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을에 위치한 무동서원 전경
직언의 대명사 전가식의 후손 전00과 전00 형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획을 긋다
민주운동가 김종길과 산동골프장과의 인연 그리고 무동서원을 가다
2022년 5월 12일 오전 10시 반에 구미시 송정동에서 출발하여 11시에 무을면 무이동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장원방으로 알려진 선산 영봉리 출신의 전가식의 신도비가 제일 먼저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그는 고려가 망할 때에 옛 왕조에 의리를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뇌은 전귀생의 증손자로 선산 영봉리에서 태어났다.
전가식의 신도비는 구미 출신으로 경북대 사범대 국어과 교수를 역임한 심상완 교수가 찬하였다.
전가식은 또 길재 선생과 태종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는데, 아마도 야은 선생과 태종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야은의 제자인지도 모르겠다.
신도비를 지나가면 몇 걸음 뒤에 효자 전좌명의 정려비가 있다.
전좌명은 전가식의 현손인데, 하늘을 감동시킨 효행으로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으며, 정려는 지금도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다.
전가식의 딸은 장성하여 파평윤씨 윤호에게 시집가서 그 집안을 일약 번성시켰는데, 전좌명의 딸이 낳은 외손녀가 12살에 들어가서 숙의의 첩지를 받고, 성종의 후궁이 되었다가 뒷날 계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종의 왕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인데, 드센 시어머니와의 고부갈등으로 폐서인되자, 성종과 왕실 어른들의 총애를 받은 전가식의 외손녀가 계비인 정현왕후의 지위에 올랐으니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라 이를만하다.
그녀는 말하자면 연산군의 계모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연산군에게도 후덕하게 대우하여 그 무도한 연산군도 계모인 정현왕후를 어렵게 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여인도 성종에게서 아들을 낳았는데. 뒷날 반정으로 그녀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이다. 이런 가문에 닥친 풍운과 영광으로 인하여 전가식은 의정부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또 전좌명의 후대에도 꾸준히 벼슬길에 나섰으니 나름 지역에서 뿌리를 탄탄하게 내린 집안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가문의 스토리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 집안이 뒷날 문중인 연안전씨의 선택에 따라 노론계열의 길을 걸은 탓도 있을 것 같다.
무이동을 찾은 것은 전가식과 전좌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후예들이기도 한 근현대인물 때문이었다.
연안전씨 무을면 무이동에서 대를 이어 살았으며, 이웃인 남인들과도 사이좋게 살았다.
이곳에 오래 세거한 노론 가문은 벽진이씨 이민선 후손, 봉곡의 밀양박씨, 상모동 문화류씨, 율곡의 동생인 이우의 후예인 덕수이씨, 덕산황씨, 선산의 청송심씨 등이 있었고, 선산김씨 학생공파, 일선김씨 일부, 인동장씨 황상파 일부도 노론이어서 구미는 경북에서는 노론 세력이 강한 지역이다.
무동서원은 전좌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그런데 당쟁의 폐해가 기간도 30년 정도에 끝났으며, 예법의 차이만 있었을뿐 혹심한 쟁투도 없었고, 더러는 통혼도 했다.
아주 사이좋고 평화로운 당쟁이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구미로 이주해 온 대부분의 문중이 당쟁이 본격화되기 전에 구미로 옮겨와서, 오래 전부터 좋은 관계를 맺아 놓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좌명의 정려비각 옆에 얼핏 보아도 세운 지 얼마 안 되는 공덕비가 하나 세워져 있다.
주인공은 전00과 전00이다.
아무래도 형제 사이거나 멀어도 사촌형제 정도로 짐작된다.
무을에 정착한 연안전씨 집안도 19세기 말에 들어가면서 점점 영락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고, 일부는 하루 양식을 걱정하는 사람도 생겨났음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엄친의 훈육을 받았다고 되어 있으며, 일찍이 이웃 마을 서당에서 성리학적 소양과 근대식 학문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대가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틀림없이 1919년 3.1운동 이후인 1920년대 초를 전후하여 형제는 일본으로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공부를 위한 유학은 아니었던 것 같고, 생존을 위한 일본행이 틀림없다. 이후 형제는 일본에서 1960년대에 파친코 사업으로 거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난에 쫓기던 형제로서는 그야말로 입지전적 결과를 이룬 셈이다.
