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시민운동가 "구미시는 제3의 장소에 '왕산광장' 을 마련하라." 지역상생발전을 위한 제언

김도형 0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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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운동가 김종길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상임대표 "논란의 구미시, 지역 상생발전 방안 제시!"

 

첫째, 구미시는 제3의 장소에 《왕산광장》을 마련하라.
둘째, 구미시는 지금의 왕산로를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라.

셋째, 구미시는 왕산기념관 일대의 체육공원을 《왕산공원》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그에 걸맞은 조성계획을 수립하라.

넷째, 구미시는 하루 빨리 《왕산선생문집》을 국역하여야 한다.

다섯째, 누각의 명칭은 “산동루”가 적절하다.
여섯째, 이상의 조건이 충족될 경우, 산동면에 조성된 시민광장의 명칭은 《장진홍 광장》이 적절하다.

 

(전국= KTN) 김도형 기자= 2일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김종길 상임대표는 시민운동가로서 최근 지역의 역사문제와 관련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대안을 제시했다.

 

김종길 상임대표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왕산 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에 대해 지역 사회에서 "전혀 불필요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장세용 시장에 대해 지자체장으로서 운용의 묘를 살릴 것을 조언했다.

 

김 상임대표는 지자체장의 행정경험이 전무할지라도 "창조성을 발휘하고 여기에 운용의 묘(妙)가 결합되면 얼마든지 장점으로 기능하겠지만, 행정의 섬세한 부분에 이르면 한순간에 치명적 독(毒)으로도 작동될 수 있음을 장 시장은 명심하여야 한다."라고 밝혔다.

 

더불어 김종길 상임대표는 "시민단체는 귀찮은 제안자이기도 하지만 시정의 균형을 이루는 좋은 동반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며 "42만 시민의 수장이 만나는 사람 가운데 100에 99은 아부꾼들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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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5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3.1운동 100주년 임은동 만세운동 지도자 강용준 지역사회 소개 기자회견 현장

 

1명의 비판자가 바로 언론과 시민단체라고 말한 김 상임 대표는 “아니오” 만을 외친 위징(魏徵, 580~ 643)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당 태종이 "중국 최고의 군주가 되었음을 명심하라"고 해 역사적으로 반대급부를 수용해 성공한 지도자의 사례를 곁들였다. 

 

 

<김종길 지방분권운동 구미본부 상임대표의 구미시상생발전을 위한 제언 내용 수록>

 

현재 구미시는 역사논쟁 중이다. 구미공단 50주년 영상홍보물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보수적인 단체와 중립적인 시민단체들은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구미시는 진보적인 시민단체들과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신 왕산 선생에 대한 선양사업을 둘러싸고 전혀 불필요한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구미시와 지역의 시민단체들은 지난 1987년 이후 지금까지 예외적인 몇 가지 사안을 제외하고는 벼랑 끝 갈등이나 큰 마찰 없이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지내왔다. 첨예한 노동 현안이나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평가와 새마을 테마파크 건립사업,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 중앙공원 난개발 사업 등을 제외하고는 서로가 평행선을 달릴 정도의 갈등은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주당 출신의 장세용 시장이 취임한 이후 계속 갈등으로 치닫고 있다. 이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또한 구미시와 장세용 시장에게 지역에서 협치를 이룰 것을 제안하였다. 구미시의 시정 운영에 문제점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최근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구미시청 간부 공무원들과 비서진은 시장 보좌 능력, 업무에 임하는 태도, 정무적 판단, 민원인 대응, 시민단체와의 관계 설정 등 모든 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구미시 부시장, 정책담당관, 관련 국·과장들은 지난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의 논란은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이견의 조정에 조금만 노력을 기울였다면 빛나는 성과물이 될 사안이 거꾸로 질타의 대상으로 뒤바뀌는 일은 결코 없

었을 것이다.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왕산 광장”이나 “왕산루” 문제는 구미시가 조금만 세심히 살폈더라면 일찌감치 해소될 문제였다. 대화하지 않는데 무슨 문제가 풀리겠는가. 문제를 키우기 전에 대화하라. 장세용 시장의 약점의 근원은 행정 경험이 전무(全無)한 것이다. 행정 경험이 없더라도 창조성을 발휘하고 여기에 운용의 묘(妙)가 결합되면 얼마든지 장점으로 기능하겠지만, 행정의 섬세한 부분에 이르면 한순간에 치명적 독(毒)으로도 작동될 수 있음을 장 시장은 명심하여야 한다.

