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칼럼] 난국(蘭菊)시민원탁회의의 창립을 지역사회에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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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70, 80년대 역사를 풍미한 민주화운동유공자 지식인 김동윤, 김균식, 김종길 선생 기념사진 2022.7.21. 태양마을

 

부산항이 개항되는 1876년을 기점으로 조선은 근대사회로 진입하였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150년이 경과한 오늘,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진입하였지만, 집약적이고 압축적인 고도성장의 폐해는 곳곳에서 많은 부작용을 드러내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계층 간의 양극화는 극에 이르렀고, 최근 들어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져 상호 간에 불신과 반목으로 대치하면서 마치 나라가 두 쪽으로 나누어진 것처럼 갈등과 대립은 날로 증폭되고 있다. 자살율과 이혼율이 세계 1위라는 부끄러운 세태를 마주하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이에 난국시민원탁회의의 발기인들은 지금이야말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면서 미래를 차분히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는 것에 뜻을 같이하기에 이르렀다.


부산항이 개항되고 오직 성리학만 존중되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의 불온한 변화를 지켜보던 구미와 인동의 지배계층이자 여론주도층인 선비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모임으로 1897년 조직된 난국계(蘭菊契)가 있었다.

 

난국계에는 당시 구미면, 고아면, 해평면, 산동면, 인동군 인동면의 선비 40여 명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당대 일류의 선각자였으며 구미와 선산, 인동을 망라하여 가장 영향력 있는 선비들이었다. 

 

중심인물로는 왕산 선생의 장형(長兄)이신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 구미면 도량동의 월호(月湖) 김지원(金志遠, 1841~1906), 학파(學坡) 김병용(金秉庸, 1845~1918), 학파의 아들 김하용(金夏容, 1861~1933), 오태동의 유헌(遊軒 장석룡(張錫龍, 1823~1907), 운정(雲庭) 장승원(張承遠, 1853~1917) 부자, 해산(海山) 장교원(張敎遠, 1848~1933), 형곡동의 아천(我泉) 이당화(李堂和). 산동면의 긍산(肯山) 이능학(李能學, 1841-1925), 인동의 청초(廳蕉) 장석기(張錫基, 1836~1918), 해평면의 식헌(息軒) 최헌식(崔憲植, 1846~ 1915) 등이 있다. 장석기의 문집에는 이들과 나눈 시편과 편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난국계에는 가끔 장석기의 스승인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 1815~1900)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였고,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 김지원의 두 아들인 김세동(金世東, 1865~1942), 김희동(金羲東, 1874~1919)도 난국계의 말석에 참가하였다.( 每日申報 1913년 09월 10일 1면 5단 기사 참조)

 

이상은 1기 난국계의 모습이다. 이 시기에는 계의 서(序)라든가 계첨 서(序) 같은 것도 없었고, 당연히 좌목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봄과 가을에 기르던 난초와 국화를 들고 주최자의 초청으로 풍광 좋은 곳에 모였으며, 따라서 이 시기의 난국계는 모여서 시를 읊거나, 성리학과 역사를 토론하거나, 우울한 시국에 대한 소회를 토로하는 유력 선비들의 친목모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국계 성원들의 존재 자체가 지역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방산 허훈과 사미헌 장복추는 당대의 학자였고, 유헌 장석룡, 운정 장승원 부자, 왕산 허위, 학파 김병용은 당대 영남을 대표할 만한 고관대작이었기 때문이다. 월호 김지원은 일선속지(一善續誌)를 지은 역사학자로서 영화감독 김유영(金幽影, 1909~1940)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아들 김세동과 김희동은 일찍이 개화를 받아들여 자제들을 서울의 근대식 학교에 입학시킨 구미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들이었다. 


뿐인가. 왕산 선생은 13도창의대진소를 이끈 당대 제일의 의병장이었으며, 위암 장지연은 황성신문의 주필로서 완고한 당대의 선비들을 개화로 이끈 당대 일류의 평론가로서 이른바 “혁신 유림”의 선봉장이었다. 이능학은 산동면 송산동의 선비로서 최고령으로 심산 김창숙이 이끈 파리장서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난국계의 영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난국계의 활동은 구미 인근의 칠곡, 성주, 김천, 개령, 상주에까지 존재감을 각인시켰으며, 구미와 경북의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주역들에게까지 에도 깊은 영향력을 미쳤다.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 발기인 16명 가운데 4명이 구미 출신이거나 구미와 연관이 있었고, 학파 김병용은 대구 경북의 국채보상운동 평의장을 역임하기까지 하였다. 


2기 난국계는 장석기와 최헌식의 주도로 해평면 미석산(彌石山)에서 창립되었으며, 난국계에 대한 서와 계첩 서, 좌목까지 갖춘 조직으로 발전되었고, 해방 직후까지 지속하면서 구미 제일의 명사들의 모임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2기 난국계의 성원들도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계원 김위동(金暐東, 1866~?)은 이미 고인이 되신 김교준 박사와 김교홍 문화원장의 조부가 되며, 일찍이 위암 장지연과 교류하였다. 계원 김팔원(金八遠, 1864~1928)은 3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우동(金雨東, 1898~1967)의 조부이고, 김덕(金悳) 전 안기부장에게는 증조부가 된다. 


