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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간의 인연의 고리, "나주목사 김성일 세기의 재판을 열다" 나주시민극단서 기획

김도형 0 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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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로 부임한 학봉 김성일 선생의 일화를 그린 연극무대 2017년 2월 9일(사진 성안사람들)

 

(전국= KTN) 김도형 기자= 영.호남의 화합을 위한 시도는 그동안 꾸준히 있어왔으나 좀 더 진보된 관계는 지난 2015년 9월 23일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영ㆍ호남 상생의 물꼬를 틀기위해 김대중평화센터(이사장 이희호)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2014년 말 김관용 지사가 KBC광주방송 목민자치대상에서 받은 시상금 1억원을 영ㆍ호남의 상생발전과 미래인재를 육성하는데 사용하고 싶다며 김대중 평화센터에 제안함으로써 영호남 교류의 물꼬를 트자 당시 이낙연 전남도지사 역시 김대중 평화센터에 장학금 1억원을 기탁했으며 이는 영ㆍ호남 상생을 위한 최초의 ‘제도적인 틀’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됐다.

 

그동안 경북도와 전남도는 동서화합을 위해 상주-나주 조선감영 역사고도 관광자원화 사업, 안동-화순 백신 글로벌 산업화 기반구축 사업, 농특산물 331장터 운영 등 10대 상생협력 프로젝트를 비롯해 독도 및 가거도 간 국토 끝섬 주민 교류, 동서화합 천사 프로젝트, 영호남 문화공감 프로젝트 등을 시행해왔다.

 

한편, 지난 6월 한국언론인진흥재단에서 주관한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 언론인 문화연수에서 영.호남간의 인연의 고리를 매개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계기가 마련됐다.

 

언론인 문화연수에 참여한 전남타임스 김양순 편집국장은 경북 의성 김 문충공파 시조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나주목사 시절, 시대의 판결이라고 알려진 일화를 나주시민극단 협동조합 '성안사람들'에서 기획해 연극으로 만든 사실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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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타임즈 김양순 편집국장

 

의성김 문충공파인 필자는 김양순 편집국장을 통해 학봉 할배(의성김 문충공파에서만 부르는 호칭)의 과거 일화를 알게돼 상당히 고무적이었으며, 문중 어른들이 이 사실을 통해 더욱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란 생각에 가슴 뿌듯한 마음이었다.

 

김양순 편집국장에게 학봉 김성일 선생이 영호남 교류의 물꼬가 될 것이라며 구미와 나주가 주축이 되어 그리고 학봉할배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을 경북과 구미에서도 공연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김 편집국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날의 소통으로 나주와 구미 그리고 안동간 영호남의 연결 고리가 생긴 셈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영호남간의 내재적인 갈등은 조선시대 동인과 서인의 갈등에서 비롯됐다고도 볼 수 가 있을 정도로 치열한 정치적 공방전이 펼쳐져 온 역사가 있다. 선산문화원 관계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남 양반가의 혼사는 영남학파간의 혼맥이 다수 일 정도로 호남과 영남의 인연의 고리는 폐쇄적이었다.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한 사건인 임진왜란은 1952년 4월 일본군의 부산 상륙을 시작으로 1958년 11월 노량해전으로 끝을 맺은 사건이다.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정세는 1584년 서인 계열의 율곡 이이가 사망한 이루 잠잠했던 동인과 서인의 힘겨루기가 다시 시작됐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따르는 서인인 조선중기의 문신 황윤길은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접견하고 귀국 후 부사(副使) 김성일의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그렇지 않다'고 한 보고와 서로 상반되게 일본의 내침(來侵)에 대비하여야 할 것이라고 선조에게 아룄으나, 조정은 동인(東人) 세력이 강성하였으므로 서인인 그의 의견은 묵살된 사실이 있다.(두산백과)

 

이러한 발언이 나온 것은 일본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과 함께 서인과 동인사이에 치열했던 정치싸움 때문이었으며, 동인들은 당시 서인들이 세자건저 사건으로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어 전쟁의 위험성을 과장해 동인의 공격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받아들였다.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했던 서인들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정철, 성혼 등 서인의 영수들이 귀양을 갔으며, 이들의 처벌 수위를 놓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갈라설 정도로 임진왜란을 치룬 조선시대의 정세는 참으로 치열했다.(두산백과)

조선시대 당시 동인과 서인의 대립 구도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는 곧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갔으며, 1592년 봄 황윤길의 예견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직됐으며 곧 류성룡의 변호로 경남 초유사로 임명된 뒤 경상도로 내려가 의병장 곽재우를 도와 의병활동을 하며, 의병을 두루 모으고 관군과 의병간의 협력도 도모케 해 훗날 '의병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전란 극복에 충정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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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은 주리설을 따랐고, 예학에도 밝아 '가례'를 준수했으며, 저서로는 《해사록 海槎錄》 《상례고증 喪禮考證》 등이 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사빈(泗濱)서원, 영양의 영산(英山)서원, 의성 빙계(氷溪)서원, 하동 영계(永溪)서원, 청송 송학(松鶴)서원, 나주 경현(景賢)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성일 [金誠一] (두산백과)

 

학봉 김성일 선생이 제향된 서원 중 전라남도 나주의 경현서원은 영남과 호남간 교류의 상징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학봉 선생은 나주목사시절 1584년 47세의 나이에 나주 최초의 서원인 대곡서원(현 경현서원)을 세워 3현을 향사하고, 직접 강론하며 학풍을 진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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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남인이 인정하는 학봉 김성일 선생 일화

옛적 나주읍사무소 자리였던 '나주목문화관'과 담장 하나 사이로 이웃하고 있는 건물은 조선시대 나주목사의 살림집인 내아다. 호남지방의 요충지이자 곡창지대인 나주 일대를 관장하는 나주목사 자리는 조정의 정3품 당상관이 맡던 고위직. 1000년의 세월 동안 약 360여명의 나주목사가 나주를 거쳐갔다.

