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의 숨겨진 역사(5)-선산 생곡리 동곽재를 가다.<한국유통신문.com>

선비 0 5,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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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문신 김기찬 선생의 강학지소인 동곽재 의성김씨 선산종친회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120년 전의 역사인 선산갑오동학농민운동과 선산을미의병에 관련해 취재를 하다보니, 평소에 접하기 힘들었던 나의 본관이기도 한 의성김씨 문중행사에 가게되었다.
 
지난 19일에는 안동시 서후면에 위치한 학봉종택에, 26일에는 선산 생곡리에 있는 동곽재를 방문하게 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혈맥들이 한날 한시에 한 장소에 모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뭉클한 뜨거운 마음도 쏫아 올랐고 웬지모를 향수가 아련히 느껴진 자리이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옛 어르신들의 언행과 자취가 물씬 풍기고 어릴적에 보았던 문중행사의 기억들이 새록 떠오르는 시점이기도 하다.
 
어린시절에 문중 어른들은 나를 비롯한 꼬맹이 아이들을 보면 늘 말씀 하시길 "고놈 참 양반일세"라며 농담삼아 하신 말씀들로 인해 무의식중에 양반이란 말이 각인되었던 시절이기도 했다.
 
양반이란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른체 그저 점잖게 굴면 양반이려니 생각하며 자라온 날들이며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일 투성이라 생각드는 요즘이다.
 
하지만 을미의병에 관련된 취재를 하며 문중 선현들의 발자취를 되돌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세상에 태어나 아무런 의미없이 함부로 살면 안되겠구나"라는 깨닳음 또한 얻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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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가문의 올곧은 삶을 대변하는 명언 
 
흔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의성김씨 가문은 문충공파를 비롯해 여러 파에서 참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지금까지는 가문의 선현들께서 왜 그리 독립운동에 일생을 몸바치며 험난하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고 그저 존경스럽고 당연한 일로만 여기며 무지몽매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주자성리학을 한국에 토착화 시키고 한국을 대표하는 유학자인 옛적 퇴계선생의 가르침을 사사 받은 학봉 김성일 할배의 학풍이 가문의 전통이 되어, 뿌리 깊은 유교문화 속에 유학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실천 이념으로 삼았고 학봉 김성일 할배는 안동의 선비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에 의해 학봉 할배는 임금 앞에서도 당당히 진언을 하는 강직함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 되듯이, 학봉의 후손들은 훗날 지역사회에서 귀감이 되었고 독립운동에도 애써 당일 성씨로는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명예도 얻고 있다.
 
만약 학봉 가문이 지역의 민심을 얻지 못했고 가문의 영달만을 쫓았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가진 자로서 책무를 다하며 지역 사회에 귀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26일 오전 11시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에 위치한 동곽재에서는 의성김씨 문충공파 선산종친회가 열렸다. 김교홍 왕산허위선생기념관장, 이원균 퇴계학부산연구원장을 비롯해 각 소종중 종친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로간의 예를 올리며 인사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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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친 상호간에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다.
 
이날 동곽재에서 열린 선산종친회에서는 퇴계학부산연구원 원장인 이원균 박사(퇴계선생 14대손)의 '조선시대의 행·수직, 노인직과 음직, 증직에 대하여'란 주제로 강학이 열렸다.
 
이원균 박사는 족보를 보거나 선현들의 행장(行狀)이 기록된 묘비명을 보았을 때, 요즘 흔히 젊은층들이 잘 몰라서 물어오는 관직의 용어에 대해 정리해보았다며 강학의 취지를 설명했다.
 
강학에 앞서 이원균 박사는 양반이라 함은 동반과 서반을 일컬으며 동반은 문관이며 서반은 무관임을 의미하는 기원에 대해, 조선초기에 대궐내 조하(朝賀, 국가 경축일에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일)에서 임금 앞에 문관, 무관이 섰을 때 문관은 동쪽에 섰고 무관은 서쪽에 선 이유로 양반이란 유래가 되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양반의 유래와 조선시대 양반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에 대해 알다.
 
원래 처음 양반은 직접 벼슬을 하는 관직에 있는 사람을 양반이라 하였지만 뒤로 내려오면서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양반계급이 형성되어 양반이라 불리어 오게 된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중인, 양민, 천민 등 조선시대 계급의 특성에 대한 사실을 얘기하며 이날 강학의 주제인 관직은 양반 이외의 계층과는 전혀 상관이 없던 것이었음을 주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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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선생 14대손인 이원균 박사의 조선시대 관직에 대한 강학
 
먼저 '행·수직'이라함은 품계는 높으나 관직이 낮으면 행직이라 했고 품계는 낮으나 관직이 높으면 수직(守職)이라고 한다. 이 제도가 생긴 이유에 대해 이 박사는 "어떤 관직에 상응하는 품계를 가진 후보자가 없거나, 혹은 품계에 등용하려는 관직 보다 높은거나 낮은 사람을 꼭 어떤 관직에 쓰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 마련한 제도"라고 한다.
 
