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구미성리학역사관' 명칭으로 본 성리학의 민낯

김도형 0 1,461

 

thumb-20200310202024_asbznzyn_600x337.jpg

구미 금오산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길재 선생의 회고가

 

thumb-20200310202049_blwrsnxx_600x337.jpg

구미성리학역사관 솟을대문

 

구미시는 지난 2월 24일부터 2월 28일까지 5일 동안 금오산도립공원에 위치한 역사문화디지털센터의 9월 개관을 앞두고 방문객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새로운 이름을 선정하기 위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새명칭을 공모했다.

 

공모 요건으로 역사문화디지털센터의 특징을 살린 참신한 명칭과 구미시 역사와 문화를 상징적, 함축적으로 표현한 명칭 그리고 방문객에게 친근감을 주고 부르기 쉬운 명칭으로 선정 범위를 잡았다.


그 결과 선정된 이름은 '구미성리학역사관'이다.


구미성리학역사관의 주요시설은 전시동과 아카이브카페, 체험동, 문화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운영 계획으로는 구미의 역사와 문화유적, 인물소개를 비해 야은길재부터 조선, 근현대까지의 성리학의 발달 및 유물전시 그리고 공예와 국악 등 체험프로그램, 휴게시설로 운영할 예정이라고 알렸다.


제1종 전문 박물관으로 등록될 예정인 '구미성리학역사관'에 대한 명칭이 성리학의 본향을 알리는데 대표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4월 6일 영남문화신문 장영도 편집장은 역사문화사설을 통해 '구미성리학역사관'의 명칭에 대해 "이 명칭을 좋다고 정한 사람들과 시청의 관계자, 과연 이 명칭이 타당하다고 보는지?"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구미출신 유학자들의 자료를 전시한다 하여도 "조선성리학이나 "한국 성리학" 명칭이 들어가야 된다고 주장한 장영도 편집장은 야은선생으로 부터 시작된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집대성과 조광조의 도학정치 실현을 언급했다.

 

한편으로 장 편집장은 여헌 선생의 학문적 업적인 ‘우주요괄첩‘, ‘역학도설‘, ‘경위설‘, ‘우주설‘, ‘태극설‘ 을 소개하며 특히 ‘경위설(經緯說)‘과 ‘우주설(宇宙說)‘은 시대적으로 중국보다 훨씬 앞섰다고 평가되고 있다며 경기도 과천시에 위치한 국립과학관에 한국을 빛낸 16인의 과학자로 선정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장영도 편집장은 "안동시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 칭하고 있으며, 구미는 한국정신문화의 본고장인데도 지금까지 공단이 우선이라는 논리에 묻혀왔지만 이젠 그 특성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영도 편집장은 구미에 대해 "충,효 정신과 열녀, 효자,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등 많은 학자와 충신들을 배출한 고장으로 개(의구총)와 소(의우총)도 주인을 위한 의로운 죽음을 한, 그야말로 한국의 대표적인 성리학 발상지이자 성리학의 꽃을 피운 고장이다."라며 충효정신이 이어져 나라를 위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됐고, 이 성리학의 정신이 구한 말 최초의병대장 왕산 허위 선생에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장영도 편집장의 요지는 '구미성리학역사관'이라고 호칭한다면 이는 "구미만의 성리학이지 조선의 성리학은 아니다."라 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구미성리학역사관'을 재고하여 '구미 조선 성리학 역사관' 또는 '한국 성리학 역사관' 등의 명칭으로 새롭게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구미성리학역사관' 명칭을 통해 성리학에만 집착하는 지역의 역사문화관이 고루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재 선산읍 독동리에는 영남유교문화진흥원이 다양한 유교관련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한옥촌 조성을 비롯해 한국학 연구를 위한 관련시설 들이 웅대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영남유교문화진흥원장 노진환 선생이 주도한 본 사업은 조선시대 영남사림파의 고문헌(古文獻) 등을 수집, 전시, 보관하고 성리학과 선비문화를 발전, 진흥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국립 규장각과 안동의 도립 한국국학진흥원과 성격을 같이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과 항일독립운동 자료도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금오산에 지어진 '구미성리학역사관' 역시 조선시대 500년의 사상적 근간이었던 성리학(性理學)을 조명하기 위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으나, 개인의 의지가 많이 반영된 사업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구미성리학역사관, 즉 역사문화디지털센터의 추진경위를 살펴보면 지난 2013년 3월 14일 구미시립민속관에서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야은기념관) 건립을 위한 실무추진위원회 사무실 개소 현판식을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으며, 실무추진위원회는 각계각층의 저명한 지역인사를 주축으로 했으며 구미경실련 관계자도 포함됐다.

 

이에 앞서 동년 1월 30일 구미시청 3층 상황실에서는 관내 기관장 및 원로, 여성․청년 단체장, 문중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관건립 경상북도추진위원회(위원장 노진환)주관으로 3대문화권사업의 일환인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건립 사업설명회를 가진 뒤 2014년도에 착공해 2016년 완공 예정으로 우리나라 최대의 성리학 본향으로서의 가치를 드높일 목적으로 추진됐다. 사업이 3년 가량 지체됐으나 우여곡절 끝에 금년 9월에 개관을 앞두고 있는 구미성리학역사관.

 

전국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금오산의 초입에 들어선 '구미성리학역사관'은 찾는 이들로 하여금 지역의 역사가 단순히 조선시대에만 머물러 있는 지역임을 상기 시켜 줄 수도 있다. 왜 지역민들은 '성리학' 이외의 다른 역사문화는 찾지 못하는 것일까?

