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청백리 후손의 삶, 너무 정치적이지 않은가.

김도형 0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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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5일 국회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주요 당직자 회의 공개 석상에서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론에서는 당 지도부보다 상석인 황교안 대표의 오른쪽에 앉은 점 등에 주목했으며, 지역 정치권은 김 전 지사가 한국당 공천관리위원회의 대대적 TK(대구경북)의 물갈이 예고 이후 모습을 나타낸 만큼 정치적 의미가 각별할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당 국책자문위원장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고 알려진 김 전 도지사는 비공개 회의에서 "총선이 다가오는 데 힘 모아서 잘 치러보자"며 "지방자치단체에서 행정을 하면서 느낀 점은 나라가 힘들수록 정치권이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당이 이런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며 당부의 말을 전한 것으로 언론 지상에 보도됐다.


김관용 전 지사의 본격적인 언론 노출은 금년 1월 부터 시작됐다. 도백시절 경상북도와 경주시 그리고 베트남 호찌민시가 공동 개최한 ‘호찌민-경주세계문화엑스포 2017’ 개최로 양 국의 우호증진과 새로운 문화교류의 모범적 사례를 개척한 공로가 인정되어 지난 1월 10일 주한베트남대사관에서 노동훈장을 전수 받았다. 


또한 1월 13일 오후 대구 수성구 호텔라온제나에 모습을 보인 김관용 전 지사는 이인선 자유한국당 예비후보(전 경북도 경제부지사, 전 대경경제자유구역청장)의 '정치, 참…'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했다.


당시 김 전 지사의 축사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분단, 지독한 가난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이 역사가 축소된 그러면서 극복한, 그런 것들을 일컬어서 TK라는 역사적인 특성을 낳고 있는 물론 모두의 동의를 받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큰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이렇게 보니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많이 든다. 저는...... 불의가 법이 될 때 국민이 저항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제가 한 얘기가 아니고 아인슈타인이 한 얘기다. 그런 상황들에 이르게까지 대구경북지역에 뭔가 보이지 않는 좀 네거티브적인 부정적인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데 대해서 참으로 우려를 한다.


물론 어느 한 시대나 어느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크게 도도하게 흘렀던 역사의 물길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징후라고 볼 때 다시 한번 우리의 자세를, 우리 영남인의 정체성을, 아이덴티티 혼을 거머쥐고 갔으면 좋겠다고 주장한다. 그 중심에 이인선 박사가 저는 가능하다고 본다. 치마만 둘렀지 남자이다. 대단한 능력과 그런 예견이 뛰어난 분이라고 생각하고 제가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만은 오늘 출판 재미있게 썼으리라고 본다. 앞으로 잘 되기를 바라고 많은 분들이 오셔서 힘을 실어 주신데 대해서 제가 지사로서 이인선과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이 참 값졌구나 참 좋은 사람하고 같이 일을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초에 1년 되면 올 6월 말 되면 돌아온다."


축사의 말미에 필리핀에 있다고 밝힌 김관용 전 지사는 자신이 있는 곳에 따뜻한 공기를 쐬러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금년 중순 경 다시 고국으로 되돌아 온다고 밝혔다. 2년간의 필리핀 칩거 생활을 마무리 할 것으로 보이는 김 전 지사의 추후 행보가 기대되는 부분이다. 조용히 은둔생활을 하다시피한 지난 2년은 김 전 지사 퇴임 이후에 쏟아질 어려움에 직면한 경북 경제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비껴가게 했고 이를 비롯하여 모든 관심을 불식시켰다.


2017년 8월 한 언론에서는 김관용 전 지사의 퇴임 후 거취와 관련해 태어난 고향인 구미시 고아읍 문성지에 위치한 들성김씨 문중 터로 알리며 그동안의 업적에 대해 칭송하는 글을 남긴 사실이 있다.


내용에 따르면 김 전 지사의 동생은 같은 문성지 한구역의 도시개발사업조합장을 맡아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지난 23년간 구미시장과 경북 도지사 재직시 기록물을 전시할 전시관도 꾸밀 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론보도대로 고향으로 금의환향할 줄 알았던 김 전 지사는 퇴임 후 고향을 찾지 않고 홀연히 필리핀으로 떠났다.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민선1기를 시작으로 구미시장과 경북도지사 등 지난 24년간 독보적인 지방자치행정의 리더로서 산 역사가 된 장본인인 김관용 전 지사의 업적에 대해 비판보다는 칭송 어린 글 일색으로 경북지역 언론에서 화려하게 포장된 경향이 있다. 김관용 전 지사 재임 당시 홍보비 예산 집행은 언론인들 사이에서 주요 관심사항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언론융화책의 성과는 퇴임 이후 효과를 발휘했다.


