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이 일깨워주는 여순민중항쟁(1)-침묵의 1948년, 다시 되새기는 기억의 지평선

김도형 0 5,819

여순사건 70주기 여수MBC 특별강연

 

도올 여순민중항쟁 70주기 특별강연 통해 슬픈 역사 재인식

도올 여순사건을 여수시민들과 함께 규명하다

깡패국가로부터 당한 인민의 슬픈 역사, 70년 동안 감춰온 진실을 이제는 밝혀야만 한다.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948년 10월 19일 발생해 10월 27일 종결된 여순.순천사건 70주년을 맞이해 도올 김용옥 선생은 "도올 말하다! 여순민중항쟁" 여순사건 70주기 여수MBC 특별강연에서 여순사건에 대해 '여순민중항쟁'이라고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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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대백과사전은 여순사건(Yeosu-Suncheon Rebellion , 麗順事件)에 대해 '여수·순천사건,  여수·순천10·19사건,  여순10·19사건'으로 기재하고 있으며, 또 성격에 대해 군 반란 및 대중 봉기 사건이라고 알리고 있다.  

 

여순반란, 여순사건, 여순항쟁 그리고 다시 정의되어야 할 1948년 10월 19일, 여순의 역사 여순민중항쟁

 

우리 역사의 감춰진 진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제주 4.3사건은 1945년 민족해방 후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한 제주 도민에게 미 군정청이 경찰 병력을 투입해 진압하려 하였으나,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군을 투입해 제주도 전체를 초토화시킨 대학살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30% 이상에 달하는 약 9만 명의 이재민과 엄청난 재산 인명 피해(희생자수 3만명)가 발생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제주에서는 5.10 선거를 치르지 못했으며, 이 항쟁은 발발 1년 만인 1949년 5월 일단 종결됐다.

 

1948년 10월 19일 제14연대 2천 여 병사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고 미군 즉시 철퇴를 기치 내걸며 애국인민에게 호소한 제주 파병 명령 거부로 인해 1948년 10월 22일 이승만 정부는 여주 순천지역 계엄령을 선포했다. 

 

투입병력 5천여 명으로 사상 최대의 육해공군 합동 진압작전이 감행됐으며 1948년 10월 27일 토벌군은 여수를 탈환했다. 그 과정에서 가담자 색출작업 속에 자행된 인간존엄의 파괴는 시대의 혼돈 속에 이뤄진 국가의 빗나간 선택이었으며, 그것은 70년간 국민과 나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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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은 특별강연에 앞서 여순민중항쟁 70주기로 느낀 바를 대중에게 읊조렸다.