1980년대에 그들은 일본에서 번 돈을 국내에 투자하기로 결정하였다. 산동골프장과 동대구 역 인근에 호텔도 이들의 소유이다. 무을중학교 부지도 이들이 기증한 토지라고 하니, 공덕비의 주인공이 될만하다.
시중에 떠도는 말만으로 쓰려하니 아무래도 사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행간으로 헤아려 짐작하시라.
금오산 호텔과 구미택시의 창업자인 박진용 씨도 일본에서 부를 이루어 국내에 투자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우이다.
이들의 생애를 잘 기록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근현대사와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진면목이자 그야말로 속살이 될것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고,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역사에는 거짓이 있어서는 안 되며, 때로는 이성보다는 가슴으로 감성으로 와 닿는 역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동골프장에 대한 과거 회상
산동골프장과 호텔경영으로 승승장구하던 사업도 전세계적인 불황과 우리 경제의 장기간에 걸친 저성장 탓으로 최근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소식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니, 사람은 누구라도 삼가고 조심하면서 사는 것이 최선이렷다.
이들은 1986년부터 산동골프장을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에따라 골프장 저지투쟁도 동시에 시작되었다.
당시 시대 사정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사정이었으나 골프장 측의 대응은 너무나 냉혹하였다.
골프장 측에서는 주민 다수를 향하여 이름까지 적시하고, 골프장 건설 현장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원 판결문을 마을 입구에 내걸었고, 주민들 다수를 법정에 세우기까지 하였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은 가난한 민주운동가에게 거액의 벌금을 물도록 대한민국 법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 바람에 가난뱅이 운동가는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벌금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도 이것 외에 여러 건이 모두 2007년 민주화 관련으로 인정되었다.
그야말로 인생은 세옹지마가 아닌가.
2004년 나는 민주화운동 기초조사작업을 하면서, 산동골프장 건설저지투쟁을 상세히 기록하는 것으로 나름 소심한 복수를 하였노라.
무을을 찾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마을 입구에서 한참을 올라가면 고루 거각이 여럿 보인다. 짓다가 중지한 무동서원 흔적이다.
기와까지 다 올려져 있고, 구조물 뼈대까지 다 조립되어 있어서 조금만 손대면 곧 완공상태에 이를만한 건물이다.
무동서원은 전좌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혀 숨을 거둔 임오년(1762년)에 유림의 중의에 따라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서원은 훼철되었을 것이고, 최근까지도 흔적조차 없었는데, 무슨 이유로 중건을 시도했을까. 또 이왕 시작했다면 왜 갑자기 중지했을까.
여러 모로 궁금하다.
문중에서 조상 섬기겠다고, 문중 돈으로 서원 짓는 것이야 누가 비판할 수 있을까.
무동서원이 바로 그런 경우라서 딱히 할 말은 없다.
배향공간과 동서재, 출입루와 정자 형태의 건물도 거의 완성 직전이다. 그런데 상당기간 중지되어 있는데, 이유가 갈수록 궁금하다.
마침 5월이라 서원 담장이 예정된 부근에서는 찔레꽃이 덤불로 되도록 왕성하게 자라 있었고, 향기는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장미 향기와는 달리 찔레 향기는 너무나 상큼해서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그날 맡은 찔레 향기가 오늘까지 여운이 남는다.
그런데 사람들이 명분을 들먹이며 하는 일 가운데는 21세기에 서원 중건같은 일도 들어있으니, 사람은 참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끝>

글쓴이 김종길 선생
구미독립운동사 자문위원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상임대표 김종길
5.18민주유공자회 임시대표
광주 5.18유공자, 민주화운동 유공자
전 경북기독농민회 총무,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서기
전 대구경북민족민주운동연합 사무국장
전 구미경제정의실천연합 집행위원장
무동서원 사진 김종길 선생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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