도지사 퇴임 이후 필리핀으로 간 김 전지사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퇴임한 김 전 지사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


고향인 구미를 찾지 않는 이유는 김 전 지사의 지난 시절 행보를 잘 알고 있는 지역민들의 차가운 시선을 우려한 탓일 수도 있다.


최근 구미시는 오는 9월 개관할 예정인 가칭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의 명칭에 대한 공모를 24일부터 28일까지 5일 동안 접수 받는다고 알렸다.


혹자는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가 김관용 전 지사의 문중사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 전 지사의 시조인 김취문 선생의 선영이 있는 문중산 일대에 위치한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는 금오산도립공원 구역으로 금오지가 바로 앞에 있다.


김 전 지사의 문중에서 일부 기부채납한 것으로 알려진 부지에 지어진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의 공사와 함께 옆으로 김취문 선생의 선영까지 향하는 길은 잘 정비되었다. 도립공원법에 묶여 개발이 힘든 금오산 자락에 위치했으나 문중의 숙원사업일 수도 있는 김취문 선생 선영 일대의 큰 변화는 3선 지사라는 출중한 후손의 역량이 빛을 발한 결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문중 이득이 된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 사업을 가능케 한 것은 지난 2013년 1월 30일 기념관건립 경상북도추진위원회가 구미시청 3층 상황실에서 지역인사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3대문화권사업의 하나인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건립 사업설명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당시 지역내 기관장 및 원로, 여성, 청년 단체장, 문중 등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 건립사업은 국비, 도비, 시비를 포함 총 228억원의 예산으로 금오산 경파정 인근 10여만㎡ 부지위에 2014년도에 착공해 2016년도에 개관할 예정이었다. 구미경실련사무국장 등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가 낀 추진위원회 등의 면면을 봤을 때 순조롭게 완공될 것으로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4년이 흘러 우여곡절 끝에 지금에 이르렀다.


김 전 지사의 지지세력이자 사회적 인맥으로 똘똘 뭉쳐진 추진위원회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도립공원내 개발사업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문중에서 기부채납형식으로 제공한 일부 부지 외에도 구미시는 문중 부지를 12억 여원에 매입했다.

 

경북과 구미의 지형도에 큰 변화를 준 장본인이나 그 업적에 대한 공과를 평가하기 이전에 청백리 김취문 선생의 후손으로서 옥의 티가 될 수 있는 것이 구미역사문화디지털센터 사업이다. 고장에서 청백리의 상징이었던 김취문 선생의 선영 일대가 3대 문화권사업이라는 포장으로 화려하게 탈바꿈 된 것은 아이러니하다. 청백리 정신이 무색한 지경에 이른 현재의 모습을 두고 김취문 선생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한편으로 김관용 전 지사는 도민을 비롯해 구미시민을 위해 성심껏 일했고 하늘을 우러러 떳떳하다면 어떤 비난의 말도 감내하며 고향을 찾아 자신을 지지해 준 지역민들에게 인사를 해야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지역민들로부터 용서받지 못한자 그대 이름은?


한때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던 전 도백의 삶은 그의 시조인 조선전기 청백리 김취문 선생의 삶과는 차이가 많아 보이며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책무)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취문 선생은 지방관으로서 본인의 입무에 충실하며 아부와 타협을 멀리한 강직한 성품을 지난 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김취문 선생은 교리, 호조참의,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이다. 호는 구암(久菴)으로 어려서부터 형 김취성(金就成)과 함께 박영(朴英) 선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워 그 학통을 이었고 문장을 잘하여 이름이 높았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537년(중종 3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거쳐, 1565년 사성(司成)·집의(執義)·교리(校理)와 호조참의·대사간에 이른 김취문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여 벼슬길에 나가서도 권세가에게 아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자주 외직으로 밀려났으나 외직에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여 백성들을 침탈함이 전혀 없어 성균관사성으로 있을 당시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취문 선생의 대표적인 일화중 하나인 영천 군수 재임시절 도적떼를 만난 이야기는 그의 성품을 대변해 준다. 당시 경주에서 활개를 치던 팔용이라는 유명한 도적떼의 두목은 김취문 영천 구수가 경주 행차를 하자 약탈하기 위해 잠복을 했다. 김취문 일행은 도적떼가 잠복해 있는 곳으로 지나게 되었고, 공격 신호와 동시에 몰살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팔용은 돌연히 공격신호를 거뒀다. 기세 등등했던 팔용의 도적떼 무리들은 의아해 했다.

