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202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기도 광주 출생 김창환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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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환과 신민회, 그리고 정의부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872년 4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김창환은 1899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1905년까지 육군 부위로 복무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이회영 등을 비롯한 신민회 인사들과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토지를 구매하고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병농제를 기반으로 학술을 연마하고 구국인재를 양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경학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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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당 박멸 책결안」(신한민보 1912년 11월 4일자)

 

1911년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는 등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 만주로 이동하여 1913년 5월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무장독립운동을 위한 간부양성에 매진했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재조직하고 총지휘관으로 활동하던 중 서로군정서 등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여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8월에는 통군부를 기반으로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8단(團) 9회(會)의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의 조직을 협의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다. 그는 통의부 의용군 사령장을 맡아 대한제국 육군 출신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한편 김창환을 비롯한 통의부 중진들은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통하여 항일독립운동의 통일을 이루려던 꿈이 깨지고, 대한통의부마저 분열하기에 이르자 만주지역만이라도 단체의 재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에 대한통의부 대표로 참석하여 국내외 각지에서 참석한 동지들과 민족 주권확립, 독립운동 노선 통일 등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5년 통의부와 길림민회를 토대로 재편된 정의부가 조직되었을 때 재무위원을 맡았는데, 당시 정의부는 10개 단체의 대표가 모여 재만한인단체의 통합을 결의하였던 단체이다. 그는 정의부 재무를 담당하여 재정운용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총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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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진

 

1929년 북만주로 이동한 그는 홍진 등 당시 만주지역 독립운동 유력자들과 함께 생육사를 조직하였다. 생육사는 만주 일대 가난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설립한 기관이었다. 그는 이를 모체로 1930년 민본(民本)정치의 실현,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을 강령으로 삼은 독립운동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다.


또한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 그는 한국독립군 부사령으로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일제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더이상 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남경으로 이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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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추당 김창환 선생을」(신한민보 1937년 5월 20일자)


남경 이주 후 한국혁명당과 합당을 추진하여 1933년 신한독립당을 결성하는데 일조하였다. 1935년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통합하여 조직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군사부 위원과 중앙검사 후보위원 등 주요 간부로 활동하다가 1937년 2월 12일 중국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 배경과 정의부 설립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1906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꿈꾸었다. 1909년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 마련과 조직 확대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더이상 평화로운 시위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 모두가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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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전현내에 통군부'(동아일보 1922년 3월 11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옛 왕조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나 복벽주의 계열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결국 독립하고 말았다.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통의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만대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正義府)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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