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202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안동 출생 김원식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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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부터 신한독립당까지 김원식의 독립운동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889년 8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김원식은 1919년 안동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더이상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만주지역 유하현 삼원보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그는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 이상룡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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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부 선언문

 

1924년 3월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를 재정비하기 위한 회의에 참석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통합을 알리는 선언문을 발표할 때, 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후 정의부가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장을 보좌해 각종 기밀과 인사에 관한 총체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간정원(幹政院) 비서장(秘書長)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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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족노동당의 중대사건 음모-조선 안의 사상단체와 악수」(동아일보 1926년 2월 27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4년 8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대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으로 당의 명칭을 바꾸고 조직을 개편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유일당촉성회파가 중심이 된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조직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새로운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한인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7월에 지청천 등이 북만주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유호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留滬上海韓國獨立運動者同盟)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11월에는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에서도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13일에는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전 국민부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을 만나 만주지역의 정정(政情)과 독립운동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7월에는 남경에서 김상덕과 함께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항일무장투쟁을 강화하는 방략에 대해 논의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을 위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33년 11월 홍진과 함께 남경에서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尹琦燮)과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여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북경에서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인 입교생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에 주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만주에서 함께 활동하였던 김두천(金斗千)에게 서신을 통해 만주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입교생의 모집을 의뢰하여 만주 각지에서 18명의 학생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 배경과 정의부 설립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1906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꿈꾸었다. 1909년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 마련과 조직 확대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더이상 평화로운 시위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 모두가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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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전현내에 통군부」(동아일보 1922년 3월 11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옛 왕조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나 복벽주의 계열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결국 독립하고 말았다.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통의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만대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正義府)라고 명명하였다.



만주지역 독립운동이 주는 의의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독립을 열망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은 이에 대한 해답을 알려준 준 사건이었다. 그간 독립운동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일반인들에게 3.1운동은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그중에서도 무장을 통한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즉시 실행에 옮겼다. 더이상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사람들은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손에 총과 칼을 들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김창환, 이진산, 윤덕보, 김원식과 같은 사람들 역시 그 시작과 활동단체는 달랐지만 지향했던 바는 한국의 독립이었던 만큼 그 길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서 탄생한 정의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에 매진하였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당대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오직 독립을 위해, 그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며 그 척박한 대지에 있었던 것이다.

 

김원식독립운동가기념사업회(구미시 신시로4 수산빌딩 3층 054-456-9865, 010-3546-9865)

 

김원식 선생 선양사업 추진 방향

 

-김원식 선생 안동시 서후면 생가 복원

-김원식 선생 일대기 기록물 제작

-김원식 선생 군자금 모집 경로 및 조력 문중 탐사 기록물 제작

-김원식 선생 영주 예고개 기념비 건립 추진

-김원식 선생 만주 길림성 유해발굴과 봉환

-김원식 선생과 함께한 인물 연구기록물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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