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구미근현대사연구회 대표, 경남일보에서 창간특집 취재
대한민국 언론역사의 대표 인물 위암 장지연 선생 일대기 재조명
(전국= KTN)김도형 기자= 10일 오전 구미시 임수동에 위치한 여헌기념관에 경남일보 취재팀이 방문했다. 경남일보는 대한민국 최초의 지역신문(1909년 10월 15일 경남 진주 발행)으로 경북 구미 출신의 위암 장지연 선생이 초대 주필을 맡았다.
위암 장지연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실이 있으며 1906년 교육 계몽 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으나 이듬해에 일제로부터 강제로 해산당했고, 그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면서 경남일보 창간을 위한 저력을 다졌다.
황성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던 위암 장지연 선생이 경남 진주에서 활동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여헌 장현광 선생에 대해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알 필요가 있다.
위암 장지연 선생의 12대조인 여헌 장현광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인동(仁同), 호는 여헌(旅軒)이다.
여헌기념관은 여헌 장현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종가의 부지 제공과 국가 및 지자체의 정성으로 건축되어 2014년 3월 18일에 개관했다. 여헌기념관은 900여 평의 부지에 전시실과 자료실, 수장고, 강의실 시설을 갖추고 있다. 여헌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경남일보 취재팀은 김종길 구미근현대사 연구회 대표와 장세용 여헌학연구회 이사장(전 구미시장)을 만나 경남일보 초대 주필인 위암 장지연 선생의 지역 근대화에 영향을 끼친 이력과 경남으로 내려와 경남일보 창간에 주요 역할을 하게된 배경에 대해 인터뷰했다.
김종길 선생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위암 장지연 선생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1877년 경북 구미로 터를 옮겨 스승과 벗을 사귀는 등 30여 년을 보내며 지역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소개했다.
장세용 이사장은 위암 장지연 선생이 경남으로 내려간 배경에 대해 "경남의 남명학이 퇴계학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여헌 선생은 남명처럼 칼과 방울을 차고 다니셨다. 그런 영향으로 후손들이 진양하씨, 함안조씨 등이 있는 진주로 혼인을 많이 갔다."는 말과 함께 "위암 선생이 마산으로 간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다."라며 위암 선생이 여헌 선생의 12대 손으로서 연고가 있는 지역에서 뜻을 펼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유래와도 관련이 있음을 알렸다.
또한 장세용 이사장은 "당시 구미지역은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다. 낙동강을 끼고 있어 사상과 물자가 풍부했다. 사고가 절충적이고 신학문과 자본주의도 빨리 받아들이셨다. 무장투쟁보다는 자치론에 입각해 근대화에 앞장섰다."는 말과 함께 위암 선생이 독립운동과 근대화 모두에 앞장선 인물임을 설명했다.
더불어 장세용 이사장은 "우리는 남명학과의 관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남명학에 영향을 끼친 제일 북단이 구미이며, 곽재우 장군이 임란때 여기까지 와서 전쟁을 했다."라며 여헌 선생과 남명학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이날 김종길 대표는 경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방 분권 연구 과정에서 지역 근대사를 조명한 것만 20년이다. 이 과정에서 구미 지역 근대화 수용을 이끈 각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위암을 들여다보게 됐다. 2000년대를 전후해 불거진 위암의 친일 부역 논쟁도 촉매제가 됐다."라고 했으며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가라고 굳게 믿었고, 저 역시 사랑해 온 뛰어난 선각자가 하루아침에 부일 협력자 꼬리표를 달게 된 모습을 보며 위암이 어떤 변천의 역사를 갖게 됐는지 궁금했다. 깊이 들여다보기 위암의 저서인 ‘위암문고’를 5번씩 읽고, 그가 주필로 있던 시절 경남일보 기사도 수 백 편씩 찾아봤다.”라고 밝혀 장지연 선생에 얽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실체적인 진실에 대해 연구해 온 지난 시간을 알렸다.
다음은 경남일보 창간특집에서 김종길 선생과의 인터뷰에서 다룬 내용이다.
1864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위암은 1877년 경북 구미로 터를 옮겨 스승과 벗을 사귀는 등 30여 년을 보내며 지역 근대화를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을 창간해 주필·사장을 지내며 ‘시일야방성대곡’을 싣고, 러시아로 건너가 신민회 인사 등이 주도한 한글신문 ‘해조신문’을 창간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경남을 거점으로 활동하게 된다.
“위암은 1909년 9월 경남 인사들의 초청을 받아 진주로 갑니다. 촉석루에서 열린 당대 근대 지식인들의 전국적인 모임, 대한협회 연설회 참석을 위해서죠. 이러한 만남 등을 계기로 위암을 초대 주필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탄생했습니다.”
김 대표는 “당대 지식인 중 가장 폭넓게 근대화 촉구 목소리를 낸 이가 위암”이라며 “자신이 주필을 맡았던 ‘황성신문’이나 ‘경남일보’에도 ‘외보’란을 통해 관련 소식을 많이 실었다”고 설명했다.
지역 신문이지만 1911년 발생한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인 신해혁명 등 중국이나 일본의 굵직한 동향을 지면으로 전했다. 여성권과 사회주의 동향, 자유주의, 투표권 등도 다루며 외국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직시하도록 했다.
김 대표는 “신문을 통해 경남 사람들은 대한제국이, 조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을 것”이라며 “동아시아에서 세계 흐름을 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기조를 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측면에서 위암은 대단한 선각자”라고 했다.
세계를 향한 위암의 넓은 시야는 당시 경남일보가 직접 열었던 야학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당시 경남일보 기자들이 직접 야학교 선생을 맡았는데, 여기서 그 시절 기자들이 지닌 의식을 엿볼 수 있어요. 위암도 주필에서 물러난 후 한문·지리·역사를 가르쳤는데, 만주를 두고 고구려 시절 한족과 중원의 패권을 두고 다퉜던 우리의 땅이었다는 역사를 강조했습니다.”
여성 인권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던 시절, 위암은 경남지역 지식인을 중심으로 여성들도 참여하는 ‘난정계’라는 회를 만들었다. 1913년 진주 촉석루에서 개최된 난정계 기념식에는 국내 대표 예술인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촉석루 건립 이래 최대의 문화 행사’로 평가받았다.
위암이 중요시했던 것은 서울만 깨우치면 안 되고, 지방도 깨우쳐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 전국과 지방을 분주히 다니며 근대식 학교, 상공업, 농업 개량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김 대표는 “위암은 방대한 글 중 해석이 모호한 시·수필 몇 편을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부일 협력자로 등재됐다”며 “문제가 된 부분에 대해 저는 해석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다. 짧은 글 속 중의적인 표현 몇 개로 시비 거는 건 문제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뛰어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바꾸려면 그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게 부족했다고 생각한다”며 “더 많은 학자의 세밀한 연구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남일보 2023년 10월 16일자 창간특집 기사 발췌-
<저작권자(c)한국유통신문.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및 사회적 공헌활동 홍보기사 문의: 010-3546-9865, flower_im@naver.com
검증된 모든 물건 판매 대행, 중소상공인들의 사업을 더욱 윤택하게 해주는!
http://www.youtongmart.com
경남일보 초대 주필 위암 장지연 선생, 김종길 향토사학자의 오랜 연구로 서광(曙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