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도식 및 기념사업회 발족식 열려

이념과 방략으로 나뉜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어낸 통합의 화신

 

(전국= KTN) 김민조, 김도형 기자= 김동삼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경한)는 13일 오후 3시부터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일송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도식 겸 기념사업회 발족식’을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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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선생 85주기 추도식 겸 기념사업회 발족식에는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등과 김문생(손자), 김복생(손녀), 이신자(손부) 등 일송 김동삼 선생의 유족들과 의성김씨 학봉문중 및 독립유공자 후손 등 250여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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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의 맹호로 불리던 일송 김동삼 선생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추앙받는 인물 중의 한 분이다.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한국일보 기고를 통해 어떤 학자가 "독립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고 가장 성과를 많이 낸 분을 우리가 해방 후에 대통령으로 추대를 하였다고 하면 과연 누구였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지자 좌중은 모두 "그는 일송 김동삼"이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했으리만치 일송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독립운동 역사가 임시정부 인사들을 비롯한 살아 돌아온 애국지사를 중심으로 부각되어 일송 김동삼 선생의 위대한 업적은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한 과거가 실재하여 이날 기념사업회 발족식을 시작으로 선양사업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


식전 행사로 대한민국 만세 삼창과 함께 이혁재 테너의 일송 추모가를 비롯해 경북오페라단 이철수 단장이 일송 김동삼 선생의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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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재 테너의 일송 추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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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수 경북오페라단 단장의 김동삼 장군의 최후의 노래


이철수 단장은 "대구경북독립운동기념관에서 나라사랑음악회를 5년 째 진행해오고 있다."는 말과 함께 "정말 필요한 것이 일송 김동삼 장군의 오페라가 필요하다. 그 분의 업적들을 어떻게 문화로서 전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제가 이렇게 나왔다."고 밝혔다.


이 단장은 김동삼 선생의 마지막 유언이 가슴이 남는다며 "나라도 없는데 무덤이 필요있나. 그 유언과 그 분의 염원을 담아서 김동삼 장군의 최후의 노래라고 오페라 이름을 지었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동삼 선생의 손자인 김문생 선생은 유족 대표로 나와 인사말을 통해 "가족들도 희생이 따랐다. 광복후 고국에 돌아와 상당히 힘들게 살았다. 1968년도에 유학을 갔다."라며 고국을 떠나 지나온 날을 소회하며 일송 김동삼 선생의 기념사업회 발족식을 통해 앞으로 기념사업이 좋은 결실을 맺기를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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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송 김동삼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안동 내앞 마을 출생으로 1907년 협동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매진했다. 김동삼 선생은 1910년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만주 백서농장을 개척하여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김동삼 선생은 1922년 8월 '8단9회' 대표 71명을 규합하여 '남만한족통일회의'에서 결성된 대한통의부 총장이자 중앙행정위원회 수반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듬해 1923년 상해에서 한국 독립운동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좌우파 독립운동가 4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 때 부의장은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이, 사회주의 계렬로는 윤해 선생이 맡았다.

 

김동삼 선생은 1926년부터 1929년까지 4년동안 만주 일대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주도하였고 한국독립당 건설에 참여했다.


1928년 12월 참의부 김승학, 정의부, 신민부 김죄진 장군과 혁신의회를 결성한 김동삼 선생은 비록 3부를 통합시키지는 못했으나 통합을 위해 가장 큰 정의부를 탈퇴하며 좌우를 가리지 않고 통합을 주도하였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리던 김동삼 선생은 1931년 10월 5일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룬다.


김동삼 선생은 1934년 옥중에서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남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이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내가 원래 구런 죽음을 소망하였던 바인데 오늘날 이런 곳에서 죽게되는 것은 유한으로도 생각된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1937년 4월 13일 60세의 나이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김동삼 선생은 마지막 유언으로 "나라 잃은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하겠느냐, 나 죽거든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고 말했다.


김동삼 선생의 유해를 수습한 만해 한용운 선생은 성북동 삼우장으로 옮겨 빈소를 차렸으며 "유사지추(비상한 시기)가 도래하면 이분이 아니고는 태사를 이루지 못한다"는 말로 위기를 걱정했다.


이날 발족식에서 김경한 일송 기념사업회장은 축사를 통해 "일송 김동삼 선생의 통합과 화해의 정신은 오늘의 우리 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를 위한 지표가 되는 정산이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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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격려사에서 "일송 김동삼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고 그분의 지향대로 따라가자"라며 국민통합을 위한 노력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김동삼 선생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이념과 방략에 따라 나뉜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묶어내는 통합의 화신이었다. 이상룡 선생이 남만주를 대표하는 큰 어른으로서 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다면 김동삼 선생은 현장을 몸소 다니며 활동한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일송 추모가(1절)


어둠속에 햇 불들고 일어나라 외치시던 님 빼앗긴 조국 되찾으려는 눈물 뿌리며


강을 건넛네 호지에  밭갈고 글 가르치고 독립군 길러 원수와 싸우기 


아 광야의 비바람 몇 세월 이던가 임의 뜻 한 평생 여리바쳤네


(후렴구)심상한 들바람도 옷 깃 여미고 우러러리라 온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 그 이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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