 

경북에서 성리학을 추앙하는 지자체는 흔히 볼 수 있고 어디를 가나 식상해 보인다. 물론 그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것은 지역의 정통성을 되새기는 중요한 일이나 궂이 기념사업을 하지 않아도 차고 넘칠만큼 성리학의 흔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구미성리학역사관'은 성리학 인재를 배출한 지역의 토호세력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르겠으나, 성리학은 민초들에게 그다지 살갑게 다가올 수 없는 극명한 경계가 있는 역사문화라는 견해도 있다.

 

구미는 신라불교문화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으며, 일리천전투로 후삼국통일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고장이기도 하다. 구미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보다 널리 알려야 될 지역의 역사문화이나 생각보다 관심 밖의 대상이다.  이는 조선시대 이전의 아득히 오래된 역사문화여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명칭만 남아있을 뿐 퇴색된 과거로 자리하고 있어 보인다.

 

금오산의 정상에서 바라다 보이는 드넓은 낙동강유역은 신라불교의 시발점이었고 한국사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일리천전투의 무대였다. 해서 '구미성리학역사관(Gumi Neo-Confucian History Museum)' 대신 '한국낙동강유역역사관(Korea Nakdong River Basin History Museum)'으로 불린다면 좀 더 포괄적인 시선으로 구미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성리학의 민낯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의 경우 칼럼을 통해 조선을 망친 것은 '성리학' 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홍 편집국장은 '사무난적'으로 몰려 죽은 백호 윤휴 선생을 예로 들며  ‘주자 신봉론’에 빠진 조선 성리학자들이 윤휴를 규탄했고 당쟁 과정에서 사문난적으로 몰아 목숨을 빼앗았다고 했다.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청해서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말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주희는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廏焚退朝曰傷人乎不問馬’(구분퇴조왈상인호불문마)라는 문장을 “말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이 상했는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 말에 대해 물을 여유가 없던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짐승을 천하게 여긴 이치가 이와 같다”고 해석했다. 

주희를 주자로 부르며 공자보다 더 높이 떠받든 우암 송시열 등 조선 성리학자들은 이 해석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주자의 글 중 한글자라도 다르게 쓰면 ‘사문난적’이라고 몰아붙이고 목숨까지 빼앗았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백호 윤휴

명대 양명학자들은 주희의 논어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공자 같은 성인이 사람만 챙기고 말은 못 본 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 그들은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청해서 사람이 다쳤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그리고 말에 대해서도 물었다”로 달리 해석했다. 조선 중기의 백호 윤휴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더 높은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윤휴의 이런 열린 자세는 공자의 가르침과 통한다. 공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고 가르쳤다. 스스로 덕을 밝히고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수신하는 게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과 자꾸 비교하기 좋아하는 자공에게 “賜(사·자공의 이름)는 어진가? 나는 남과 비교할 여가가 없다”고 나무랐다.

나아가 “천하가 돌아가는 곳은 같아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다르며 도달하는 곳은 하나지만 생각은 백가지”(天下 同歸而殊途 一致而百慮, <주역> 계사하전 5장)이듯 나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⑩ 조선을 망친 '성리학'


 

 ◆조선성리학의 부끄러운 민낯 ‘화냥년’

주자 도그마에 빠진 조선 성리학자들은 ‘이단’을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 ‘객관적 진실’보다는 편가르기에 나서 상대방 흠집내기에 바빴다. 그것이 살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 3년 전 일어난 기축사화(정여립 모반사건)와 왜적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김성일과 황윤길의 엇갈린 보고가 대표적이다.

나라가 거의 쓰러진 6년간의 임진·정유왜란을 겪고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이란 반성문을 썼지만 글뿐이었다. ‘명·청 등거리 외교’로 전쟁의 재앙을 피하려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싸움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외치다 정묘·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삼배구고두’를 당했어도 그들은 민생 살리기와 국정쇄신보다는 예송논쟁에 사로잡혔다. 이 과정에서 윤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송시열마저 사약을 받는 아이러니를 자초했다.

‘주자 신’에 씌인 조선 성리학자들이 그들만의 권력쟁탈전을 벌일 때 ‘화냥년’이라는 한맺힌 피해자들이 양산됐다. ‘서방질하는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뜻하는 이 말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만들어졌다. 인조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군은 무수한 양민을 잡아갔고 이 가운데는 여성도 상당수였다(일부에서 포로가 50만~60만명이라고 하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가 600만~700만명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규모다).

문제는 포로로 끌려갔다 되돌아온 여성들 즉 ‘환향녀’(還鄕女)였다. 부인과 딸마저 지키지 못한 그 잘난 성리학자 사대부들은 청에서 풀어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절을 지키지 못해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를 댔다. 심지어 인조가 서대문 밖 개울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회복한 것으로 본다는 조칙을 내기까지 했다.

‘널리 구제한 시내’(弘濟川)이라는 뜻의 서대문 밖 홍제천은 당시 만들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주자식 흑백론에 무젖은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갈 곳을 잃은 상당수 환향녀는 다시 적지인 청으로 돌아가거나 서대문 밖에 남아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 중 일부는 몸을 파는 창부가 돼 목숨을 부지했고 결국 화냥년이란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⑩ 조선을 망친 '성리학'

 

홍찬선 편집장은 사소한 끊어 읽기 하나 허용하지 않았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편협성은 ‘내 것을 바탕으로 삼고 앞선 외국문물을 참작해 받아들이는 패치워크’(짜깁기)로 이룩한 세종의 문화대국을 "고작 100여년 만에 날려버렸다"고 주장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