두번째로 '노인직'의 경우는 수직(壽職)이라고도 하며 매년 정월이 되면 80세 이상의 노인에게 양천을 가릴 것 없이 1계급의 관직을 가자(加資)했다고 한다. '가자'란 정3품 통정대부(당상관 벼슬인 정3품의 벼슬) 이상의 품계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노인직은 국가가 노인에게 베푸는 은전의 의미가 있다.
 
세번째 '음직'이라 함은 공신 또는 현직 당상관의 자손을 과거에 의하지 않고 문음(공적이 있는 가문)으로 채용해 임명하던 벼슬과 생원·진사·유학으로서 하는 벼슬을 통칭한다.
 
마지막으로 '증직'은 종2품 이상 벼슬아치의 부친, 조부, 증조부 또는 충신, 효자 및 학행이 높은 사람이 죽은 뒤에 관직과 품계를 추증(追贈)하던 벼슬을 의미한다.
 
이원균 박사의 강연의 통해 조선시대 양반사회가 누릴 수 있었던 특권들에 대해 되짚어 보는 앎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이날 강학과 종친회가 열린 동곽재는 조선 후기의 문신 동곽 김기찬 선생께서 후학을 양성하던 강학지소()였다. 동곽 김기찬 선생께서는 1777년(정조 1년) 문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박사전적을 거쳐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의성김씨 문충공파 혈맥의 청렴과 올곧음을 되짚어 보다.
 
사헌부장령은 정사품 관직으로 감찰 업무를 담당했다. 이 관직은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하여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굽히지 않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 대상이 되었다. 또한 직무가 막중한 만큼 승문원, 성균관, 홍문관 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가 등용되었고 이조의 전랑과 함께 전 조선시대의 사족사회의 틀을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헌부장령을 역임하셨던 동곽 김기찬 선생은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과 우애가 출중해 향당에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
 
봉건제도에 반하여 새로운 시대의 개혁을 위해 봉기된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양반과 농민은 대립관계였고 많은 양반가문들이 농민군으로부터 수난을 당했다. 선산동학농민운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성김씨 문충공파 가문의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는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날 종친회에서 동곽 김기찬 선생의 직계후손인 김규석 어르신은 조부로부터 들었던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당시의 일화를 얘기해 주셨다. 의성김씨 문충공파 일족은 교동에 위치해 살았다고 하며 동학농민군들이 선산지역의 유림들을 공격할 당시, 교동의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진사댁이라 불리던 김규석 어르신 조부의 가택을 에워싼채 동학농민군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사실이 있었다고 한다.
 
선산지역의 의성김씨 문충공파는 교동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선생을 베풀어왔던 사실을 알 수가 있었고 다른 문중들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타지역으로 피난을 갔지만 의성김씨 문중은 별 탈없이 지역을 지켰다고 한다.
 
학봉종택 종손이 선산 을미의병에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하지만 아쉽게도 김규석 어르신은 을미의병 당시 안동 학봉종택의 종손이 선산 생곡리에 자금을 전달해 선산 을미의병 봉기를 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다는 사실을 전했고, 동학운동 당시 선산 생곡리에서 충북괴산으로 이주해 간 후손들이 그 사실을 알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해 귀뜸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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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석 어르신의 선산갑오동학농민운동 당시의 옛이야기 
 
한편으로 김규석 어르신은 해평 쌍암고택의 종손인 최열 어르신을 찾아가 을미의병에 대해 두루 사실 관계를 파악해 보기를 권했다.
 
안동지역을 비롯해 선산지역에서도 의성김씨 문충공파 가문이 지역의 역사와 함께 했다는 사실이 가슴 뿌듯하게 느껴진 날이었다.
 
동곽제 선산종친회를 통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솔선수범했던 안동지역 문충공파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산지역 사회에서도 역시 명망과 신뢰가 두터웠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일족을 만나게 되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더한 친근감이 들고, 처음 만난 어르신들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보았을 법한 인물들이 아니었을까하는 신기한 생각도 들었던 의미있는 하루였다.
 
더우기 선산지역의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의병을 취재하는 것이 인연이 되어 평소에 만나뵈지 못했던 문중 어르신들을 많이 만나뵈니 더없이 가슴 뿌듯한 시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닿게 된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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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오신 종친들을 극진히 대접하기 위한 아랫손들의 분주함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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