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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당시 언론을 통해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박상희 선생 부친 박성빈 옹은 고령 박씨로서 어사 박문수의 6대 방손이셨다. 박정희 대통령의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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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28일 구미시 상모동에 위치한 일명 '박정희 산' 일대를 해맸다. 이유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한 인물의 묘소를 찾아가 보기 위함이었다.
기자는 지난 4월부터 선산지역
동학농민운동 역사와 관련해 지역을 돌아다니며 취재했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친인 박성빈 옹께서 동학농민군의 고령, 성주지역의 접주를 하며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관련 자료를 통해 인지했고, 지역의 역사를 차츰 알게되었다.
더불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고 평가 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의 존재 또한 우연히 알게됐다.
박상희 선생은 자유민주연합 명예총재이자 제3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의 장인이며, 그의 묘소는 구미 상모동 일원의 일명 '박정희 산'에 있다.
잘못 알려진 역사에 길들여진 우리
빛의 속도로 발전하는 이 시대에 가장 탁월한 문명의 이기인 스마트폰으로 세계의 동향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는 오늘날에도 사회주의자는 좌익이며 혹은 '좌빨'이라고 폄훼하는 사상의 편향주의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단국대 역사학과 한시준 교수는 지난 6월 5일 구미 왕산허위기념관에서 8·15 해방일에 대해 언급하기를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해방을 쟁취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잘못 알고 있고 고민해야 할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전하며 경북인의 정체성 찾기 강연을 했다.
더불어 안동대학교 역사학과 김희곤 교수가 말하는 경북인의 특징은 시대 과제 해결에 적합한 정체성을 가졌으며 '전통과 혁신의 조화'란 이념의 틀을 수립했다는 평가를 했다.
전통을 깨고 나온 혁신과 혁신을 쌓아 만든 전통, 이를 실천한 나라사랑이 돋보이는 경북인들.
한편으로 우리나라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몸살을 앓아왔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과제라고 주장하는 김 교수는 "가만히 있는 국민을 좌파와 우파로 가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들이다."라고 지적했다.
진보와 보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김 교수는 전통을 보수한다는 것은 수구꼴통이 아니라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보수이다, 더불어 나아가야 하는 혁신과 진보로 나아가기 위해 소통과 조화와 화합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역사를 되돌아 보면 독립운동사 속에 진보와 혁신을 다 갖춘 것이 경상북도인의 특징이었다.
지난 일제치하 경북에서는 지킬 가치가 있던 것은 지키고자 했던 분들이 의병을 일으켰고, 수많은 유림인사들이 자정순국을 했다.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독판 이상룡 선생, 일송 김동삼 선생 등을 포함한 경북의 혁신유림들은 대부분 해외로 뛰쳐나갔고 사회주의도 받아들였다. 그리고 민족이 서로 등 돌리고 있을 때 통합을 시도했고, 두번의 통합시도에 모두 나선 것이 경북 사람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1926년 6.10만세 운동의 핵심 인물 또한 경북 안동 출신인 권오설 선생을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가였다.
이들이 사회주의계열이란 이유만으로 그동안 우리 역사에 있어서 오랫동안 감추려 했던 과오가 있다.
2005년 3·1절을 맞이해 권오설 선생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훈장을 추서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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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에 버금가는 6.10 만세운동 순종황제의 서거소식에 좌와 우는 힘을 합쳐 한목소리를 내었다. 안동 가일 마을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 선생이 기획 및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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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로 편가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또한 1927년 결성된 신간회는 소위 말하는 좌익이었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우익 세력이 합작한 대표적인 항일단체이며 조선독립을 위해 각 지회를 설치, 근검절약운동을 전개했고 청년운동을 지원했다. 전국적으로 3만 9천여 명의 회원이 있었다.
