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산증인 장세용, '나의 이력서' 사회운동가에서 제22대 국회의원직 도전 이유 밝혀

사회부 0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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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주도권은 여야 협치와 지역간 상생하는 자가 이끈다.

구미와 대구의 '도시동맹'을 제안한다.

 

(전국= KTN) 김도형 기자= 장세용 더불어민주당 구미시을 국회의원 예비후보는 지난 10일 구미코에서 '물 나누기와 땅 더하기' 출판기념회를 통해 민선7기 구미시장을 역임한 뒤 제22대 국회의원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진정성을 담아 알렸다.

 

장세용 예비후보의 '물 나누기와 땅 더하기'는 대구취수원 구미 이전을 통한 물 공유와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지방소멸을 타계할 대구-구미 행정통합을 통한 메가시티 개편을 의미한다.

 

장세용 예비후보는 구미시장 재임 당시 공유재산인 물은 낙동강 유역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철학과 신념으로, 대구와 물 나누기를 통해 오랫동안 물로 인한 갈등 국면을 상생관계로 이끌어낸 업적이 있다.

 

장세용 예비후보는 국내 최초로 프랑스 현대 지성 미셸 드 세르토와 앙리 르페브르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일상생활과 도시 및 로컬리티 공간의 재구성 양상과 로컬과 세계화 등에 관해 꾸준히 연구함으로서 지방의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지방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의 지방은 인구와 경제 등이 수도권으로 몰리면서 인구소멸로 인한 일자리 부족과 저출산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심화되어 가는 고령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더우기 급변하는 정치현실 속에서 실용적으로 실리를 취하고 지역의 이득을 보전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간의 역동적인 협치와 상생을 필요로하는 지방시대가 됐다.

 

다음은 최근 장세용 예비후보를 지지하는 지역 유림이자 보수 인물의 진정성을 담은 글이다. 

 

"저는 정치적 행위를 절대 하지 않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극보수의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활자중독증이 있어 책을 손에서 놓지않으나 정치인들이 쓴 책은 읽지 않는다. 그 소리가 그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장세용 전 구미시장님이 쓴 물나누기와 땅더하기는 감명깊게 잘 읽었다.

 

특히 구미에서 KTX이용방안은 구구절절이 옳고 경제성 현실성 타당성 있다 구미유통신문과 구미유통방송 칠곡신문 등 홍보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 했으면 좋겠다.

 

구미와 칠곡의 공직자들 꼭 읽어 보시라.  권하고 싶다

 

 

칠곡 북삼 유해종 배상


이처럼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장세용 예비후보의 역량은 그의 이력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아래는 '물 나누기와 땅 더하기' 책의 프롤로그에 실린 장세용의 '나의 이력서' 전문이다.

 

 

나의 이력서


2018년 6월 13일 민선 7기 구미시장 당선은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는 이 사건은 현대 정치이론을 탐구하며 사회운동가로서 실천을 모색해 온 작은 노력의 산물로 여긴다. 선거 전략 자체에서는 공업도시의 로컬리티를 탐색하며('도시와 로컬리티 공간의 지형도' 한울, 2018) 도시재생을 정책의 중심에 내세운 것과, 실천에서 한노총과 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단체 및 농민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한 것이 주효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조상대대로 천년을 살아온 구미시 낙동강 동쪽 지역 시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판단한다.


1978년이었나, 대구가톨리근로자회관에서 경북대, 계명대 및 서울대의 몇 명 학우가 참관하는 가운데 아홉 명의 회원이 영남대 '전통문화연구회'를 창립했다. "우리는 외세를 배격하고 민중을 주체로 삼아 민주주의와 남북통일을 이루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왕립대학이라 자처하며 4.19 이래로 학생운동 불모지에 가까웠던 영남대에서 학생운동을 거쳐 사회운동으로 이어지는 삶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집성촌에서 태어나 부친의 이른 유고에 따른 가정 형편상 대구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던 아쉬움과, 도서관을 피신처 삼아 온갖 책들을 읽었던 나날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때 조지 오웰의 '1984'를 읽었고, 그것이 내 앞낲을 결정했다. 조지 오웰은 나중에 '카탈로니아 찬가'로 다시 만났고, 나이 들어서는 바르셀로나의 밤길을 헤매게 만들었다.