나는 지금 여기 여수에 지나간 옛 이야기를 말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지금 여기 잊힌 사실을 들추어내려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왜곡된 사건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역사에는 분명 사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역사는 궁극적으로 해석의 체계입니다.
사실을 아무리 나열하여도 그것은 역사가 되지 않습니다.
역사는 사실의 숲속에 가려진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나의 가슴속에 그리고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혈관속에서 맥박치고 있는 한이요 분노며 저주며 회환이며 울먹임이며 통한이며 벙어리 냉가슴이며 그리움이며 올바른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몸부림이며 양심의 명령이며 정의로운 하늘의 외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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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함께 목 놓아 놓고 울고 싶은 심정밖에는 없습니다.
어찌하여 우리 민족이 이 지경이 이를 수 있었는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잔인하게 만들었는가
도대체 누가누구를 죽였는가
저는 태어나 아장아장 걷기시작하면서 부터 여순반란이라고 명명된 이 처참한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수없이 듣고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고희가 넘도록 이 사건에 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고백합니다.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저는 이 사건에 가려진 진실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 모두가 이 사건을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사건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조차도 이미 이 사건을 반란으로 규정한 시대정신의 인식체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념적인 회전'은 결코 '진실한 발견'일 수 없고 '궁극적 해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순을 말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말해야 하고 인간을 말해야 하고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나는 이 순간 외칩니다. 70년 동안 이 진실을 반란으로 규정해온 인간들이 마음놓고 반공의 파시즘을 선전하고 국민을 기만하고
가혹한 이득을 취해왔다고 한다면 나는 외칩니다. "You are lost!" "너희들은 이미 졌다!" "너희들의 틀은 이미 시대에 맞지 않는 고물이다!"
퇴색하고 있다. 물러가라! 사라져라! 사라지는 것만으로도 너희는 속죄를 얻을 수 있을리라.
여순사건은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립적 사건으로 머물 수 없습니다. 머물러서는 아니됩니다. 여순은 사건이 아닙니다. 여순은 민주의 항쟁입니다.
단군이래 개국이래 국가가 자국민에게 부과한 폭력의 최대치에 민중이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의 혼의 분출이었습니다.
이 자랑스러운 의거를 이승만 정권으로 대변된 일제식민지 미군정의 지속태가 민중을 처참하게 짓밟았습니다.
너무도 처참하게 민중을 학살 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성의 말살이었으며 공동체의 붕괴였으며 공동선의 파괴였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고 공포였으며 그 그림자속에 숨은 우리 민족의 의식 세계 속에는 인간불신의 망령들이 내면화되었습니다. 여순민중항쟁이야말로 세계사를 선도한 조선민중의 정의감의 발로였으며 여순민중항쟁을 빌미로 6.25동란을 위시한 향후의 모든 세계사적 비극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났고 우익반공파시즘 가치체계가 활개 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는가 하면, 또 반면 우리 민중의 심오한 내성의 양심속에서 인류사에 새로운 희망을 던질 수 있는 민주의 촛불이 켜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사적 사건을 해방정국의 복잡하고 중층적인 인식체계로부터 접근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 접근을 시도하기 전에 여러분과 함께 다음의 진실을 같이 외쳐야만 하겠습니다. 여순은 민중항쟁이다. 여순은 민중항쟁이다.(이하 반복) 

 

도올에 따르면 제주 최초의 도지사인 박경훈은 양심세력으로 제주4.3항쟁에 대해 항의성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무참히 희생당한 인민에게 동정과 조의'를 표했다고 하며, 반면에 당시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에게는 미군정에 아부하여 출세할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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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특성상 제주 4.3항쟁은 알려지기 어려운 사건이었으며 여순사건은 우리 역사의 본토인 주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양심세력인 김익렬 중령은 좌천되어 여수 14연대로 배치됐다고 한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고립된 제주의 실상을 김익렬 중령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고 또한 이를 14연대 군인들에게 소상히 알린 것으로 추정된다.

 

도올은 여순사건의 발단은 제주 인민위원회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제주 인민위원회를 탄압한 미군정의 포악한 무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며 "여순문제를 접근할 때 14연대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라고 주장했다.


도올에 의하면 여수14연대는 1948년 5월 4일 생긴 군대로생성 중이었으며, 여수 제14연대는 광주4연대 1개 대대를 핵으로 지역민을 모병해 만든 향토연대였다.


도올은 "14연대 자체가 향토군대다. 14연대는 기본이 지역사람이다. 이 사람들이 왜 고향 사람들을 죽이겠나?"라고 반문을 하며 "여순사건 가담자들은 정권 자체의 전복을 획책했는가? 수도를 점령했는가? 새 정권의 담당자가 있었는가? 물리적 군사력이 있었는가?"라는 물음으로 여순 14연대는 어느것하나도 해당사항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오늘날 여순문제가 답보상태에 있는 이유에 대해 도올은 군대로서 "14연대는 항명한 것이기 때문인가"라며 묻고, 그것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을 안할 것일 뿐, 즉 14연대는 정당한 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제주 파병을 거부한 것이라고 했다.

 

도올은 당시 14연대가 벽보를 통해 알린 호소문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제주 토벌 출동거부 병사위원회'라고 알리고 있고, "자국민에 대한 토벌은 국가가 군인에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이 아니다"라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어 여수 제14연대의 입장은 항명이 아닌 거부였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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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덧붙여 제14연대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겠다고 결단할 것일 뿐 그것은 "의거"였다고 도올은 여순사건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빨갱이의 유래, 여순사건 피해자들은 국가의 사죄를 받았는가?