신간회는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 진상조사단을 파견했고 학생탄압에 대해 일제에 항의했다. 이를 계기로 신간회 주요 인사들은 체포됐고 결성 4년 만에 신간회는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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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를 통합하기 위해 경북인들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일제는 유교진흥회를 통해 유림들을 친일에 활용했고 이에 맞서 신간회는 향교철폐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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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가 배출한 진보주의 대명사 박상희 선생
당시 경북 선산에서는 박상희 선생이 신간회 간부로 항일 활동에 앞장섰다.
박상희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바로 윗 형이며 박정희 대통령이 신뢰를 가지며 따랐다고 전해진다. 박상희 선생은 박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시절에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었고, 정신적인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을 겸직했고 1928년에 집행위원직에 올랐다.
신간회 해산 뒤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 대구지국장을 거쳐,1935년 동아일보 구미지국장 겸 주재기자로 활동하며 선산군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영남일보 2000년 8월 28일자 지면에 실린 '대구 경북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그는 특정한 노선이나 특정단체에 편향됨이 없이 폭넓게 활동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신간회의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구미소비조합'의 이사로 활동하며 경제자립과 국산품장려 그리고 소비절약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당시 신문에 실려있다.
부인 조귀분 여사는 항일여성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의 김천지회장을 맡았고 야학교사로도 사회운동에 앞장섰다고 한다.
신문기자와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박상희 선생은 1944년에는 건국동맹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간회 간부 경력과 조선중앙일보 그리고 동아일보에서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 창설 후 인민위원회 지부 내정부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석했을 만치 당시 선산군의 민심을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었다.
안타까운 구미 항쟁, 구미의 별을 지게하다.
부정한 권력에 맞써 싸우는 것을 일컬어 우리는 소위 '항쟁'이라고 부른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지만,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박헌영 등이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지지한 뒤로 그는 침묵을 선택했다고 한다.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의 실패한 쌀 배급 정책과 콜레라가 창궐한 대구 시민들의 굶주림과 대구의 봉쇄로 인해 민심은 흉흉해져만 갔고 결국 대구 항쟁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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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 당시 모습. 대일 전쟁 패권자인 미군정의 폭정과 남아있는 친일 경찰 세력들의 득세에 분노한 대구시민들의 항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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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는 들끓었고 친일 경찰의 시민들에 탄압 또한 비일비재했던 시기였다.
대구 항쟁 사건의 여파로 민중 항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구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10월 3일 구미의 박상희 선생을 중심으로 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2000여명의 분노한 군민은 구미경찰서를 공격했다.
당시 박상희 선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성난 군중들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하는데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구미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우익청년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에 의해 선산 들녘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일제시대 당시 신문기자로서 그리고 진보 사회주의자로서 선산군 일대를 뛰어 다니며, 모든 사람들과 교류를 쌓았던 그는 관공서의 생리도 잘 알고 있었고, 어려움을 겪는 민중들의 애환도 그 누구보다 잘 알 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흔히 박상희 선생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은 남로당에 관한 일이다.
남로당은 박상희 선생이 눈없는 총탄에 맞아 서거한 이후 50여 일 뒤인 1946년 11월 23일 조선신민당과 조선인민당 그리고 조선공산당이 합당해 탄생한 단체로서 선생과는 연관이 없다. 다만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분개한 동생 박정희는 당시 남로당에 가입, 활동 후 체포되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고 타고난 기지를 활용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고 알려져 있다.
6.25 발발 후 패권주의 논리에 따라 수많은 남로당 인사들이 숙청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동생인 박정희 대통령의 반공 정치에 가려 민족주의자이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던 박상희 선생의 업적과 활약상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박정희 산'에 있는 박상희 선생 묘소에 가다.
마침 근래에 우연히 박상희 선생의 묘소가 구미시 상모동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됬고, 인터넷에 보여지는 사진을 보건데 구미공단이 바라다 보이는 익숙한 위치에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건만 박상희 선생의 묘소를 지척에 두고 인근을 맴돌았다.