병역은 부 선망 3대 독자 소집면제 대상이었으나 대학생 입영명령으로 징집되어 1976년 50사강 120연대 2대대 방위병으로 6개월 복무했다. 1977년 대학에 복학했지만 시국은 어수선했고, 인혁당 사건 여파로 공포 분위기가 팽배했다. "걸리면 죽는다"고 수근거리는 와중에 교련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 동지를 규합하고 인근 대학의 학우들과 연대 관계를 맺어 오다가, 조직을 만들어 학습 활동에 들어갔다. 첫 사업으로 1979년 5월 대학축제 기간에 기획한 '한국적 민주주의 장례식' 시위는 거사 직전 예비검속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교생실습 중이던 나는 '전면장학생'이라고 적극 감싸 준 학과장 교수님 덕분에 구속을 모면했다. 그때부터 경산경찰서 학원계장이 한 동네에 살면서 본인의 학교 앞 자취방을 매일 출퇴근글에 점검하는 기묘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10.26을 겪은 그해 12월 모친의 죽음을 맞았고, 이어서 5.18 항쟁의 소용돌이에서 경산경찰서에 잡혀 갔을 때 학원계장은 풀어 주면서 제발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1979년 겨울,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란 소박한 생각으로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5월 광주를 목격하고 자퇴를 고민했지만 친구들의 격려로 '프랑스대혁명의 사회적 기원'에 관한 석사논문을 작성했다. 하지만 경남 산청 출신 지도교수는 대구북부경찰서 형사가 수시로 찾아오는 나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고심 끝에 영남대로 돌아와 프랑스대혁명의 사상적 기원을 탐색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계몽사상 연구에 몰입하여 1990년 '몽테스키외와 자유주의의 성립'이란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몽사상 연구는 '몽테스키외의 정치사상'(한울, 1995)과 '프랑스 계몽주의 지성사'(길, 2013)로 정리했다.


1982년 결혼 후, 16평 전세 아파트에는 늘 후배들이 스터디를 명분으로 기거하며 북적거렸다. 신혼의 아내가 불평없이 챙겨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박사과정에 들어간 시기부터 점차 반독재 투쟁이 가시화되고 대구에서도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강철 형님 중심의 민통련 지부 설립과 함께 문화운동 조직 '우리문화연구회'(1984~1990)를 출범시켰다.


학술분과위원장을 맡았지만 덮쳐 오는 사상투쟁과 정파 갈등 와중에서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10년 전 대구경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하여 '대구경북민주화운동사'를 각 부문별로 정리했지만, 1980년대 대구의 문화운동 부문은 최근에야 정리 가능했던 이유도 거기 있을 것이다.


박사과정 수료 후 강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매년 제자리 걸음인 강사료, 교수들의 한없는 갑질에 비굴과 비리를 강요하는 풍토에 충격을 받고 주변의 뜻을 모아 영남대강사협의회를 창립했다. 당시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 누구도 영남대에 교수로 자리 잡지 못한 일을 생각하면, 흔쾌히 따라준 그분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전국대학강사협의회를 설립하여 공동의장을 맡고,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으로 발전하면서 최초의 산별노조 허가증을 받아낸 일이 기억에 남는다.


그 밖에도 많은 조직의 발기와 활동에 참여했다. 문화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통일운동 등에 두루 참여했지만 직업의 불안정과 연구 활동에 매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한 것이 유감이다. 연륜을 배려해 준 후배들 덕분에 몇년간 대구경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온 것으로 그나마 체면치레했다고나 할까.


