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8월 16일 미군 폭격으로 주민·피란민 희생
진실화해위, 최소 29명 사망 확인…유족 측 “희생자 130여 명 추정”
종교계·시민사회 한목소리로 애도…“기억을 평화의 씨앗으로”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굵은 빗줄기가 위령탑을 적셨다. 참석자들은 우산을 든 채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76년 전 영문도 모른 채 폭격으로 삶을 빼앗긴 주민과 피란민들을 기억하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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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 구미시 형곡동 산 33-5번지에 있는 ‘6·25전쟁 형곡동 폭격 희생자 위령탑’에서 ‘한국전쟁 형곡동 폭격 민간인 희생자 76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역위원회가 마련한 이날 추모식에는 유가족과 시민, 종교계 인사, 역사학자, 지방의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행사는 국민의례와 희생자 묵념, 사건 경과보고, 천주교·개신교·불교 추모 의식, 추모사, 승무 공연,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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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에서 발표된 경과보고에 따르면 1950년 8월 16일 오전 11시 무렵 당시 구미 형곡동 시무실·사창마을 일대에 미군기의 폭격과 기총사격이 이어졌다. 마을에는 지역 주민뿐 아니라 전쟁을 피해 머물던 피란민들이 있었으며, 대부분 군사 활동과 무관한 민간인이었다.
폭격으로 마을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수많은 주민과 피란민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당시의 혼란과 기록 부족, 생존자와 유족들의 전국적인 이산으로 정확한 피해 규모는 지금까지도 모두 확인되지 않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9년 현장 조사와 생존자·유족 면담 등을 거쳐 2010년 미군 폭격으로 최소 29명이 숨진 사실을 규명했다. 이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을 권고했다.
유족과 지역 주민들은 실제 희생자가 13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위령탑에는 확인된 희생자 가운데 4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거나 유족을 찾지 못한 희생자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규환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역위원장은 추모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비극은 과거의 일로만 남아 있지 않다”며 “유가족에게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과 억울함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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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전쟁은 군인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쏟아진 폭격과 총격 앞에서 생명과 가족을 지킬 힘조차 없었던 평범한 민간인들이 희생됐다”며 “어떠한 명분으로도 죄 없는 사람들의 죽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면서도 “과거의 책임을 묻는 것은 누군가를 미워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같은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유가족들을 향해 “이제 그 슬픔과 기억을 유가족만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겠다”며 “기억하고 기록하며, 진실이 제대로 밝혀질 때까지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천주교·개신교·불교, 종교 넘어 희생자 넋 위로
이날 추모식에서는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 위령 의식이 이어졌다.
임성호 신부는 “후손들이 역사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고 이러한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며 “전쟁보다 평화를 위해 노력할 힘과 용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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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락 목사는 “76년 전 전쟁의 잔혹한 폭력 속에서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은 순박한 민중을 기억한다”며 “전쟁의 상처와 이념의 냉혹한 시선 속에서 오랫동안 아픔을 감내해 온 생존자와 유가족을 위로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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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용서는 하되 결코 잊지 않게 하고, 억울하게 쓰러져간 이들을 기억하며 우리 사회의 평화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게 해 달라”고 기원했다.
대한불교조계종 대둔사 서원 스님은 천도 의식을 통해 희생 영령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서원 스님은 “한 생명이 남긴 사랑과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며 “오늘 우리가 희생 영령의 넋을 기리고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의 억울한 죽음을 잊지 않고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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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의 추모 공연도 이어졌다. 빗소리와 음악이 뒤섞인 가운데 펼쳐진 춤사위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유가족들의 한과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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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수 경운대학교 교수는 1937년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을 언급하며 형곡동 사건 역시 지역사회가 더 깊이 연구하고 기억해야 할 민간인 희생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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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는 “매년 한 차례 위령제나 추모제를 지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며 “이곳을 생명과 평화를 배우는 공원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김재우 구미시의원은 “위령탑 뒤편에는 4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만 아직 이름을 찾지 못한 희생자들이 있다”며 “구미시의회가 관련 조례 제정과 제도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 추모사업과 역사교육이 지속될 수 있도록 챙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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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경상북도의원도 추모식에 참석해 희생자들의 넋과 유가족의 오랜 아픔을 위로했다.
김 도의원은 “그동안 이곳을 자주 지나다녔지만 오늘 추모식에 직접 참석해 유족들의 설명과 사건의 경과를 들으면서 형곡동 폭격 희생의 무게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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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신부님과 목사님, 스님이 종교를 넘어 한자리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해 더욱 뜻깊다”며 “오늘 내리는 비가 당시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슬픔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다”고 밝혔다.
그는 “희생된 분들의 영령을 위로하고 오랜 세월 아픔을 간직해 온 유족들의 마음도 함께 보듬어야 한다”며 “지역구 도의원으로서 구미시의원들과 힘을 모아 형곡동 폭격 사건이 잊히지 않도록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김 도의원의 발언은 형곡동 폭격 사건을 유족과 시민단체만의 과제가 아닌 지방의회와 지역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역사적 과제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유족 대표 이규원 전 구미시의원은 위령탑이 세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며 울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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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실을 알리고 위령탑을 세우는 데 18년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며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유족들은 76년의 세월 동안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위령탑에 새겨진 이름은 48명이지만 당시 공식적으로 거론된 희생자는 130여 명”이라며 “아직 이름조차 새기지 못한 희생자들이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고 토로했다.
이 전 의원은 “오늘 추모식을 마련해 준 관계자들과 종교계, 시민사회, 지방의원들에게 감사드린다”며 “앞으로 이곳이 후세를 위한 제대로 된 역사교육의 장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66년 만에 세운 위령탑…이제는 지역사회가 기억할 차례
유족과 주민들은 1992년부터 위령탑 건립과 진상 규명을 요구해 왔다. 여러 차례 진정과 조사 요청이 이어졌지만 오랜 기간 뚜렷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과 지역사회의 지속적인 요구 끝에 사건 발생 66년 만인 2016년 8월 현재 위치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그러나 위령탑 건립 이후에도 사건을 알리는 안내와 교육, 정례적인 추모사업은 충분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행사를 마련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역위원회는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을 넘어 지역 현대사의 아픔을 함께 보듬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구미시와 협력해 추모식을 지속하고, 위령탑이 시민과 학생들이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배우는 역사 현장으로 자리 잡도록 노력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추모식 마지막 순서에서 유족과 참석자들은 한 사람씩 위령탑 앞으로 나아가 국화를 올렸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물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렀고, 위령탑 앞에는 하얀 국화가 차곡차곡 쌓였다.
사회자는 폐회를 알리며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걸음”이라며 “형곡동의 아픔이 평화의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76년 전의 폭격은 끝났지만, 그날의 슬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희생자들의 삶을 찾아 기록하고 유가족의 오랜 상처를 지역사회의 기억으로 품는 일은 이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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