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박사/KTN한국유통신문 뉴질랜드 지국장
유학은 언제나 내 삶의 중요한 일부였다. 1997년 12월 말, 드디어 뉴질랜드로 떠날 기회가 찾아왔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고, 그 첫걸음은 경이로움과 설렘으로 가득했다. 자연이 아름답고 공기가 맑은 청정국가, 뉴질랜드 오클랜드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이 생생히 떠오른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던 낮과 차가운 바람이 부는 저녁, 낯선 해양성 기후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모험을 시작했음을 느꼈다.
1998년 11월, 오타고대학에 입학 문의를 위해 방문했다.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대학 분위기는 그 자체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장벽을 마주하게 되었다. 영주권자라면 입학이 순조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은 공인 영어 시험 성적표 제출을 요구했다. 1999년부터 영주권자도 공인 영어 성적이 필수라는 새로운 규정이 시행된 것이었다. 만약 1998년에 입학했다면 굳이 영어 성적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로 인해 입학 기회를 놓친 것이 몹시 아쉬웠다.
결국 규정이 바뀐 후 시험을 치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외국 유학생과 동일한 조건이 된 것이다. 고민이 깊어졌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입학까지는 3개월 정도 남아 있었고, 그 기간 내에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팩스로 제출하기로 결심했다. IELTS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공부는 쉽지 않았다. 절박함과 열정으로 공부에 매달렸지만, 매주 치르는 모의고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본 시험은 긴장 속에서 치러졌고, 말하기 부분에서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받아 입학의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오타고대학은 1869년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된 뉴질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남섬 끝자락에 위치한 이 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한 나는 설렘과 기대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오타고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도전의 연속이었다. 처음 참석한 오리엔테이션에는 백인, 흑인, 아시안,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었다. 서로 다른 문화가 한데 어우러진 그곳에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학업에 몰두했다. 많은 학습 시간을 확보하고 쉼 없이 달렸지만 순탄치 않았다. 학습량은 방대했고, 모든 과목이 요구하는 과제와 보고서 준비는 나를 쉬지 못하게 했다. 특히 첫 시험에서 22명 중 21등을 기록했을 때, 나는 깊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다. 그 순간의 무력함은 학업에 전념하겠다는 결단의 신호탄이 되었다.
기존의 학습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느낀 나는 2명의 뉴질랜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과 함께 학교 도서관 스터디룸에서 공부하며 학습 목표와 전략을 재정비했다. 그들은 즉각적인 동기부여를 해 주었고, 학습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하며 철저하게 파고들었다. 나무를 베어낼 수는 있어도 나무를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듯이, 완벽한 이해를 위해 기본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3개월이 흐른 후, 기적이 일어났다. 성적은 21등에서 전체 6위로 뛰어올랐다. 이는 내게 작은 희망의 불씨를 제공하며 유학생활 속에서 충격과 절망을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어주는 변곡점이 되었다.
수업은 교수와 학생 간의 활발한 토론과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토론 수업에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번뜩이는 재치와 즉각적인 대응도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 떠올랐다. “토론은 칼이 아닌 머리로 하는 기술이다.” 내 주장은 때때로 혼란스럽고 불확실했지만, 이런 과정은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주며 나를 한층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유학생활 속에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지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시험 시스템은 독특했다. 기말시험은 공무원이 감독을 맡았고, 이는 뉴질랜드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시험 문제는 논리적 사고력과 응용력을 평가하는 수준 높은 문제로 출제되어 이를 준비하기 위해 뉴질랜드 전 대학의 10년간 기출문제를 폭넓게 분석하고 풀어보았다. 그러나 시험 문제는 예상치를 뛰어넘는 난이도로 출제되었다.
이 대학에서는 졸업 자체가 하나의 영예로 여겨진다. 졸업에 대한 그들의 열광은 높은 졸업 문턱을 넘는 데 따른 깊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졸업식 날, 나는 환한 얼굴로 동기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간의 노력과 성취를 되돌아보았다.
졸업할 즈음 학교 근처에 있는 더니든 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뉴질랜드 사회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작은 역할이었지만 그 안에서 얻은 경험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진 의미로 다가왔다. 문화적 이질감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극복해 온 경험은 내게 한층 더 단단한 자아를 형성하게 했다.
돌이켜보면, 때론 고통이라 느꼈던 순간들이 오히려 그리움과 감사로 남아 있다. 나의 유학생활은 나에게 가장 빛나는 추억 중 하나이며, 운명이 단지 팔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념과 의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소중한 여정이었다. 매화꽃이 혹독한 한파와 눈 속에서도 피어나듯, 비록 고통이 엄습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모든 지류를 품고 있는 거대한 강처럼. 유학은 내 삶을 변화시킨 값진 경험으로, 언제까지나 나와 함께할 것이다.
글쓴이 박춘태
교육학 박사
북경화지아대/몽골후레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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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의 뉴질랜드 유학 이야기. 도전과 성장을 향한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