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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허위선생기념관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듣고 답하다' 인문학 강좌 개최

사회부 0 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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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동락공원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장진홍 선생 동상

 

5월 6일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듣고 답하다.

구미 독립운동가 관련 품격있는 인문학 강좌 개최

 

(전국= KTN) 김도형 기자= 구미시 임은동에 위치한 왕산허위선생기념관에서  5월 6일부터 왕산허위선생기념관 주최, 구미근현대사모임 주관으로 '구미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듣고 답하는 강좌'가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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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독립운동사 김종길 자문위원은 25일 왕산허위선생기념관 김영동 관장과 장웅재 사무국장을 만나 구미가 배출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문학 강좌 개설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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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허위선생기념관 내 왕산허위 선생 흉상

 

 

5월 6일 오후 4시에 진행될 첫 강의는 왕산 허위 선생의 의병운동에 대해 장웅재 사무국장이 강연자로 나설 예정이다.


이어서 김종길 구미독립운동사 자문위원은 왕산 선생의 청년시절, 장진홍 선생의 생애와 사상, 장진홍과 일본인 시게사부로의 의리에 대해 총 3강좌를 개설해 진행할 예정이며, 이후부터는 다른 역사학 전문가들도 강사로 초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종길 자문위원에 따르면 문답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인 본 강좌에 대한 참가자 모집은 구미상생발전을 위한 단체카톡방에서 활동하는 구미시민 가운데 선착순 15명을 모집하기로 했다.

 

장진홍 의사의 용렬(勇烈)한 삶


한편, 구미출신 독립운동가 장진홍 의사는 1927년 10월 18일 정오경 대구부 상정의 조선은행 대구지점에서 폭탄을 터뜨리며 용의주도하게 의거를 실행에 옮겼다. 그 후 2년 뒤 1929년 2월 14일 무렵 오사카에 사는 아우 장의환의 안경점에 은신해 있던 장진홍 의사는 피체 되었고 그 이듬해 7월 31일 옥중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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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 항일투쟁 연대기 대한광복회 가입을 시작으로 장진홍 의사의 항일 의열투쟁사는 시작되었다.

 

 


장진홍 의사는 스승인 장지필로부터 강렬한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품게 되었으며 함께 인동 장씨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화와 청춘을 바쳐 시대정신을 실천하려했던 독립운동가의 기개는 오늘날까지도 가슴을 끓어오게 만든다.


장진홍 의사가 구미시 진평동 출신의 이내성과 함께 대한광복회에 몸담으며 만주 봉천성과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건너가 항일전을 위한 준비를 했던 과정과 1919년 3·1 운동이 발발 후 일제 군경이 진압을 위해 전국 각처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낱낱이 조사해, 그해 7월에 인천항에 들어온 미국 군함 승조원 김상철 하사에게 자료를 넘겨 보고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각국에 알릴 수 있도록 했다. 안타깝지만 김상철 하사가 장진홍 의사의 부탁을 실행에 옮겼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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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의 조선보병대 활동 당시 모습 훤칠한 외모에 강단있는 전형적인 투사의 모습이다. 이날 참석한 교육생 중 인동 장씨도 있었고, 한 교육생의 얘기에 따르면 후손이 사진속의 장진홍 의사와 닮았다며 수근 거리기도 했다.

 


1927년 4월 장진홍 의사는 이내성의 소개로 경산시장에서 만나 알게된 일본인 호리키리 시게사부로로 부터 폭탄제조법을 전수받았고, 영천에 사는 일본인 고바야시 호지로부터 다이너마이트와 뇌관 30개 그리고 도화선 25척을 산 뒤 다량의 폭탄을 제조했다.


그는 제조한 폭탄을 이용해 대구의 경북도청, 경북경찰부, 경찰서, 형무소, 지방법원, 조선은행 지점, 식산은행 지점, 동척 지점 그리고 구미 인동의 친일부호 장길상의 집 등 모두 아홉군데에 폭탄거사를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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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가 폭탄거사를 일으킨 일제시대 대구부 지도 일대에 폭탄거사 대상 표적들이 몰려있다.

 

 

이중 장길상은 같은 인동 장씨로서 친일부호 장순원의 큰 아들이었으며, 장순원은 왕산 허위선생의 도움으로 관직을 얻었고 항일을 위한 군자금 지원을 약속했으나 이를 어기며 친일 행각을 벌였다고 한다. 1917년 11월 왕산 허위선생의 제자인 박상진 선생이 조직한 대한광복회에서 구미 인동에 거주하던 장순원을 찾아가 처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론된 9군데의 폭탄거사 대상인 장길상의 집은 구미에 위치해 있어 현실적으로 거사 대상으로 어려웠을 것이므로, 대구에 있는 장순원의 둘째 아들인 장직상의 집에 거사를 하려 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평가하는 장직상은 머리가 비상했고 대인관계에 능수능란했던 자이며 1925년 당시 대구상공회의소 소장을 비로해 일제의 앞잡이인 중추원 참의직 자리를 제의받기도 했다고 한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의 장진홍 의사는 같은 문중인 인동 장씨중 친일파를 처단함으로서 본보기를 삼으려 했다.


장진홍 의사가 대구형무소에서 옥중 자결로 순국할 당시 대구형무소의 1300여명의 제소자 전원은 통곡과 단식으로 향년 36세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바친 그의 별세를 애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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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인의 의열투쟁은 1920년대 고양기를 거쳐 1930년대의 잠복기 그리고 1940년대의 분출기란 큰 흐름으로 연속성을 이어갔다.


장진홍 의사의 과감한 결단과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준비에 의해 거행된 대구 폭탄의거는 1920년대 후반기 의열투쟁의 큰 불꽃이 되었으며 걍북인들의 정신과 마음 속에 내재된 특별한 저항정신과 진취적인 정의감의 발로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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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홍 의사에게 폭탄제조법을 전수한 호리키리 시게사부로 관련 기사 호대구부 칠성정의 이시야마집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자결했다고 알려진 호리키리는 폭탄전문가이자 국제공산주의자였으며 항일투쟁을 도운 일본인이었다. 김영범 교수는 폭탄제조 도중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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