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광야' 속 초인, 구미가 낳은 인물 허형식 장군 재조명<한국유통신문.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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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은 중국 동북이나 연변 지방에서 발행된 각종 역사서나 전기류에서 거의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을 정도로 저명한 투사지만 국내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비록 중국공산당원으로서 동북항일연군과 북만성위원회의 주요지도자로 활동했지만 특히 항일투쟁 부문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대다수의 한인 중공당원이나 항일연군의 지도자들이 북한지방 출신이었지만 허형식 장군은 남부지방 경북 구미 출신이었고, 1900년대 초 걸출한 왕산 허위 의병장의 일족이었다.

 

정치이론과 사상 및 대원교육 그리고 전략전술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로 군조직을 이끌었던 점은 왕산 허위 선생 이상의 능력을 보인다. 1940년대 초 최용건, 김책, 김일성 등과 필적하리 만치 최고의 고위 간부였고 중국동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최후까지 전개함으로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허형식 연구 '동북항일연군내 주요 한인지도자의 항일투쟁 사례검토'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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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 15일 왕산허위선생기념관 박민영 교수의 경북 정체성 찾기 강연 중 허형식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에 대해 잠시 언급됐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히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전국= KTN) 김도형 기자= 시 '광야'는 저항시인 이육사의 후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 한 뒤 동생 원조에 의해 1945년 12월 17일 자유신문에 발표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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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내앞마을에 위치한 경북독립운동기념관 내 이육사 독립운동가 관련 전시물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은 허형식의 사촌 누나다.


필자는 80년대 중반 중학교에 들어와 '광야' 시를 처음 접했고, 국어 시간에 이육사의 광야를 읊던 선생님의 비장한 목소리가 아련하다.

 

선생님께서 시를 설명하며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타계할 초인의 존재에 대해 상상력을 가미해 얘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지만 80년대 당시에 초인이란 상상 속의 인물로만 묘사되었던 것이 한계였고, 실존 인물과 대비시키기가 힘들었던 시대적 상황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 이유는 초인의 모델이 공산주의 계열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이며 경북 안동 출생이지만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많은 인물이다. 특히 구미가 배출한 걸출한 항일독립운동가인, 1908년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서울 진공작전을 주도한 왕산 허위 선생과 이육사의 외조부는 사촌지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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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대학교 교수이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인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공동저자로 참여한 '왕산 허위선생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 책 왕산 허위 선생은 경북 구미 임은동 태생으로 지금의 대법원장 격인 평리원장 관직을 역임, 국권을 잃자 관직을 버리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어 형 방산 허훈은 땅을 팔아 군자금으로 댔다. 형 성산 허겸은 아우와 함께 의병에 투신, 만주로 망명 후 부민단 초대 단장으로 항일전선에 씨앗을 뿌렸다. 또 사촌 아우 범산 허형, 시산 허필도 남부여대 봇짐을 지고 만주로 망명해 모두 항일전선에 앞장 섰다.

 왕산 허위선생은 1908년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일본 통감부를 깨트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했다. 일본군과 접전했지만 구식 무기로 신식 무기를 감당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어서 경기도 연천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민족의 역적 이완용은 연천으로 사람을 보내 벼슬을 조건내걸며 왕산 선생을 회유했으나 선생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곧 일본 헌병에게 체포된 왕산 선생은 서대문 형무소 최초의 교수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일제의 왕산 선생 처형에 이어 구미 임은동 허씨 일족들에 대한  일본 순사와 밀정들의 감시는 수위를 넘어 허씨 일가는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후손들은 수천킬로미터 떨어진 러시아·키르기스스탄·중국·미국 등 먼 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풍찬노숙으로 회한에 찬 기구한 운명의 삶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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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 허위 선생을 비롯해 허형식 장군 등 허운 선생 일가 대다수가 독립운동에 나섰다.  구미가 배출한 최고의 독립운동 가문이지만 이들의 독립운동활동으로 인해 후손들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기가막힌 기구한 운명의 임은 허씨 일가의 생애는 종종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비통한 삶의 대명사 격으로 회자되기도 한다.(사진 구미시 임은동 왕산기념관 소장, 100년만에 만난 왕산의 후손들)


