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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념] 3.1 운동 제98주년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추념식 거행<한국유통신문.com>

선비 0 2228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일 경북 구미시 금오산 박희광 애국지사 동상 앞에서는 3.1운동 제98주년을 맞이해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추념식이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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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30분부터 거행된 추념식에는 박희광 선생 유족인 박근용 대구광역시 수성구 광복지회장, 박정용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종손 박대식, 손주 박재현을 비롯 경주 공파 박병희 대종회장과 밀양 박씨 문중, 남유진 구미시장, 김한섭 구미경찰서장, 구미시 관계자, 보훈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1901년 2월 15일 구미 봉곡동 경주 부윤 수홍공의 10세 손 박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여덟살때 부친을 따라 만주로 들어가 18세에 만주 봉천에 남성자 학교를 졸업하고 오동진 선생의 휘하인 통의부에 자진 입대하여 6개월간 특수군사 훈련을 받고 항일독립운동에 투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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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김구 선생의 비밀 지령에 의해 김광추 선생, 김병현 선생과 함께 3인조 친일단체 대표 암살특공대를 조직하여 1924년 6월 1일 친일 고등계 첩자인 반역자 정갑주 일가를  몰살시키고 최정규의 집안을 초토화 시켰다. 아울러 일진회 회장 이용구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여 큰 부상을 입혔다.

 

또한 같은해 이등박문의 수양녀인 배정자의 암살 시도와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 금정관이라는 요정에서 군자금으로 사용할 거금 300원을 탈취해오다가 잠복중인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여순형무소에서 복역 중 감형되어 1943년 20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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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애국지사의 용맹했던 독립투쟁 일대기가 2012년도에 연극으로 공연무대에 올려졌다.

 

박희광 선생은 출옥 후에도 임시정부를 찾아 독립투쟁을 하려하였으나 일본군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인 구미 봉곡동에 돌아와 44세에 결혼하여 봉재일로 은거 생활을 하다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영세를 받았다.

 

해방 이후 선생께서 일제에 항거한 업적들이 1924년 9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독립신문을 통해 입증되어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게되었다. 박희광 선생은 1970년 1월 20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원호병원에서 타계하시고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 묘원에 안장되셨다.

 

박희광 선생기념사업회 박정용 사무처장은 2019년이 되면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여서 박희광 선생기념관이 완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고, 구미시민과 사회단체의 많은 관심과 도움을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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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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