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독립운동가 박희광 선생배 금궁스포츠대회 성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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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KTN) 김도형 기자=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구미성리학역사관 긍운정 앞마당에서 '제3회 독립운동가 박희광선생배 금궁스포츠대회' 체험행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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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는 대한광복회 경북지부 구미시지회 주최, 세계금궁스포츠협회 주관으로 구미 봉곡동 출신 독립운동가 박희광선생의 애국애족 정신과 용맹한 기상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3회째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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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박희광 선생의 장남 박근용 대한광복회 대구지부 수성구지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어린 시절에는 부친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으나, 나이가 들어 나라사랑 태극기사랑 이 몇 가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며, 박희광 선생의 뜻을 이은 애국정신을 되새기며 참가한 선수들을 격려했다.


박희광 선생의 차남인 박정용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은 광복 77주년을 맞이해 "독립운동가 박희광선생배 금궁스포츠대회가 어느덧 3회째가 열려 구미시민 여러분들께서 많이 참석하셔서 박희광 선생을 기리는 의미있는 일에 동참해 줘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전하는 한편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35년동안 핍박받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불굴의 투혼이 있었기에 해방을 맞이했다."며 박희광 선생의 구국애족정신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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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금궁스포츠대회 개최를 축하하기 위해 박희광선생 유족을 비롯하여 대한광복회 대구시지부 수성구지회 박근용 회장, 대한광복회 대구지부 김명환 전 지부장, 대한광복회 대구지부 수성구지회 박성욱 운영위원, 엄정훈 운영위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시지회 김영득 지회장, 이수연 직전 지회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금궁은 대한민국 경북 구미에서 탄생한 스포츠이며 태조 왕권이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일리천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선궁 장군이 모티브가 되었다.

 

 

'금궁'은 "인간이 곧 활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인간의 신체와 집중력을 활용하여 침착한 자세로 과녘판에 금궁화살(핀)을 맞추는 스포츠이며, 훈련 연마를 함으로써 집중력, 인내심, 인체유연성 발달로 지덕체를 함양하는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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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독립운동가 박희광선생배 금궁스포츠대회(비대면체험행사)'는 구미성리학역사관 방문객인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현장 접수 후 진행됐다. 금궁스포츠는 경북 구미에서 창시된 투척 운동이며, 신체운동학이 적용된 금궁투척 자세를 활용해 최대 7미터 거리에서 금궁핀을 투척하여 총합산 점수로 승부를 결정짓는다.

 

김도형 세계금궁스포츠협회장의 금궁스포츠 설명과 투척 시범 후 대회가 진행된 이번 대회는 대회운영위원회 자체규정에 따라 남자 일반인은 5미터 거리에서 금궁과녁판에 금궁핀 10발 투척, 여자 일반인과 초등학생은 3미터 거리에서 각각 10발씩 투척하여 합산 점수로 순위를 결정했다.

 

총 24명이 참여한 이번 대회 참가 선수들의 순위는 다음과 같다.

 

1위 이혁래, 공동 2위 김진옥, 정은우, 3위 정연우, 4위 정준호, 5위 최수복, 공동 6위 윤영웅, 박소라, 7위 윤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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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궁스포츠를 창시한 김도형 세계금궁스포츠협회장은 "금궁스포츠 대회를 통해 독립운동과 박희광 선생의 용맹과 의기를 기리고, 또한 투척 운동을 통해 정신력 집중과 신체유연성 함양에 도움이 되는 금궁스포츠의 저변확대가 되고 있다."며 대회 개최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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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지역 출신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는 1968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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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애국지사는 1901년 2월 15일 현재 지명인 구미시 봉곡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의 11세손이자 항일 의병운동가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부친 박윤하를 따라 1912년도에 만주로 건너간 박희광 애국지사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만주 봉천성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18세 되던 해인 1922년도에 만주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 특공대원으로서 항일의거와 암살 대원으로 조선 독립운동 일선에서 맹활약하게된다.

