식의 문제가 아니다. 여전히 ‘관은 존귀하고, 민은 비천하다’는 관존민비의 문화가 우리 사회에 남아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말로는 주민 참여와 자치를 외치지만 자리는 힘 있는 자와 권력의 무대다. 무대 앞은 힘 있는 자의 몫이고, 주민은 들러리로 전락한다. 진짜 내빈이 누구여야 하는지, 우리는 언제부터 잊었을까.
뉴질랜드에서 필자가 배운 존중은 다르다. 진짜 귀빈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 공동체를 위해 묵묵히 헌신해온 사람들이다. 매년 축제에 후원을 아끼지 않는 동네 빵집 사장, 수십 년째 자원봉사를 이어가는 은퇴한 노부부, 장애를 가진 아이를 데리고도 빠짐없이 참여하는 부모들. 이들이야말로 공동체의 자산이자, 무대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내빈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후원금이 있다면 누구든지 내도록 하자. 그 돈이 축제를 더 풍성하게 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자. 그리고 그 대가로 감사의 자리를 마련하자. 자원봉사로 땀 흘린 봉사자들에게, 오랜 시간 지역을 지켜온 지역민들에게, 그리고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들에게 좋은 자리를 내어 드리자. 내빈석이 ‘서열석’이 아니라 ‘배려석’이 되도록 바꿀 수는 없을까.
정치인과 권력자들은 그 자리를 기꺼이 양보해야 한다. 진정한 지도자라면 맨 앞이 아니라 사람들 곁에 앉을 수 있어야 한다. 주민과 눈높이를 맞추고, 불편한 자리에 기꺼이 앉을 때 비로소 진심이 전해진다. 그때야말로 사람들은 그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될 것이다.
행사의 품격은 초청장의 디자인이나 연설문의 수사가 아니다. 행사장 의자 배치에 있다. 사회가 누구를 중심에 두고, 누구를 배려하며, 누구를 잊고 있는지를 의자는 말한다. 의자가 나누는 경계는 곧 우리 사회의 경계이고, 의자가 보여주는 질서는 곧 우리 문화의 깊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좋은 자리를 두고 다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더 좋은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축제는 그래서 더 따뜻했고, 더 공정했다. 누구나 존중받는다는 믿음, 그것이 다민족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내빈석의 의미를 바꾸고, 공동체의 주인을 다시 세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존중의 의미다.
우리의 축제가, 우리의 공동체가 그렇게 한 걸음 더 따뜻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박춘태(교육학 박사)
북경 화지아대학교 기업관리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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