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장세용 시장 조부 적우 장홍상 독립운동가 재조명 기자회견, 김유영 영화감독 및 구미국채보상운동 기념 제안

김도형 0 2,923

20180419210801_cycfaoux.jpg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9일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이하 구미본부)에서는 1907년 구미지역에서 진행된 국채보상운동 기념과 김유영 영화감독 기념 제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더불어 구미본부에서는 대구조선은행폭탄의거 장진홍(張鎭弘, 1895~1930) 선생과 지역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적우(赤友) 장홍상(張弘相, 1902~?) 독립운동가에 대해 소개하기로 했다.

 

장세용 구미시장의 조부인 장홍상 선생은 인터넷상에 적우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학계는 물론 지역사회에도 전혀 소개되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대구와 경북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면 저명인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대구와 경북에서 사상운동가로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는 이번에 적우 장홍상 선생에 대한 연보를 만들었다고 하며 이를 토대로 장적우 평전을 준비 중에 있다. 또한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에 대하여 서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관심을 높이려고 준비 중에 있다고 밝혔다.

 

해방되기까지 모두 다섯 차례 옥고를 치룬 장홍상 선생은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 선생 의거가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한 달간 구류를 받아 평양형무소에서 석방되었고, 1928년 8월 26일 부터 1929년 5월가지 피검되었다 일시 석방, 1929년 6월 중 다시 피검되어 1932년 6월 23일 3년 만기 출소(3차 당 관련), 1940년 11월부터 1942년 2월 23일까지 왜관 및 인동의 농민조합 조직으로 1년 형을 받아 만기 출소, 1945년 8월 7일 부터 8월 16일까지 건국동맹으로 피검되어 왜관경찰서에서 피검되어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다.

 

thumb-20180913215619_llwnvbqi_600x399.jpg

 

thumb-20180913215619_wlxddeyr_600x900.jpg

중국 장사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장세용 구미시장, 경북 유일의 더불어 민주당 지자체장으로 대학시절 민주화운동을 했다.

 
선생은 대구고보 학생맹휴운동을 외부에서 지원한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이와 관련하여 경북고등학교에서는 “2016년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항일학생운동과 6·25참전학도병기념비를 함께 건립”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영남일보  2013년 12월 13일 보도 기사 참조)

뿐만 아니라 선생과 관련된 제3차 당사건과 농민조합 조직 건의 관련자들은 이미 상당 부분 서훈을 받고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DSC03728.jpg

DSC03729.jpg

폭탄의거 장진홍 선생 사진과 업적

 

구미본부에서는 지난 6월 26일 장세용 구미시장 당선자와 인수위원회에 5가지 큰 제안을 한 이후로 한동안 두문불출했으나, 금년 여름동안 국채보상운동의 과정을 살펴보고 구미출신 김유영 영화감독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했다.

 

thumb-20171028130606_smzkeffk_600x1066.jpg

다음은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에서 자료 수집해 정리한 내용으로 구미지역이 배출한 영화감독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며, 구미에서 진행된 국채보상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도 간략히 소개했다.


구미는 한때 영화의 도시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일깨운 빼어난 영화감독 김유영(金幽影, 1908~1940)이 있고, 그를 이은 후배 영화감독 신경균(申敬均, 1912~1981)이 또한 구미출신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장재성(張在星, 1914 ~ 1939)과 임장수(林長壽, 1914~?)가 있다.

1. 김유영은 구미시 원호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이 철(哲)이고, 본명은 영득((榮得)이다. 필명으로 YY生, 철우(哲又), 김철(金哲)이 있고,  XY생도 한 번 사용하였다. 구미초등학교 2회 졸업생이다.
1928년 《유랑(流浪)》, 1929년 《혼가(昏街)》, 1931년 《화륜(火輪)》을 연출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하였다. 이들 세 작품은 모두 이른바 “프로 영화” 또는 “경향 영화(傾向映畵”이다. 그러나 줄거리를 살펴보면 일제의 식민통치로 고통당하는 우리 민족의 삶을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그렸을 뿐이다.
조선 최초리오작가협회를 만들었고, 조선 최초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의 절반을 그가 직접 썼다. 1938년 영화인들과 함게 조선 최초의 영화제를 조선일보와 함께 추진하였다. 또한 김유영은 구인회(九人會) 창설을 주도하면서 작가들과도 교류하였고, 연극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일명, 카프)이 해체되고 카프 관련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뒤 김유영은 1937년부터 활동을 재개하여, 카프 시절과는 다른 색깔의 영화 2편을 만들었다. 1939년 《애련송(愛戀頌)》와 1940년 《수선화(水仙花)》가 그것이다.
김유영과 관련한 몇 편의 논문이 있고, 특히 구인회와 관련해서는 전북대학교 현순영 교수가 쓴 ‘구인회의 안과 밖’(소명출판)이 있다. 이 책은 2018년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도서(한국학 분야)에 선정됐으며, 김유영의 행보를 중심으로 구인회를 다루고 있다. (전북도민일보 2018년 6월 15일 기사 참조) 현순영 교수는 김유영 관련의 논문에서도 독보적인 것으로 보아 학계에서 김유영에 가장 많은 애정을 쏟은 연구자라 할 수 있겠다.   
 
2. 장재성과 임장수는 신경균은 선산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다. 이들은 1933년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영화를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시나리오는 장재성이 쓰고, 영화는 신경균이 만들기로 하였으며, 장재성을 조직을 만들어 이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목적에서 장재성이 쓴 시나리오가 바로 “홍주머니(일명, 아리랑)”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일이 사전에 탄로되어 장재성과 임장수는 일제에 피검되어 시나리오가 찍기로 하다가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1939년 장재성는 징역 1년 6월, 임장수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각 3년과 4년의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장재성은 옥고의 여파로 2 개월 뒤 사망하였다. 1980년 선산문화원 주최로 비봉산 아래 그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렸다.
신경균은 1937년 순정해협의 제작을 시작으로 뛰어난 영화감독이 되었다. 최은희를 영화계에 데뷔시켰으며, 해방을 전후하여 1971년까지 많은 영화를 제작 또는 감독하였다. 1950~19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그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영화를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3.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열린 국채보상운동의 발기모임에 구미 출신 인사 4명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북후정 시민대회에도 참석하였고, 향리에 돌아온 뒤 구미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00년이 넘은 일이어서 자세한 전말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그를 입증하는 여러 신문 자료가 있어서 대강은 살펴 볼 수가 있다. 중심인물 두 사람이 당시 선산의 단계천 주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근 장소(선산읍성 서문 부근으로 추정)에서 2월말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구미 출신 발기인은 이우열(李愚烈, 1875~1951), 심정섭(沈廷燮, 1859~1932), 길영수(吉永洙, 생몰년 미상), 장상철(張相轍, 1870~1930) 이다.
이들 4명 중 특히 이우열과 심정섭을 중심으로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구미시와 구미시의회 지역사회에 대한 제안서를 낭독할 예정이다.

 

 

<저작권자(c)한국유통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및 사회적 공헌활동 홍보기사 문의: 010-3546-9865, flower_im@naver.com

 

http://www.youtongmart.com

유통마트.jpg

 

,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