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과 덕행으로 조선을 빛낸 큰 스승” 도산서원에서 만난 퇴계 이황의 삶과 철학
“학문과 덕을 갈고닦은 삶, 후학을 밝힌 등불이 되다”
퇴계 이황의 인간됨과 학문, 도산서원에서 되새기는 선비정신
【안동=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아버지가 없는 자식처럼, 우리 집안의 이름을 욕보이지 않도록 항상 조심하라.”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어린 퇴계 이황의 삶을 바꿨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열린 해설 강의에서 전기호 지도위원은 퇴계 이황 선생의 삶을 따라가며 그 정신과 학문, 그리고 인류에 남긴 유산을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 어린 시절부터 철든 마음…책에 빠져 병 얻은 소년
퇴계는 일곱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책에 몰두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은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과도한 공부로 신경성 위장병을 얻기도 했지만, 그는 이를 평생 안고 살며 학문에 몰두했다.
젊은 시절,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현실적 고민 속에서도 그는 책을 놓지 않았다. 비판과 우려 속에 과거 시험을 준비했고, 결국 26세에 소과 합격, 34세에 대과에 급제했다. 이후 깔끔하고 성실한 관직 생활을 통해 인정받았다.
■ “나는 학문을 위해 태어났다”…퇴계, 도산으로 물러나다
49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난 퇴계는 도산면으로 향했다. 강 옆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집을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이곳에서 그는 ‘퇴계’라는 호를 얻고 도산서당을 세워 10년 간 이기론, 성리학, 도덕교육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했다.
도산서원은 퇴계 생전의 서당과,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그 위용은 지금도 한국 유교문화의 상징이다.
■ 주자학의 정수, 일본까지 전해진 ‘성리대전’
퇴계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유학의 근본이 되는 ‘주자대전’을 정리하고 요약한 책을 편찬했다. 이 작업은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유학자들 사이에서 필독서가 되었으며, 퇴계는 한·일 유교문화의 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자들이 꿈에서 퇴계를 만났다는 일화는 전설처럼 회자되며, 그의 초상화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
이 초상은 1975년 한국은행이 1,000원권 지폐 도안으로 사용할 만큼 상징적이었고, 그의 학문적 위상을 더욱 높였다.
■ 선조의 스승이자, 위대한 철학자
퇴계는 임금 선조가 즉위했을 때, 그의 간청에 못 이겨 조정에 잠시 복귀한다.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바치며 “마음을 바르게 하면 나라가 바로 선다”는 도덕 정치의 핵심을 설파했다. 이는 지금도 통치자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남는다.
■ 검소함과 실천의 아이콘
종이품 관직에 이르렀지만 퇴계는 화려함을 멀리하고 왕골로 만든 등잔과 간소한 책상에서 일생을 보냈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도구 '정심토'와,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좌우명 ‘신기독·무불경·무자기·사무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기 성찰의 본보기가 된다.
■ 우주·자연·인간…세상을 꿰뚫은 통합의 학문
퇴계는 성리학뿐 아니라 의학, 천문학, 자연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마음의 평정이 병을 다스린다며, 심리적 안정과 화합을 통한 치료를 강조했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천인합일’ 사상은 그가 남긴 철학의 핵심이자 오늘날 인문학적 성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사람은 곧 하늘이며, 하늘은 곧 사람이다.”
퇴계 이황의 사상은 단지 유교의 가르침을 넘어서 인간과 자연,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통찰이었다.
오늘날 도산서원에 울려 퍼지는 퇴계의 가르침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우리의 가슴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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