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칼럼] 신준원(申駿遠, 1901~1966.6.1.) 선생의 유족을 만나면서

사회부 0 2,358

2_dadUd018svc1easexk1k25jr_tg3zvl.jpg

장세용 구미시장, 신단주 여사, 김종길 구미독립운동사 자문위원

 

 “신준원선생기념사업회”와 “신준원선생유족 시민환영단” 결성 계기


2022년 4월 15일 오전 10:30분 구미시 5대 국회의원이자 독립운동가 신준원(申駿遠, 1901~1966.6.1.) 선생의 손녀 신단주(申旦珠, 1954~)님이 신준원 선생의 외증손주(신단주의 아들)와 구미시청을 방문하여 장세용 구미시장과 통상협력실에서 환담을 나누었다. 

 

장세용 시장의 조부 장홍상(張弘相, 1900~?) 선생은 일제 때 3번에 걸쳐 5년 이상의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이다. 구미시 독립운동가로서는 박희광(朴喜光, 1901~1970)에 이어 두 번째로 장기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신준원 선생과는 동년배였으니 만난 적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름 정도는 서로 알고 있었을 것이니, 이번 만남은 이미 깊은 연원과 소회를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겠다. 길지 않은 시간에 50년 이상 가슴에 서로 담고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자명하였고, 이번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b_08eUd018svcwd53m27stgnd_tg3zvl.jpg

신준원 선생(사진 신단주 여사 제공)

 

아, 컴퓨터와 SNS의 힘이여. 지난 3월 18일 “구미시독립운동사” 발간 보고회가 구미시 상모동의 새마을 테마파크 글로벌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소식이 우리 단톡방의 여러 소회와 함께 손녀이신 신단주 님에게 포착되었고, 신단주 님이 구미시 방문 의사를 구미시에 전달하여 이번 만남이 성사되었다. 이 만남을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새롭게 확인되기도 하였다. 

 

2_cadUd018svc1e6e3b7dehekr_tg3zvl.jpg


첫째, 신준원 선생이 1919년 3월 13일 선산보통학교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로 인해 투옥되어 학교를 중퇴하였다는 사실이 이번에 확인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5년 뒤인 1971년에 친구 김기택(金基澤)이 쓴 묘비문을 역시 친구인 이선교(李宣敎)가 글씨로 옮겼는데, 이 묘비문에 이러한 선생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장세용 시장의 조부이신 장홍상 선생도 마찬가지다. 1919년 3월 12일 인동 3.12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은 장홍상은 근대식 교육을 받기 위해 서울로 갔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에서 근대식 학교의 교사를 역임하다가 대구의 교남학교(嶠南學校, 지금의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박희광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신준원도 마찬가지다. 3.1운동을 보면서 민족의 역동성을 자각하고 곧 바로 동경 유학길에 올라 일본대학(日本大學) 문학부를 졸업하였다. 1968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했다는 선산군지의 기록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둘째, 1968년 선산군지에 발간된 호가 자호(自乎)로 되어 있었는데, 선생의 호는 자평(自平)이다. 묘비문에도 자평(自平)으로 기록되어 있다. 자유와 평등일까. 자유와 평화일까. 어느 것이든 무엇이 중할까. 자유, 평등, 평화는 모두 선생이 생애를 통하여 품었던 이상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오랫동안 혼자만 의심했던 일이 이번의 만남으로 단번에 해소되었다. 


셋째, 구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운동의 큰 산실이었다. 사람이 만들었던 모든 권력을 부정했던 무정부주의는 문경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렬(1902~1974)이 효시이다. 아울러 경북에는 독보적인 무정부주의 독립운동가로 안동의 단주 유림(柳林, 1894~1961)이 있다. 모두 신준원 선생과 깊은 교류를 나눈 분들이다. 

 

동경 유학시절, 신준원 선생은 박렬과 함께 흑도회(黑濤會)에서 활동하였다. 이승만에게 사형당한 진보당 당수 조봉암(曺奉岩, 1898~ 1959)도 역시 흑도회의 성원이었다. 

 

뒷날 김약수(金若水, 1893~ 1964))가 만든 북풍회에 주도권을 잃었지만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선도한 뛰어난 조직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박렬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가 “대역사건”으로 투옥된 뒤에도, 선생은 장기간 부부의 옥고를 지원하였다.