팔용은 부하들에게 "영천군수는 선량한 관리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관리를 차마 죽일 수는 없다."며 이유를 설명했고 도적떼 들 역시 민생을 생각하는 김취문의 성품을 인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 오늘날 알려진 현대판 청백리의 대표 인사격인 김능환 전 대법관은 지난 2012년 7월 대법관직에서 물러났고 퇴임 후 부인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으로 편의점과 채소가게를 열어 화제가 됐던 일화가 있다. 

 

당시 김능환 전 대법관의 재산은 9억여원으로 2012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때 전체 대법관 중 꼴찌에서 두번째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능환 전 대법관은 퇴임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총리 후보 등으로 거론됐으나 "그동안 과분한 일을 했다. 나에게 더 이상 공직은 없다"고 못박았다. 또한 여러 대학의 초청에 대해서도 “선생이 돼 학생을 가르칠 만한 사람이 못된다”며 거부했다.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꿈이 있다면 편의점과 채소가게가 먹고살 만큼 잘 돼서 집사람과 함께 잘 지내는 것”이라는 말을 하여 수많은 네티즌이 앞다투어 존경을 표시했다.


구미에는 어른이 없다고 한다.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의 부재에서 오는 말이다.

 

24년간 지방자치의 일선에서 맹활약을 하며 경북 특유의 정치색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김관용 전 지사는 매번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화려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퇴임 이후 도피성 필리핀 행보를 보였고 공식적인 고향 방문이 없었던 김 전 지사에 대해 도민들은 그의 능력과 인물 됨됨이를 보고 지지를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정치를 일종의 사업으로 보는 오늘날의 풍토 속에서 김 전 지사 재임시절 도정업무 등에 대한 언론보도는 기업의 이미지 메이킹과도 같은 양상으로 미화된 부분이 많아 보인다. 지난 시절 도백으로서 성실했고 귀감이 되었다면 퇴임 이후에도 언론 등에서는 전 지사에 대한 조명이 끊임이 없어야 했을 것이나, 퇴임과 동시에 필리핀으로 간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하지만 4.15 총선을 앞둔 시점에 다시 찾아온 김관용 전 지사가 과연 이 경북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는 하나 원로로서 대우 받는 모습을 통해 정치에 일말의 미련이 남있다는 사실을 가늠케 만들기도 한다. 세상의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더불어 살 수 있게 된 4차산업혁명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미련과 욕망이 변함 없어 보인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의 입김으로 특정 인사들에게 공천에 대한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무언의 암시를 주기 위해 공식석상에 드러낸 모양새로 비쳐질 수 있는 작금의 모습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고향 사람들이 그를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일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만든다. 차라리 총선이 끝난 뒤 모습을 드러냈다면 달리진 모습의 전 도백으로 반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을 떠나 지난 도백시절 열과 성를 다해 사심없이 시민과 도민을 위해 헌신했다면 이제는 떳떳이 고향을 찾아와 당당히 지역을 위해 봉사의 삶을 사는 것도 필요하다. 지방자치의 모순된 면을 잘 알고 있다고 밝힌 바 있는 김 전지사의 지난 시절 경험을 십분 살려 행정의 노하우를 전수해 줄 수 있는 교육가로서의 활동도 바람직해 보인다.

 

최초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김관용 전 지사는 이후 행정가로 그리고 청치인으로서 한평생을 보냈다. 젊은시절 교육자였던 김 전 지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된다면 초심을 되새겨 지역의 인사들과 안정된 노후를 맞이하기를 원할 것이고, 이러한 마지막 삶의 장식이 청백리 김취문 선생의 정신에 누가 되지 않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실천을 기대해 본다.

 

 

글쓴이-한국유통신문 발행인 김도형

-4차산업혁명 전문칼럼리스트

-독립운동가 김원식선생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4차산업혁명 신지식인 대상 수상(2019.4.28)

-세계금궁스포츠협회 추진위원장

-가온해썹사업단 영남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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