 

박희광 선생은 대한통의부 제5중대에 배치되어 약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만철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 잠복하여 관동군 진로 봉쇄작전에 최초 투입된다. '만철'이란 당시 일제가 만든 남만주 철도 주식회의 명칭이며 연선은 철길을 의미한다. 이후 암살과 테러에 필요한 승마와 수영, 사격, 폭탄제조법, 독침,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고 신분을 감춘채 대한통의부의 암살전문요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은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해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특명을 받고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1924년 6월 1일에 윤영기 동지의 안내를 받아 무순방면의 고등계 첩자로 활동하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였던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암살 현장의 대문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라고 사형선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로 부터 얼마 되지 않은 6월 7일 대낮에는 보민회를 습격, 이용구와 더불어 친일파의 거두였던 최정규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최정규가 미리 피신해 부하 허윤과 가족만을 사살했다. 또한 박희광은 만주 지린성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 의열단과도 지속적인 교류와 활동을 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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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파악한 박희광(박상만) 선생의 첩보 기록물

 

한편 같은 해 대련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배정자(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타코)를 다롄에서 암살 실패,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 역시 암살 실패로 부상만 입혔다.

 

1924년 7월 2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했으나 불발로 실패했고 같은 날 저녁,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해 거액 군자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잠복한 중국,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 애국지사는 체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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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보다 더욱 감동적인 삼장사라 불리운 독립투사 김광추, 박희광, 김병현 선생 부조 조각상 친일파를 처단하기 전 사형선고문을 낭독하는 장면

 

 체포된 박희광 애국지사와 김병현 애국지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킬 정도의 혹독한 고문으로 수차례 기절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동안의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켜냈다고 전해지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인해 거사의 공범이였던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 신명구도 같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고 한다.

 

이들의 결연했던 의지는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에 모두 남아있다.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

 

박희광 애국지사는 1924년 대련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을 받아 20년 세월을 복역한 뒤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그후  박희광 애국지사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인 경교장으로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고, 김구 선생은 박희광 애국지사의 손을 잡은채 한참을 눈물 흘리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랜 세월 희생하고 헌신한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를 위로하고 가슴 뜨겁게 맞이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한동안 김구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암살로 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당시 해방 이후 상황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의 대립으로 인해 좌,우파간의 갈등이 고조됐던 시절이다.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한 뒤 박희광 애국지사를 비롯해 김구 선생의 일부 측근들은 흩어 지게 됐다. 그 후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너도나도 애국자로 나서는 시절이었고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은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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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활약상과 친일파 밀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암살'(사진 쇼박스)

 

박희광 애국지사는 요양과 안정을 위해 문화유씨를 맞이해 칠곡군 왜관으로 이주, 가정을 꾸리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졌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특히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상당수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적된 부외 인맥들을 통해 도리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더욱 가세가 상승하여 오늘날 최고의 부를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박희광 애국지사는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신문기사와 여러 증거 자료들이 모아짐으로서 행적이 증명되었고, 1968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 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게 됐다. 그로 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구국애족의 삶을 마감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 묘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박정용(67세)씨는 현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자 구미 금오산도립공원에 동상과,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내에 흉상이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생가 복원과 추모관 건립은 관계당국의 업무 떠넘기기로 혼선을 빚어 난항을 겪었던 사실을 2013년 3월 1일자 영남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바 있다.

 

또 2013년 10월 12일 매일신문 전병용 기자에 의해 다시 한번 알려진 박희광 애국지사의 구국정신과 나라사랑은 그 숭고한 뜻을 알리고자하는 기념사업회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동상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이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립하지 못했으며,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시보조금과 시민성금 그리고 문화원 이사와 유족측에서 비용을 모아 1984년 12월 28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현재 둘째 아들 박정용씨가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박희광 애국지사와 관련된 사업을 구미 문화원과 함께 진행, 기간을 정해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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