넷째, 선생의 유품으로는 조선일보에 발표되었던 시 2편과, 박렬의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 1903~1926)의 편지 1통이 집안에 전해지고 있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인 사내를 사랑했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후미코의 무덤은 지금 문경에 있다. 박렬은 1950년 한군전쟁 때 납북되어 지금 무덤이 평양 대성산 열사묘역에 누워 있다. 이념이 무엇인가. 남북관계가 회복되어 박렬 선생이 고향으로 돌아와 뜨겁게 사랑했던 부인의 옆에 나란히 묻힐 날을 기대해 본다. 

 

지금 문경은 “한일가교의 상징”으로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을 찾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한다. 제헌의원 육홍균(1900~1983), 백하(白何) 김우동(金雨東, 1899~1966), 신준원은 일본대학을 졸업한 선후배이다. 해방 후 국회의원 자리를 두고 그렇게나 치열하게 다투었으니, 생각하면 3 사람의 우정과 경쟁이 자못 흥미롭기까지 하다. 

 

1.jpg

 

2.jpg

신준원 선생 국회의원 활동 당시(사진 신단주 여사 제공)

 


다섯째, 선생은 박상희, 김우동(金雨東, 1899~1966), 황기원, 김탁용, 우준식, 이재화, 김규묵 등과 함께 구미소비조합을 만들고 1945년 해방 때까지 이를 경영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선산소비조합은 육홍균이 만들었고, 해평소비조합은 최관호(崔觀浩, 1905~1946)를 비롯한 전주최씨 문중이 설립의 주역이었고, 장천소비조합은 매암(梅巖) 김동석(金東碩, 1903~1966)이 설립의 주역이었다. 구미의 각 면에 설립되었던 소비조합은 조국의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려는 고심의 산물이었다. 


여섯째, 신준원 선생의 또 다른 면목이 이번에 확인되었다. 자신의 집에 조그마한 학교를 만들어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꾸준히 교육하였으며, 뛰어난 수재들 몇은 대구로 가서 유학할 수 있게 자비로 지원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 명은 뒷날 의사가 되어 대전에서 개업의가 되는 빛나는 성과로 연결되었다, 이야말로 후대에 빛날 업적이다. 


일곱째, 선생은 육홍균과 함께 “특별요시찰”로 평생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수시로 연금과 수감을 반복하였다. 기록은 없으나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다. 경북대학교 대형과제연구단에서 정리한 “근현대 대구 · 경북지역 사상운동의 전개”(대구 경북의 지성과 운동 연구총서 4, 총 17권으로 구성, 2005년, 정림사)에는 선생에 대한 이러한 사실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박석홍도 특별요시찰이다. 


아홉째, 구미에는 육홍균, 김우동, 김동석, 신준원 외에도, 선산의 남해욱(南海旭)과 옥성의 박기홍(朴基鴻)의 존재도 확인된다. 차제에 이분들의 활동도 지역사회에 소개되기를 기대해 본다. 


열 번째, 의성의 뛰어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석홍(朴錫洪, 1896~1985)과의 교류가 이번에 확인되었다. 



이에 42만 구미시민과 지역사회에 호소드립니다. 

 

오늘 신준원 선생의 독립운동을 확인한 몇 사람들은 “신준원선생기념사업회”와 “신준원선생유족 시민환영단”을 꾸리기로 의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시민들이 주인이 되고 주체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정신이라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필요한 모든 사항은 시민추진단이 실무의 전반을 책임 있게 꾸리기로 하였습니다. 

이 모임은 시민추진단과 함께, 장세용 시장과 두 국회의원, 시의회 의장의 공동대표를 맡고, 전 현직 국회의원과 김관용 지사, 지역원로들이 고문으로, 지역기관장과 단체장들이 모두 “자원에 따라” 자문위원으로 참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3대 국회의원 김우동 선생도 독립운동가로 될만하다고 판단되며, 매암 김동석도 말년의 친일이라는 “결정적 흠결”에 따른 비판과 함께 지역을 위해 노력했던 그의 나머지 생애는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시기의 잘못만으로 그의 생애가 모조리 부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주장해 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제는 미래로 통합으로 가야 합니다. 


1. 《구미무정부주의근대사연구재단》의 설립을 구미의 시민사회에 제안합니다. 

 

구미지역 무정부주의자들의 뛰어난 업적은 다른 지역에는 어느 곳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오롯이 구미만의 뛰어난 특징입니다. 이러한 지역사는 구미인의 모범과 전형으로 반드시 후대에 전해져서 오랫동안 기억되어야 합니다. 

 

2. 구미 초등학교에 “근현대사교육관”을 설립하자고 시민사회에 제안합니다. 

