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부 2024년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의성 출생 이진산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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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회 출신 이진산과 정의부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880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난 이진산은 1910년대 신민회 인사들이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후원하고, 1919년 4월 이상룡(李相龍) 등이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한 서간도 독립운동기관인 한족회(韓族會)의 법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서간도 지역 의원으로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활동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한족회의 사판사장(査判司長)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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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창호와 여운형

 

1921년 5월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ㆍ여운형(呂運亨)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내부갈등을 비판하고 독립운동단체의 결집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또한 윤기섭과 함께 서간도 대표로 국민대표회의 참석차 상해에 도착하여 한성정부 조직안의 정식 승인 등을 요구하였으며, 8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홍진(洪震) 등 25명과 함께 태평양회의(太平洋會議)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보낼 한국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각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한 임정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0월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파견되었다.


1923년 1월 임시정부의 향후 방향을 논의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그는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국민대표회의 특별심사위원ㆍ의정기초위원(議程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6월 창조파가 새로운 정부 조직을 발표하자, 그는 한족회 대표 명의로 임시정부의 개선을 통한 정부유지에 힘써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를 위해 개조파 56명과 함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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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정보 당국이 입수한 「전만통일발기문」ⓒ국사편찬위원회

 

1924년 7월 이광민 등 10여 명과 함께 전만통일발기문(全滿統一發起文)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서명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 대표로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으며, 1925년 3월 중앙행정부 법무부위원장, 8월에는 재무위원으로 정의부의 핵심요직을 맡으며, 통합단체인 정의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1926년 12월 길림성 반석(磐石)에서 정의부ㆍ한족노동당, 남만청년총동맹 등이 발기한 조선혁명자후원회(朝鮮革命者後援會, 일명 모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만주지역 무장독립운동 배경과 정의부 설립

 

1905년 소위 을사조약 체결로 인해 나라를 빼앗긴 이들은 1906년 신민회라는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여 국권회복을 꿈꾸었다. 1909년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신민회 주요 인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곳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근거지 마련과 조직 확대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대한 변곡점이 되었다. 더이상 평화로운 시위만으로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인 모두가 뼈저리게 느낀 사건이었다.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실제로 이후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독립운동의 터전을 만주로 이동시켰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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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현내에 통군부」(동아일보 1922년 3월 11일자)ⓒ국사편찬위원회

 

 

1922년 만주와 노령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자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를 기반으로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대한광복군총영 등 대표 71명이 모여 서간도 일대의 통합무장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곧 간부들 사이의 이념과 인선, 조직상의 이견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해방 후 건설할 국가상을 공화주의로 하느냐 복벽주의(옛 왕조로 돌아감)로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를 중심으로 공화주의 계열은 통의부를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으나 복벽주의 계열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결국 독립하고 말았다.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 등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통의부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통의부에서는 각 지역의 대의원 등을 소집해 남만대의원회(南滿代議員會)를 개최하고 10개 단체 대표 등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의결하고 단체의 명칭을 정의부(正義府)라고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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