사회운동가로서 지겨운 사투를 경험하며 절감한 것이, 거대이론에 대한 집착은 현장에서 인간 삶의 이해를 소흘히 하게 한다는 반성이었다. 그것은 프랑스 연구자로서 68혁명이 가져온 변혁이론의 큰 변화를 접하면서 절감했다. 고심 끝에 대구.경북에서 변화의 실마리는 지역사회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견해에 도달하고, 1996년 당시 참여연대를 설립한 박원순 대표를 모시고 '경산시민모임'을 결성하며 지역 언론 '경산신문' 발간에도 참여했다. 몇 년간 매주 논설을 쓰고 오랫동안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시민 모임은 세대 교체에 실패하고 지역 언론사는 경영 문제가 늘 절박한 관심사였다. 지역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이 전혀 서지 않았지만 의무적으로 주말마다 칼럼을 썼던 기억이 고통으로 남는다.


지역 언론사 운영과 함께 시도한 것이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활동이었다. 일당 지배에 균열을 내고 지역 정치인을 발굴하려는 취지로 열린우리당과 통합민주당의 경산청도지구당위원장을 맡았지만, 부산대학교로 임용되면서 정당가입 금지 규칙에 따라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회민주화운동을 주도한 것은 교수직을 얻는 데에는 큰 결함으로 작용했다. 완강한 반대자가 없어야만 가능하다는 교수 임용에서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 현실을 교수 공채 최종심에 오르고도 탈락에 탈락을 거듭하며 절감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친 듯이 책을 읽고 논문을 써 댔다. 온갖 글을 쓰다가 세계화가 공간을 재구성하는 양상에 관심을 가지면서 프랑스의 현대 지성들을 재발견했다. 국내 최초로 미셸 드 세르토, 특히 앙리 르페브르를 관심권에 끌어들여 논문으로 소개했다. 오래 지속된 일상과 도시 공간에 관한 관심은 이들 연구의 산물이었다. 이 논문들 덕분에 부산대학교에 임용될 수 있었다. 논문 50편을 쓰고 나서야 B급 전임교원이 되도록 허락해 준 부산대학교에 한없이 깊이 감사드린다.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는 한국연구재단이 공모한 '인문한국' 국책 사업에 선정되어 '로컬리티의 인문학'이란 대형 과제를 수행하는 연구단을 꾸렸다. 거기에는 인문사회과학을 비롯한 건축 예술 등 온갖 전공에 국내외 유수의 학교 출신들을 채용했다. 학력은 내가 가장 수수한 축이었다. 함께 연구 활동한 동료들은 지금은 학과나 연구소 교수로 돌아갔다. 나는 여기서도 도시 공간의 재구성, 로컬과 글로벌의 관계, 협동조합, 이주민 공동체 등등 온갖 연구에 매진했다. 지금까지 논문 85편, 공저 스믈세 권, 저서 네 권, 번역서 세 권을 저술했다.


연구단 생활은 해외 조사 연구와 발표를 매우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해외 견문을 넓히고 자극을 받는 데 매우 유용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륙 공업도시 고향을 생각하며 서구의 전통 공업도시에 관심을 기울였고, 황폐한 도시에서 인구 감소를 극복하려는 도시재생 사업을 목격하고 고향 구미의 당면 현실과 비교하게 되었다. 그것이 시장 출마를 마음먹도록 이끌었던 동력이다.


민선 7기 구미시장으로서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펜데믹 사태를 겪으면서도 시정을 살피며 구미 경제는 물론이고 문화와 정치의 제도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2022년 지방선거에서 당원 동지들과 민주와 진보를 지향하는 시민들에게 희망찬 승리를 쟁취하는 지상과제에 실패한 것을 유감스럽게 여긴다. 이제 반성과 성찰을 거쳐, 구미을 지역구에서 22대 국회의원직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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