계원 박종해(朴鍾海, 1885~?)는 장진홍 폭탄사건의 동지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박관영(朴觀永, 1899~?)의 부친이고, 최영기는 독립운동가 운파(雲坡) 최관호(崔觀浩, 1905~1946)의 조부이다. 모두가 구미와 인동을 대표하는 명가의 후예들이라서 좌목이 자세히 공개되면, 지역사회에 미치는 반향은 당연히 클 것이며, 계원에 대한 정보도 훨씬 풍성해질 것은 명약관화하다.  


난국계의 존재는 형곡1동에서 확인되어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소개되었고, 이어서 청초 장석기의 난구계 서(蘭菊契 序), 식헌 최헌식의 난국계첩 서(蘭菊契帖 序)가 차례로 발견되면서 점차 그 존재가 뚜렷해 졌다. 또 근년에는 난국계의 좌목(座目)까지 알려져서 구체적인 계원들의 면면까지 알려졌고, 1920대 중반에 계원들이 읊었던 시(詩)도 20여 수까지 발견되어 난국계의 존재가 너무나 뚜렷한 역사적 사실로 증명되기에 이르렀다. 난국계는 일제하에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으며, 해방 직후까지 끈질기게 활동을 이어갔다.


이러한 난국계의 빛나는 전통을 되살리려는 발기인 일동은 우선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하려는데 뜻을 모았다.


첫째, 2023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 발기일에 구미국채보상운동 기념식을 거행한다. 아울러 국채보상운동을 대구 경북 상생협력사업으로 채택할 것을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에 제안토록 한다,


둘째, 구미의 근현대사에 대한 자료 발굴과 더불어 뚜렷한 공적이 있는데도 서훈 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공적을 지역사회에 소개하고, 이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시민들과 함께 추진하는 사업을 전개한다.  


셋째 구미의 명소와 관광자원에 대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개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질 것이며, 전문역량을 육성하는데도 지속적인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 


넷째, 이들 활동 외에도 구미시라는 공동체 내에서 협치와 지역통합을 드높이는 활동을 전개한다.


난국계의 1920년대와 1930년대 독립운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신간회 선산지회와 선산청년동맹을 이끈 주역들은 전통 유림의 지도자들과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지식청년들이었다. 일관호라 불린 최관호는 난국계원 최영기의 손자이고, 이상호라 불린 김상호(金象鎬, 1906~1952)는 학파 김병용의 손자이다. 삼상희라 불린 지도자는 박정희 대통령의 중형이신 박상희이다. 


박상희를 비롯한 신간회 선산지회의 지도자들은 1928년 5월 말 채미정에서 일본 경찰이 포위하고, 심지어 회의를 참관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금오산 채미정에서 임원회의를 강행하였다. 또 1928년 9월 2일에는 진평동 동락진(東洛津)에서 원유회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는 자신들의 독립운동과 지역계몽운동이 조상들의 빛나는 정신과 굳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는 치열한 실천과 꾸준한 모색의 산물이었다. 


난국계의 후예들은 이 아름다운 전통을 잇기 위하여 1980년대까지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계안과 좌목은 선산 생곡동 광산김씨 계원 김제항(金濟恒, 1846~?)의 집안에서 지금까지 보관해 오다가 최근 지역사회에 공개한 것이다. 


이제 발기인들은 난국계의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려는데 뜻을 같이하였다. 우리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뿐이다. 우리는 날로 치열해져 가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과 반목을 조금씩 해소하는데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며, 구미시라는 지역공동체에서 협치와 시민통합의 기운을 드높이는데 할 수 있는 모든 지혜를 결집하려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우리의 목표와 기치를 41만 구미시민에게 발기와 함께 천명하는 바이다.  



《蘭菊契 자료》

거유(巨儒) 이당화(李堂和)

       [출처] 경상북도 구미시 형곡1동 // 작성자 한맹

아천(我泉) 이당화는 조부(祖父)에게서 문도들과 수학(修學)하여 상주향시(尙州 鄕試)에서도 장원 급제하였다. 이학(理學)과 경학(經學)을 정진하고 제자백가서(諸子 百家書)를 통달(通達)하여 유림(儒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조선환여승람문행인록(朝鮮環與勝覽 文行人)에 입록(入錄)된 육인자중(六人者中)에 일인자(一人者)였으며 영남 유림회장과 향시(鄕試) 수석시관(首席 試官)을 다년간(多年間) 지냈다.

한말(韓末)의 혼탁한 세정(世情) 속에서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난국회(蘭菊會)를 조직 방산(舫山) 허훈, 호석(湖石) 김수남, 학파(學坡) 김병용, 운정(雲庭) 장승원 등과 수락동(水落洞)에서 시회를 열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저작(著作)에도 힘을 기울여 우의정 조병세(趙秉世),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등이 서문(序文)을 쓴 속통감팔권(續通鑑八卷)을 완성하였으며, 유고오권(遺稿 五券)이 6.25동란 와중에 소실(燒失)되어 우리나라 사학계 뿐만 아니라 유교계에서 귀중한 유교 문헌의 통한(痛恨)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중년에는 형곡동 동림(東林)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하다가 팔십 일세에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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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유교문화혁신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종길 선생(구미독립운동사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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