 

1945년 8월 16일부터 길거리에는 형무소에서 나온 일제시대 민족지도자들이 대거 풀려났다. 당시 관공서는 텅텅 비어있었고 무정부로 인한 혼란을 막기 휘해 뜻있는 지사들을 중심으로 자치적으로 자치위원회를 만들었다. 이를 인민위원회라고 불렀다. 전국에 145개의 인민위원회 결성, 중앙에서 건준위는 조선인민공화국이 되면서 사흘 후 존 하지 미군정을 하려고 배를 타고 들어왔다.

 

도올은 9월 6일 우리 민족 스스로가 조선인민공화국을 결성했다는 사실과 함께 '빨갱이'란 말은 우리말에 없는 단어였음을 설명했으며 여순민중항쟁 이후에 생긴 말이라고 했다.

 

여순민중항쟁을 이해하면 빨갱이란 단어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인민은 중국의 모든 고전에 깔린 말로 주례, 맹자, 려람, 관자, 묵자 등에서 수없이 사용해온 단어이다. 맹자가 말하길 다스린 자의 보배는 세가지가 있으니 토지, 인민, 정사라 했다.

 

도올은 인민이라는 말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인민공화국을 지향한다는 말이 이상하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모든 생각이나 느낌이 여순 이후에 형성된 이승만 정권에 의해서 조작된 우리 언어속에 갇혀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라고 했다.

 

좌익은 공산주의자?

 

이에 대해 웃기는 말이라며 최소한 자본론을 다 읽고 논해야 한다고 도올은 말했다. 

좌익은 무엇이며, 우익은 무엇일까에 대해 의문을 갖었다고 한 도올은 당시 남북한 단독 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고 통일정부수립을 원하면 다 빨갱이로 몰렸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빨갱이의 유래에 대해 도올은 "여순반란이라고 하는 그들이 규정해 형성된 이승만 정권이 규정해 놓은 주홍글씨"라고 설명 했으며, 전국이 인민위원회 결성한 것을 두고 "우리 민중이 얼마나 현명한 민족인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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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도올은 우익세력의 유래에 대해 1945년 9월 9일 하지가 입국한 기점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은 9월 8일 미군정에 우호적인 부르조아 지주세력을 중심으로 창당된 우파보수정당 송진우, 김성수, 장덕순, 윤보선, 원세호, 현상유, 윤치영 등이 발기에 참여한 사실을 얘기했다.

 

도올은 이들이 미군들에게 찾아가 "당신들이 미군정을 할려면 무조건 인민위원회를 싸그리 죽여버려야한다."라고 주장했던 사실과 함께 한민당의 창당구호는 조선인민공화국 타도, 건국 준비위원회 타도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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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입장에서는 단지 한국은 일본이 강점하고 있던 곳이었고 한국은 일본의 일부인 것으로 여겨 항복의 조례와 규정의 적용을 받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8.15 이후 미국의 입장에서 패전국은 일본, 일본이 받아야 되는 점령국의 모든 굴욕을 일본의 일부라고 가정되나 한국이 이 모든 것을 다 받았다.

 

도올은 김일성에 대해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은 해방축하평양시민대회에 33살 나이로 입성해 북한 전역을 다니며 인민위원회를 격려하고 응원했다고 한다. 재미난 것은 스탈린과 미국의 입장이 대립됐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정치적 감각이 탁월해 북한 인민들에게 소비에트의 체제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을 비롯해 항일투사들이 움직여 나가는 새로운 기구들을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또 김일성은 그들이 운영해나가는 인민위원회를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코리아에 무지했던 남쪽 미군군정의 입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곳은 제주도였다. 일본 교포의 대부분이 제주도 사람들이었고 일본을 가장 많이 들락거렸다고 도올은 말한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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