박상희 선생 묘소 찾기를 포기하고 박정희 생가 옆 옛날보릿고개 체험장에서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며 목을 축이다 보니, 토박이인 상모지역 주민이 위치를 알려줘 물어 물어 찾아갈 수 있게 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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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상모지역의 역사에 대해 알려준 상모자율방범대 손영태씨. 막걸리 한잔 건네 드리고 꼬치꼬치 캐물은 결과,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얽힌 비밀도 알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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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상모정이 위치한 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부를 비롯해 박성빈 옹과 큰 형 박동희, 박무희 등의 직계 묘소가 있다.
지난 2010년 7월 15일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수십년간 방치되 오던 구미 상모동 박상희 선생의 묘소에 추모비가 제막되었다고,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던 박상희 선생에게 독립훈장을 추서케하려는 움직임도 한 때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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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상모동에 있는 박상희 선생과 조귀분 여사 묘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을 추모하기 세워진 추모비. |
구미경실련 조근래 사무국장이 쓴 추모비 내용에는 나라와 겨레 사랑이 투철한 민족주의자이자 언론을 통한 항일독립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한 박상희 선생의 업적이 잘 나타나 있었고, 내용 중에는 유독히 눈길이 가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박상희 선생의 업적 중 광주학생운동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과 관련해 수차례 투옥되었다는 내용의 글귀다.
독립운동과 관련해 훈장과 포상 수여 요건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대항했던 사실관계만 있으면 충분하다.
일제시대 당시 박상희 선생의 항일언론으로서의 기자생활과 사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업적이 담긴 수많은 자료를 취합한다면 독립운동가에 합당한 훈장을 추서받는 일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구미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3도 창의군을 결성해 서울 침공에 앞장섰던 왕산 허위선생을 비롯해 대한통의부 박희광 선생, 광복단 장진홍 선생,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다혁당 권쾌복 선생 등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해방 후 친일 잔당이 남아있는 구미경찰서를 공격함으로서 치열했던 구미항쟁을 중재하기 위해 나섰던 출중한 인물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업적은 역사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고 경북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데 일조 할 수 있지 않을까.
박상희 선생이 일제시대를 풍미했던 그 때 그 시절의 무용담이 새롭게 드러나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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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희 선생 추모비 비문>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박상희 선생은 1905년 8월 12일 박성빈 옹과 백남의 여사의 5남 1녀 중 삼남으로 경북 약목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묘비에는 나라와 겨레 사랑이 투철한 민족주의자로서 구미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을 펼치고 신간회 등을 통한 지역사회의 항일독립활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학생운동과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올림픽에 우승시 일장기 말소사건 등으로 수차례 투옥되었다.
해방후 미군정의 강제공출에 분노한 농민들의 항거에 경찰관을 보호하려다가 1946년 10월 5일 진압경찰의 오인으로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게 되었다. 선생과 결혼한 조귀분 여사는 신간회와 여성 독립운동단체인 근우회 활동을 하다가 박상희 선생을 만나 결혼하여 소비조합에 근무하면서 시동생인 박정희 대통령의 학비 뒷바라지를 하였다.
박상희 선생이 타계하고 난 뒤 육남매를 키워 큰 딸인 영옥씨를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종필씨에게 출가시켰고 설자씨는 국내굴지의 기업인 동양물산 김희용 회장에게 출가를 시켰으며 유일한 아들인 준홍씨는 중앙부처 차관보와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여 국가와 사회에 공헌케 하였다.
20세기 구미가 낳은 인물 박상희 선생의 이상과 실천은 오늘날 뜻있는 구미 시민들로부터 "민주주의와 지역사랑 한길, 독립 운동가 박상희 선생"이라는 현재적 개념으로 재조명 되고 있다.
-후손들과 선생을 추모하는 구미 시민들의 뜻을 모아 비를 세우다. 2010년 6월 조근래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