시민단체는 귀찮은 제안자이기도 하지만 시정의 균형을 이루는 좋은 동반자라는 인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42만 시민의 수장이 만나는 사람 가운데 100에 99은 아부꾼들이다. 1명의 비판자가 바로 언론과 시민단체라고 보면 된다. “아니오” 만을 외친 위징(魏徵, 580~ 643)을 평생의 동반자로 삼은 당 태종이 중국 최고의 군주가 되었음을 명심하시라.

 

다음의 왕산 광장 문제에 대한 조정안은 궁여의 일책일 뿐이다. 관련 시민단체와의 진지하면서 성의를 다한 대화를 통하여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합리적인 수습방안을 도출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제안서》

구미시와 장세용 시장은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 《왕산 광장》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여야 한다.
=구미시와 구미시의회, 시민사회에 한 사람의 구미시민으로 조정안을 제출한다.

 

최근 구미시에서는 산동면 일대 국가4산업단지 확장단지에 한국수자원공사가 조성한 시민광장과 누각의 명칭을 둘러싼 갈등이 날로 증폭되어 해결의 지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漂流)를 거듭하고 있다.
수자원공사가 2015년 초 관련 계획을 발표하자, 그해 6월 시민광장의 명칭을 “왕산 광장”으로 하고, 광장 내에 “왕산루”와  왕산 가문이 배출한 14위(位) 독립운동가들을 새긴 조형물을 설치하자는 제안이 그해 6월 지역의 시민단체인 구미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구미경실련)으로부터 지역사회에 제출되었다.
당시 구미시는 박정희 전 대통령 100주년 기념사업과 새마을 테마파크 건립사업에 1,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하여 시민 일각에서 비판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아울러 한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을 선양하는 사업에는 상대적으로 인색하다는 여론까지 비등하여 구미시로서도 출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국 구미시는 구미경실련의 제안을 수용하였고, 시민광장 조성은 경북과 대구의 유력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받으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수자원공사는 56억 원의 예산을 투입, 3만㎡에 이르는 공원 내에 8,000㎡ 규모의 시민광장을 조성하였고, 누각과 조형물도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런데 장세용 구미시장이 취임 직후 수자원공사를 방문하고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은 태생지 중심”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상황이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산동면협의회의 민원이 접수되자 구미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칭변경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왕산 광장을 “산동 광장”으로 왕산루를 “산동루”로 변경하고, 이를 수자원공사에 통보하였다. 시장 취임 2달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구미시로서야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일이 커져도 너무 커졌다. 최초로 제안한 구미경실련에 이어 다른 시민단체까지 가세하여 원안대로의 추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90 노옹인 왕산 선생의 장손자 부부가 1인 시위에 나서기도 하였다. 여기서 그쳤으면 좋으련만 2019년 9월 27일 오후에는 산동면 주민 100여 명이 구미시청에서 집회를 개최함으로써 사안은 일파만파 번져 날로 확대되고 있다. 뿐인가. 지방에서 중앙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언론은 연일 구미시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으며, 특히 장세용 구미시장이 왕산 선생의 장손자 부부를 면담하는 과정에서 절제되지 않은 언동으로 부적절하게 대응한 사실까지 알려져 비판적인 여론이 쉬이 가라앉지도 않을 전망이다.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수자원공사 역시 난감한 처지에 놓여 있다. 광장과 누각의 명칭이야 구미시의 결정을 존중한다지만 왕산 가문의 독립운동가 14위를 새긴 조형물은 명백하게 여전히 수자원공사의 수중에 있고, 원만한 대안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설치 장소 또한 현재까지는 산동면의 시민광장 외에는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조형물이 1년 가까이 창고에 방치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로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이러한 논란은 구미시가 자초한 결과이다. 시간도 지날 만큼 지났다. 더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가문을 선양하려는 일이 논란으로 번지고, 구미시와 시민단체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지면서 시민 사이의 분열로 발전하여 확대일로로 치닫고 있는 현금의 불행한 사태는 하루빨리 종식되어야 하고 원만한 타협의 지점을 찾아야 한다.

 

최근의 논란을 지켜보면서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이하 구미본부)와 구미근현대사연구모임(이하  근현대사모임)은 시민단체로서 《첨예한 지역의 현안》을 해소하기 위한 충정으로 대안 마련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고, 몇 차례의 현장 방문과 논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조정안을 마련하였다.