 

명당자리로 소문난 나주목사 내아 자리에 복원을 통해 전통문화 체험 공간으로 활용했다. 나주 목사 내아에 들러 숙박하게 된다면 모름지기 세 가지 이야기를 알아야 하며 바로 나주목사 김성일과 유석증 그리고 팽나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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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주목사내아 홈페이지

 

나주목사 내아를 단장해 새로이 이름붙인 금학헌에는 김성일방과 유석증방이 있다. 금학헌에 두 사람의 이름을 가진 방이 있다는 것은 두 사람이 나주목사로 선정을 펼쳤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유석증은 1610년 나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펼쳐 나주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인물로 1618년 형조참의를 지낸 후 1619년 또다시 나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펼쳤으며 이듬해 임기가 끝나자 나주 백성들이 임기를 연장해 줄 것을 나라에 청했다고 한다. 백성들의 쌀 300석을 시작으로 1621년에는 나주사람 염공일 등이 대미 1천석, 1622년에는 진사 김종해 등 1백 여명이 쌀 1천석을 바쳐 유석증의 유임을 간청했다.


유석증 목사가 부임하기 20여 년 전에 나주목사로 부임한 김성일은 신문고(정수루 북)를 설치해 백성들의 억울함을 수렴했고, 특히 송사를 현명하게 판결해 아무리 무지한 백성이라 할지라고 그의 판결을 들으면 수긍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목사내아의 김성일방과 유석증방의 좋은 기운을 받기 위해 사람들은 부러 묵기도 하며 실제로 두 사람의 기를 받은 탓인지 좋은 일이 생긴다고 알려져 있다. 또 나주목사 내아 마당에는 벼락 맞은 팽나무가 서있어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큰 행운을 가져다 주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나주시민극단 성안사람들, 나주목사 김성일 세기의 재판 연극 무대에 올려

 

2017년 2월 9일 나주읍성의 역사를 다시금 재현해 영남과 호남의 과거 인연 고리를 만들어낸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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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동조합 성안사람들이 전라남도문화관광재단(이사장 이낙연)이 공모한 '2016 전남형 생활문화지원사업 '형형색색'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두 번째 시민극 '나주목사 김성일, 세기의 재판을 열다(극본·연출 김양순)'를 2017년 2월 9일 저녁 나비센터 준비관 무대에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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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나주시민극단 협동조합 성안사람들


연극은 1583년 나주목사로 부임한 학봉 김성일 선생이 당시 나주의 대표 씨족인 임씨 가문과 나씨 가문에서 10여년에 걸쳐 끌어온 친자소송을 재판하는 과정을 다뤘다.

 

정수루 북을 울려 억울함을 아뢴 한 여인은 혼인 후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 유복자를 낳아 키워왔으나 시댁에서 이를 인정해주지 않자 나주목사 김성일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제 나름으로는 애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 안 듣게 하려고 금이야, 옥이야 키워왔습니다만, 동네 사람들이 다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며 놀리는 통에 아이가 기가 죽어 동네 나가 놀기를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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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은 학봉 김성일 선생이 철저하게 증거에 입각한 재판을 실시하는 모습을 담았고, 의의는 엄격한 신분제도와 남존여비사상에 찌든 당시의 인습에서 벗어나 목사고을의 당당한 여인으로 살아갈 것을 나주목사가 선언함으로써 결론을 맺는 반전이 묘미다.

 

공연 준비를 위해 '성안사람들'은 경북 안동 서후면에 위치한 학봉 김성일 종택에 보존되고 있는 '결송입안(당시 판결문)'을 사진으로 찍어와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하는 한편, 숭실대학교 법과대학 임상혁 교수가 집필한 '소송으로 보는 조선의 법과 사회 나는 노비로소이다(2010, 너머북스)'와 나주투데이 기자로 활동하던 신광재 기자가 2007년도에 집필한 '나주목사이야기(나주역사문화연구소)' 등 10여권의 책과 학봉기념사업회 등이 발간한 연구자료 등을 토대로 한 달여 동안 토론과 공부를 통해 주제와 줄거리를 이끌어 냈다고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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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목사 입안문(羅州牧使 立案文).1586년(선조19) 학봉이 나주목사 재직시 내린 노비소송에 관한 판결문으로 모두 5건이다. 1)노비의 소유권 문제, 2)공노비의 양천문제, 3)사노비가 양인임을 호소, 4)사노비가 공노비임을 주장 하는 등의 입안문이다. 암록(暗綠)과 압량위천(壓良僞賤)이 횡행하는 당시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호적의 증명력과 중간확인의 소(訴) 절차도 나타나는 등 노비법제의 주요한 사례이다.  <출처:학봉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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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 당파를 초월한 조정의 호랑이, 간관(諫官) 언관(言官) 사관(史官)

 

사관원 정언 때 경연에서 왕이 “나를 전대의 왕과 비교하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한 신하가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입니다.”하자, 학봉은 “자품이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성인인체 하시고 간언을 거절하는 병통이 계시니 걸주(桀紂, 폭군)가 망한 까닭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니, 왕은 얼굴색이 변하고 모두 벌벌 떨었다. – 『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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