1908년 10월 21일 왕산 허위 선생이 옥중 순국 뒤 왕산의 형제 가족과 일가들은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아 위기에 처했고 이후 1910년과 1915년에 걸쳐 대다수가 만주 서간도로 망명을 감행했고 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이들 중 허필은 왕산 허위 선생의 10살 어린 사촌동생으로서 의병활동을 했으며 1906년 3월 오적암살사건에 연루되 체포된 범산 허형의 동생이다. 1915년 자신의 가족과 형 범산의 가족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1909년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난 허필의 둘째 아들인 형식은 6살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만주로 갔고, 후에 자라 만주에서 중국공산당 항일유격대 제3로군 총참모장 및 북만성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전쟁의 선봉에 섰다. 동생인 규식은 형 형식의 휘하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초인의 탄생

 

허형식 장군은 만주 요녕성 통화현에서 자라 1929년 흑룡강성으로 이주한 뒤 사회주의운동에 참가했고, 1930년 초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그해 5월 '간도 5·30 봉기'에 참가해 군중을 동원함으로서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해 이름을 알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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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은 훌륭한 성품과 잘생긴 외모로 여성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백마를 타고 용맹스럽게 북만주벌판을 말달리며 누비던 시대의 초인


한편, 허형식 장군의 사촌누이 허길의 아들이자 구미출신 독립운동가 범산 허형의 외손자인 이육사는 1904년생으로 21세인 1925년에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는 1926년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이듬해 귀국했으나 구미출신 독립운동가 장진홍 선생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뤘고 이 때 그의 수인번호 64를 따 호를 '육사'로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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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시인 이육사는 신문기자로도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 만난 허형식의 비범함에 매료되 '광야'시를 지은 계기가 됬다고 알려져 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1933년에 귀국해 육사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43년 중국에 다녀 온 뒤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그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생애 전반에 걸쳐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저항시인이다.

 

시 광야에서 초인이 의미하는 바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꽃피울 초월적인 존재이자 위대한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이육사가 겪은 독립운동가 중 초인이 될만한 인물은 다름아닌 만주와 시베리아벌판을 누비고 다니며 일본군에 맞서 용맹하게 싸운 허형식이다.

 

이육사는 1930년대 말 만주에서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고군분투한 외삼촌 허규와 함께 당시 동북항일연군 장군이었던 허형식을 만주 전구에서 만났다고 하며, 항간에는 이육사가 허형식의 훌륭한 인품과 용맹성에 매료된 나머지 '광야'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백마를 타며 전장을 지휘했던 허형식 장군과 광야 속 백마탄 초인의 연관성에 대해 쉽게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중국 연변의 유순호 작가가 쓴 '만주항일 파르티잔' 책 내용에서 허형식 장군의 활약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조상지, 주보중, 김책, 김성주... 이들은 모두 소련 땅으로 달아나고 허형식만 홀로 남아 일본군과 싸웠다. -당시 일본군이 비행기,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동북항일연군 소탕작전을 벌였다. 백마를 탄 허형식이 기마부대를 이끌고 북만주 평원을 무인지경 드나들듯 했다. 군청과 경찰서를 공격, 접수하고 군수를 공개 총살시켰다. 은행을 털어 현금과 금동이를 빼앗았다. 현금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한반도에서 김일성장군이 백성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군과 면을 공략하고 철퇴하던 허형식 부대가 때마침 일본군 군용열차를 만나자 전복시켰다. 하얼빈 일본 헌병대의 군사지도에 허형식이 불을 지르고 간 곳을 시뻘건 화살표로 표시했는데 그 화살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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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잔(partisan)은 일명 빨치산으로 와전돼 불리고 있고 체제에 항거하는 당원이나 유격대를 일컷는 말이다. 연변자치구가 형성된 요인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공으로 인함이다.  


허형식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중 중국 공산당원으로써 반일유격대로 활약하며 맹위를 떨친 명실공히 최고의 지휘자였다.

 

1930년 일본영사관 습격사건으로  체포되어 1931년 선양감옥에서 출소한 허형식 장군은 사회주의단체를 결성해 반일 선전과 조직활동을 활발히 펼쳐 반일유격대의 기반을 마련했다.

