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일터는 어디에나 있다

사회부 0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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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거리와 계약을 넘는 새로운 일의 풍경. 재택이라는 이름 아래 피어난 자유와 갈등, 그리고 두 나라가 마주한 근로의 철학


물리적 거리가 곧 업무의 거리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에게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그 속에서도 변화와 혁신의 씨앗을 틔웠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재택근무’였다. 거리 두기와 비대면이 일상이 된 시절, 전 세계 수많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거실, 부엌, 혹은 침실을 사무실로 바꾸며 일터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는 뉴질랜드와 한국 모두에게 해당되는 공통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두 나라는 다른 방향으로 ‘유연한 근무’라는 흐름을 해석하고 적용해가고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최근 고용관계청(Employment Relations Authority, 이하 ERA)의 판결 하나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주 4일 재택근무를 하던 한 근로자가 회사의 출근 요청을 거부하고 부당해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ERA는 고용주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정적 이유는 ‘서면 계약이 없었다’는 점. 즉, 관행적으로 해오던 재택근무는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아니며, 고용계약에 명시되지 않았다면 고용주의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는 단순한 법적 판결을 넘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새롭게 마주한 ‘일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에서 일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고용 전문 변호사 제임스 코완은 장기간의 관행이 일정 시점 이후에는 ‘관행(custom and practice)’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분쟁을 막기 위해서는 재택근무 조건을 서면으로 명확히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뉴질랜드 공공서비스협회(PSA)는 정부의 “재택근무는 권리가 아닌 성과 중심의 선택사항”이라는 지침에 반발하며 ERA에 소송을 준비 중이다. 이처럼, 뉴질랜드 사회 전반에서는 재택근무가 ‘권리인가, 아니면 선택인가’를 놓고 깊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고용주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유연성 후회(flexibility regret)’라는 말까지 등장하고 있다. 코로나19 직후 유연하게 허용된 재택근무가 오히려 조직 문화의 약화나 성과 저하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무실 출근을 다시 요구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흐름은 뉴질랜드에서 재택근무가 아직 ‘당연한 권리’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뉴질랜드 사회가 ‘성과’와 ‘공정성’을 중시하는 문화, 그리고 계약에 근거한 법적 판단을 중시하는 시스템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역시 코로나19를 겪으며 재택근무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처음에는 낯설고 비효율적이라 여겨졌지만, 많은 기업들이 재택근무가 오히려 업무 효율을 높인다고 판단하며 이를 제도화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IT 기업이나 스타트업, 글로벌 기업을 중심으로 ‘원격 근무’를 전면 도입하거나 ‘하이브리드 근무제’를 정착시키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국에서는 정부 차원에서 ‘일·생활 균형’을 위한 정책을 장려하며, 재택근무를 단순한 팬데믹 대응이 아닌 장기적 근무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뚜렷하다. 특히 저출산 문제, 장시간 노동, 수도권 집중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도 원격 근무가 주목받고 있다.


물론 한국도 모든 산업과 직장에서 재택근무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많은 기업에서는 물리적 출근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며, 전통적인 조직 문화와 위계 중심의 구조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변화의 가능성’을 더 폭넓게 실험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단지 업무의 방식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와 한국. 지구의 남북을 가르는 먼 거리에 놓인 두 나라는 같은 팬데믹을 겪었지만, 재택근무라는 변화 앞에서 서로 다른 결을 보여준다. 뉴질랜드는 법적 계약과 고용주의 권한을 우선시하며 재택근무를 ‘허용된 예외’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고, 한국은 사회 구조적 문제 해결의 하나로 재택근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를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재택근무는 단순히 ‘어디에서 일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일할 것인가’, ‘무엇을 가치로 둘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재택근무의 본질은 유연성이다. 그리고 유연성이 진정한 힘을 가지려면, 명확한 기준과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 그것이 고용계약이든, 조직문화든, 혹은 국가 정책이든 말이다.


이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진정한 유연성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로 되돌아갈 것인가.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유산은 어쩌면 이 질문을 던질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해답은 각자의 사회, 각자의 조직,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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