 

우리는 논란의 와중에 조정안을 제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지 잘 알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조정안이 최선의 해법(解法)이라고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시민 다수가 찬성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철회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전제하기로 하였다.


또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하여 단체의 제안으로 하지 않고, 한 시민의 입장으로 하여 조정안을 제출키로 하였다. 그래야 철회가 쉽기 때문이다. 조정안은 왕산 선생과 가문에 대한 선양사업이 존중되고,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여 타협의 지점을 찾아 합의를 이루려는데 주안점을 두고 작성되었다. 또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은 분산하는 것보다 가능하면 집중하는 것이 좋다는 점도 고려하였다. 조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구미시는 제3의 장소에 《왕산광장》을 마련하라.

 

왕산광장의 적지(適地)로 분수(噴水)가 있고 구미시의 중심이면서 교통량과 인구이동이 많은 지금의 송정공원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 왕산 선생과 왕산 가문의 위상을 고려할 때 구미시의 외곽에 해당되고 접근성이 떨어지는 산동면보다는 중심가에 있는 송정공원이 적지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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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도시들은 도시의 중앙에 광장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한다. 광장의 명칭은 지역의 명칭이나 도시의 설립자, 성인(聖人), 독립영웅, 혁명가, 국가를 대표하는 위인이나 예술가의 이름이 주로 사용되고 있다.


구미시는 도시계획이 마련되고 구미공단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시민광장이나 연구소, 교육 · 문화인프라의 확충을 반영하지 못한 채 50년을 경과하였다. 이것은 실로 핵심을 놓친 선택이었으며, 뼈저린 실착이 아닐 수 없다. 구미시는 이제야 최초의 시민광장을 갖게 되었다.


현장을 살펴보니 누각은 우람하게 조성되었고, 주변은 잘 꾸려져 있었으며, 모든 공사를 마친 지금 전국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광장은 훌륭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규모도 “서울시청광장” 보다 크다고 한다.

 

둘째, 구미시는 지금의 왕산로를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라.

 

수도 서울에 자신의 호를 거리명으로 가진 위인은 많지 않다. 세종로, 충무로, 을지로가 있고 근세의 인물로는 왕산 선생이 유일하다. 구미시에는 왕산선생기념관이 있는 임은동 일대에 왕산로가 있지만 선생의 위상에 크게 미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에 구미역에서 왕산선생기념관에 이르는 도로를 왕산로로 연장할 것을 구미시에 제안한다.


구미시에는 인물을 기리는 도로의 명칭으로 오태동에서 시작하여 송정동을 거쳐 연결하는 도로인 “박정희로”가 있고, 김천JC와 구미IC를 연결하는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나란히 이어진 “야은로”가 있다.

 

셋째, 구미시는 왕산기념관 일대의 체육공원을 《왕산공원》으로 명칭을 확정하고, 그에 걸맞은 조성계획을 수립하라.

 

구미시는 당초 만평 규모로 기념관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현재 기념관으로 3,000평을 활용하고, 나머지는 체육공원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7,000평의 여유부지가 있는 셈이다. 그곳에 선생의 유허비, 묘소, 재사가 조성되어 있다. 이번 기회에 나머지 7,000평의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기념관 운영방안에 대해서도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마련하여 운영에 내실을 도모하여야 한다.

 

넷째, 구미시는 하루 빨리 《왕산선생문집》을 국역하여야 한다.

 

왕산 선생 서거 110년에 이르는 현재까지 선생의 유일한 저술인 “왕산선생문집”을 국역(國譯)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내년 예산에 반영이 어려우면 긴급 예산을 세워서라도 국역을 서둘러야 한다.

 

다섯째, 누각의 명칭은 “산동루”가 적절하다.

 