 

허형식의 본격적인 군사지도자의 길은 1935년 반일유격대와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면서 부터다.  일본군 거점지역과 일본의 농장 설비를 군사적 수완을 발휘해 공격함으로서 공을 세운 그는,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성장할 당시 선발대장으로서 2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북만주 서북 방면의 새로운 유격투쟁 지역을 개척했다.

 

북한의 김일성 또한 허형식 장군과 비슷한 시기에 부각되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조선과 중국 연합으로 이뤄졌으며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1935년 중국공산당은 조선인 유격대의 주력 부대인 동만의 유격부대를 조선 혁명의 추진 주체로 인정했고, 이 부대는 1936년 3월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했다. 제2군의 3개 사중 김일성은 제3사 사장에 취임해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장백현에 진출했다. 당시 김일성은 과반수가 조선인인 600 여명의 유격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이며 최대 1만명의 군사규모로 성장해 일제에게 있어 중국 침략에 큰 장애물이었다.

 

허형식은 1939년 5월에 북만주지역 항일연군 3, 6, 9, 11군을 통합한 3로군 군장으로 취임함으로서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대토벌에 견디다 못한 그의 동료이자 부하였던 조상지, 주보중, 김책, 김성주(김일성) 등은 소련행을 설득했지만 최후까지 만주에 남아 무장투쟁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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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윗줄 맨 오른쪽)과 함께 활약했던 동지들 동그라미속 인물은 만주항일연군 총사령관 조상지이며 허형식의 지휘를 받았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북만주 극한의 추위속에서도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해 큰 전과를 세우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칭안 칭펑리 산골에서 토벌대에게 발각되 부하 2명과 함께 비장한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군에게 있어 큰 장애물이었던 허형식을 사살해 기쁜 나머지 그의 시신은 유린당해 회수조차 불가능했다고 한다.

 

왕산 허위의 5촌 조카이자 이육사의 5촌 외아제였던 허형식은 경북 구미출신의 출중한 독립운동가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그리고 북한에서는 김일성보다 더 출중했고 용맹했던 항일투사였음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해 그의 존재를 알리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임은 허씨 5촌인 왕산 허위 선생만 구미가 낳은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각광받고 있을 다름이어서 시대의 변화와 맞물려 독립운동사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인물인 허형식 장군에 대한 재조명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시점이 도래했다.

 

북한사회에서 우상화된 김일성의 존재를 누를 수 있는 허형식 장군의 일대기는 북한 독립운동사를 아우를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다. 북한의 김일성을 능가하는 인물의 존재가 있었다는 하나만으로도 다가올 통일사회에서 허형식 장군의 가치는 민족의 정신적인 통일을 위해 부각돼야만 하는 역사적인 당위성이 있다.  

 

최후까지 만주에 남아 잔혹했던 일본군대에 맞서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허형식 장군의 기개는 어릴적 부터 왕산 허위선생과 왕산 문중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음을 물론이며, 영남인재의 반이 배출됐다는 선산(구미)의 뿌리 깊은 정신적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해방 72주년을 맞이해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투쟁에 나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업적들이 있는 사실 그대로 알려져야만 할 시대적 당면 과제에 봉착해 있다.

 

남북분단 대치상황 속에서 주적인 북한공산당으로 인해 늘 공산주의의 그늘에 가려져왔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했던 삶의 현장 또한 우리가 알아야만 될 역사적 사실이다.

 

북한은 김일성 집권 당시 친일파 세력을 대다수 처단했지만 우리나라의 이승만 대통령은 도리어 친일파 세력를 대거 등용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암담하게 만들었다.

 

통일을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만 될 일은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해방 전후에 감쳐진 우리네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다.

 

초인 허형식 장군의 불꽃같던 삶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반드시 이룩해야만 될 통일에 대한 의지를 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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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청송령 들머리에 있는 허형식 장군 희생지 기념비 기념비 앞면에는 '항연제3로군총참모장허형식희생지'와 뒷면에는 허 장군의 약력이 기록되 있다.

 

<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 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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