 

교육관에는 근현대 선각자들의 유품과 생애의 기록물 일체가 전시되어야 합니다. 근현대의 선각자들은 미래 세대들을 위하여 봉건 잔재를 없애고, 민족의 계몽과 교육, 독립운동에 생애를 바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신 선각자들의 고심과 노력도 미래에 전달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3. 구미초등학교 100년사는 반드시 기록되어야 합니다. 

 

구미초등학교를 비롯하여 읍면 단위에 설립 초등학교의 100년 역사를 복원하고, 이를 미래 세대를 위한 역사적 자산으로 남기기 위한 활동에 지역사회의 관심을 다시 한번 호소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미래를 보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용맹정진했던 지역의 뛰어난 선각자들을 미래 세대의 주역들에게 꼭 전달합시다. 42만 구미시민들의 관심을 진심으로 호소합니다. 


 

<보충 내용>

 

박석홍(朴錫洪)

집필자 권대웅


일제 강점기 의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석홍(朴錫洪, 1896~1985)은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에서 출신으로, 중국 흑룡강성(黑龍江省) 아성현(阿城縣)에서 강화인(姜化仁)·박삼근(朴三根) 등과 함께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을 조직한 뒤 선전 부장이 되어 잡지 『농군(農軍)』을 발간하면서 목단강(牧丹江) 일대의 재만 동포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하였다. 그 후 1924년 흑룡강성 산시(山市)에서 신민부(新民府) 기관지 『신민보(新民報)』의 논설 위원으로 배일 사상 확산을 위한 선전 활동에 진력하였고, 1925년 아성(阿城)에서 김훈(金勳) 등과 함께 잡지 『혈청년(血靑年)』을 발간하여 혁명적 국권 회복 방략의 당위성과 그 투쟁 방법을 선전하였다.


1927년 이백파(李白波)와 함께 고려 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중앙 선전 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울의 일본인 집단 살해 계획을 추진하였다. 1927년 1월 중국 중동선(中東線) 해림(海林)에서 단두단(斷頭團)의 명의로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신광면(神光面)의 이동빈(李東彬)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 5천 원의 기부를 요구하는 편지를 띄워 놓고 비밀리에 입국하려다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9월 27일 청진 지방 법원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는 출옥 후에 무정부주의 노선으로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하였으나 동지들이 흩어져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귀향하였다. 『고등 경찰 요사(高等警察要史)』에 의하면, 박석홍은 ‘출옥하여 돌아 온 뒤에는 무정부주의로 돌아서 전기 이홍근 기타의 무정부주의자와 빈번하게 통신을 교환하고 주의 운동의 진출을 획책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석홍은 일본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으면서 20여 회의 예비 검속을 당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평산신씨 제정공파


출처 디지털진천문화대전-평산신씨 제정공파


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신효창을 파조로 하는 충청북도 진천군 세거 성씨.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전라도 곡성 사람으로 배현경(裵玄慶) · 홍유(洪儒) ·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숭겸이 평산을 본관으로 삼은 까닭은 왕건과 동행한 평산에서 뛰어난 사냥 실력에 감탄한 왕건이 평산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했기 때문이다.


왕건은 신숭겸을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대접하였고, 대구 공산 동수전투에서 신숭겸이 자신을 위해 대신 죽자 춘천에 예장(禮葬)하도록 하고 벽상호기태사 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광위 이보지절 저정공신(壁上虎騎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翊戴匡衛怡輔底節底定功臣)에 추봉하였으며, 시호로 장절(壯節)을 내렸다.


파조인 신효창(申孝昌)은 1394년(태조 3) 호조전서가 되었고, 1396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 1403년(태종 3) 동지중추원사를 거쳐 이듬해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후 원종훈(原從勳)에 책록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제정(齊靖)이다. 평산신씨는 조선 후기에 세를 떨쳐 상신(相臣) 8명, 대제학 2명, 공신 11명, 문과 급제자 186명을 배출하였다.

 

c_288Ud018svc18bzae0ikidwe_tg3zvl.jpg

 

b_788Ud018svc16jw6lvm6iksd_tg3zvl (1).jpg

 

c_e88Ud018svca8d9vi87kvbq_tg3zvl (1).jpg

 

c_d88Ud018svc4g6wgwailvob_tg3zvl.jpg

 

b_f88Ud018svco3d1nr24cr0o_tg3zvl.jpg

 

b_e88Ud018svc3qu37f62g3kq_tg3zvl.jpg

 

2_cadUd018svc83djw9oqg0sj_tg3zvl.jpg

구미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학자들의 노고로 맺어진 인연을 기념하며

 

 <저작권자(c)한국유통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및 사회적 공헌활동 홍보기사 문의: 010-3546-9865, flower_im@naver.com

 

http://www.youtongmart.com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