누각은 한국과 중국에 주로 조성된 건축물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누각으로는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 안동의 만대루, 상주의 관수루, 함양의 학사루, 남원의 광한루, 서울의 경회루, 평양의 부벽루가 있다. 중국의 4대 누각인 호북 무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호남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 강서 남창(南昌)의 등왕각(藤王閣), 산서성(山西省)의 관작루(鸛雀樓)에는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런데 현재까지 살펴본 바로는 어떤 누각도 사람의 호(號)를 누각의 명칭으로 삼은 곳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대개가 풍경을 은유한 상징적 단어들을 차용한 명칭뿐이다. 누각이 어떤 곳인가. 좋게 말하면 풍광을 즐기면서 선비들이 풍류와 문화를 꽃피운 곳으로 평가되지만, 나쁘게 말하면 봉건 잔재에다 민중 수탈의 상징물이다. 근대의 선각자이신 왕산 선생이라면 자신의 호를 딴 누각을 그다지 반기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섯째, 이상의 조건이 충족될 경우, 산동면에 조성된 시민광장의 명칭은 《장진홍 광장》이 적절하다.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선생은 현재의 장소에서 고개 하나 넘는 곳에 위치한 옥계동 출신이다. 선생은 1927년을 전후하여 산동면 성수동 출신 황진박(黃鎭璞, 1888~1942), 같은 면 적림동 출신 박관영(朴觀永, 1899~?)과 함께 대구 조선은행 폭탄 의거를 계획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진박은 1년 6개월, 박관영은 1년의 옥고를 치렀다. 황진박은 독립운동가로 서훈이 되었지만, 1952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행방불명된 박관영은 서훈조차 받지 못한 처지이다. 유족들은 아직도 박관영 선생의 사망신고조차 않고 있으며, 독립운동가에 소홀한 세태에 통한을 토로하고 있다.

 

장진홍 선생의 죽마고우이자 평생 동지로서 인동 3.12 만세운동의 주역이기도 한 이내성(李乃成, 1892~1927)은 비밀의 누설을 염려하여 자결하였다. 일본인이면서도 장진홍 선생에게 폭탄제조법을 전수하고, 거사의 자금(資金)까지 제공한 호리키리 시게사부로(堀切茂三郞, ?~1927) 또한 대구에서 자결하였다. (每日申報 1927년 10월 24일 2면 1단 기사 참조)


이들 외에도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구미시 원호동(元湖洞) 출신의 해산(海山) 김정묵(金正默, 1888~1944)과도 교류하였다. 장진홍, 이내성, 김정묵은 왕산 선생과도 무관하지 않다. 모두 왕산 선생의 제자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장진홍과 이내성의 스승인 장지필(張之必, 1881~?)은 일찍이 근대를 수용한 뛰어난 인재였다. 그는 1905년부터 인동 진평동교회(현, 강동교회) 내에 설립된 인명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창가(唱歌)로 항일의식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08년에 지방자치론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인동 3.12 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곧바로 만주로 가서 의열단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1926년 귀국하였다. 족보를 살펴보니 몰년도 기재되어 있지 않고 후손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19년 파리 장서(長書)에 최고령자로 서명한 긍와(肯窩) 이능학(李能學, 1841~1925)도 산동면 송산 출신이다. 그 외 왕산 선생의 평생 동지 우용택(禹龍澤, 1868~1940)은 해평 출신이다. 산동과 해평에는 왕산 선생의 벗들이 여럿 확인된다.


만약 광장의 명칭이 《장진홍 광장》으로 된다면 이곳에 그의 동지들과 산동과 해평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조명받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장진홍 선생의 동상은 당초 금오산 입구에 있었다. 2001년 옥계초등학교로 옮겼고, 낡고 훼손이 심하여 최근 새로 제작, 현재는 동락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투탄하는 모습으로 제작된 동상은 의거의 실제와 차이가 있다. 장진홍 선생은 폭탄을 투척하지 않았다. 여객 안내원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하였다는 것이 팩트(fact) 이다.


역사는 기록이고 정확하여야 한다.

 

인동(仁同) 지역은 1978년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인동의 주민들이 편입된 지역으로서의 소외감과 상대적 박탈감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 해당된다. 강동 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역사에 대한 공유나 인물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 강서 지역에 편중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러한 감이 없지 않다.


장진홍 선생의 기념사업은 해방 직후 영남일보의 후원으로 경북과 대구의 독립운동 동지들, 유림, 지식인, 여론주도층, 유족들로 구성되어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도 정작 구미에서는 그를 기리고 선양하는 활동이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은 42만 시민 모두가 되새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동에는 광복회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권쾌복(權快福, 1921~?)도 있으며, 인동 3.12 만세운동 참가자들이 다수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그 외에도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


인동의 구미시 편입으로 수천 년에 이르는 인동의 역사도 동시에 구미시에 편입되었다. 이로 인해 구미시 역사의 지평은 더욱 확대되고 풍성해졌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인동을 비롯한 강동 지역의 역사와 인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2019년 10월 2일
 
《제출자》
김종길
연락처: 010-5476-1720

 

*김종길 시민운동가의 구미지역상생발전방안 대안 관련 자료 첨부(장진홍, 이내성 등 지역의 독립운동가 공적사항 기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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