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더듬다] 기획-선산동학농민전쟁의 역사(4)-지역사회의 터부인가, 철거된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비<한국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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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성 옆 죽림사 옛텃 삼층석탑 앞의 철거된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관련 기념비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최근 구미시 선산읍성 옆 죽림사 옛터 삼층석탑 앞에 놓여진 동학농민전쟁과 을미의병 관련된 5개의 기념비 중 3개의 비가 철거되었다.
 
지난 4월 9일 선산지역 동학농민운동과 관련해 취재하며 알게된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기념 사업회 한명수 회장은 "선산 지역의 친일파 세력의 누군가가 민원을 넣어 비를 없애게 만들었다"며 그 내막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현재 철거된 비는 '총지휘 한문출 선산입성비, 선봉장 한정교 선산입성비'와 박정희 대통령이 1968년도에 쓴 '원심유장' 글귀를 새겨넣은 비 그리고 '한일합방대반대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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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되기 전 선산읍성 앞 죽림사 옛터 삼층석탑 앞 비석들
 
 
한 제보에 의하면 삼층석탑 앞 기념비는 구미시 새마을과 바로처리담당부서 공사감독 공무원이 선산읍과 선산발전협의회로부터 비를 세워도 된다는 말을 듣고 비를 세웠다고 말했지만, 제보자가 확인해 본 바로는 선산읍과 선산발전협의회에서는 비에 대한 허가를 내준적이 없다고 한다.
 
선산읍 관계자에게 문의해 본 결과 선산읍은 구미시 하부기관이며 구미시 새마을과에서 선산읍에 인허가를 받을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기념비를 세울 당시에 정식 절차를 제대로 밟아 비를 세웠는지의 여부를 면밀히 확인해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명수 회장과 선산읍 그리고 선산파출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구미시로부터 준공허가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에 미리 시공된 관계로 민원 제기가 되어 철거 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문출 장군과 한중석 항일투사의 업적에 관련되어서는 선산갑오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 주장하는 자료가 전부인 상황이며 이에 따른 지역민들의 반발도 함께 따르고 있는 실정이다.
 
선산출신의 지역신문 관계자에 따르면 이와 같은 비숫한 사례가 몇년 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선산읍성 낙람루 정문 앞에 갑오동학전쟁선산창의비가 임의로 세워진 것에 대해 선산읍에서 구미시에 확인 요청결과 문화예술담당관실 학예사의 해석으로 비석을 치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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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성 남문 낙남루 앞 비석들
 
선산지역의 한 시민은 "한문출, 한중석 부자의 업적을 찾아 기리기 위한 뜻은 소중하지만 구전과 추정만으로 역사적인 일을 만드는 것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는 일"이라며 우려를 표명했고, 정확한 기록과 사실을 뒷받침 할 만한 확실한 자료를 찾아 국가가 인정 할 수 있는 사실을 밝혀주길 당부했다.
 
선산은 길재, 김숙자, 김종직을 잇는 영남 사림의 맥이 이어져 내려와 기반이 확고한 고장이었다. 이러한 사림적 향촌 세력을 유지하는 데에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고, 향촌 양반들은 대다수가 지주들로서 그들의 경제 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지세 징수 강화와 각종 부세 징수 과정에서 농민들과 대립될 수 밖에 없는 지역적 상황이 있었다.
 
신영우 교수의 2014년도 '1894년 영남의 동학농민군과 동남부 일대의 상황'에 관한 학술논문에 따르면 1894년 10월 하순 동학농민군이 상주 선산을 점거하자 일본군은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즉각 개입을 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부산 삼랑진 물금 밀양 대구 청도 다부원 해평 낙동 태봉 문경의 11개 지역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군용전선도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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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병참기지로 이용되었던 해평 쌍암고택, 동학농민군의 집결지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은 병참로를 따라 행군해가는 일본군의 위용을 알면서도 대일전쟁을 준비했고, 전선을 단절하거나 전신주를 쓰려뜨려 전신망 차단을 목표로 공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과 여러 군현에서 민보군이 결성되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를 수색하자 경상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곧 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향토문화대사전에 따르면 1894년 9월 당시 구미와 가까운 김산(김천)에서는 동학 교주 최시형이 김산의 도집강 편보언에게 기군령을 내려, 편보언은 농민군을 이끌고 상주와 선산을 공략했고, 선산군 해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다고 한다. 또한 편보언은 각처 접주들에게 기군령을 전달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에서 농민군을 무장하고 대기하게 만들었다.
 
김천 지방의 동학 농민군은 경상감사 조병호가 보낸 남영병에 의해 조직이 와해됬고, 9월 26일 선산에서 농민군은 해산되었다.
 
조병호의 남영병은 개령을 거쳐 김천으로 들어왔고 10월 8일 지례에서 농민군 4명이 처형되 김천 일대의 동학 농민군은 패퇴와 함께 기존의 질서가 복구되었다고 한다.
 
이와 연관지어 신 교수의 학술논문에 따르면 일본군의 전신망과 병참망은 11월 초 이후에는 더 이상 위협을 받지 않았다고 하며 경상도의 동남부 군현에서는 경북 북서지방과는 달리 동학농민군이 봉기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명수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한문출 장군의 선산읍성 공격은 11월 초에 이뤄졌다고 하며, 2년 뒤 1896년에는 을미의병도 봉기했다고 전하고 있다.
 
동학의 포접 조직과 인맥으로 구성된 동학농민군은 동학 세력이 미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나타날 수가 없었다.
 
1894년에 연이은 흉작과 폐정으로 인해 동학농민군의 봉기 원인이 되었지만, 민씨정권 체제의 상황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
 
당시 농민항쟁은 관치질서 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수습되어야만 했고 일본군이 내정간섭을 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정부로서는 지방관의 폐정에 항거하던 동학농민군과 농민항쟁은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동학농민군으로 인해 지방 유림과 양반사회는 대혼란을 겪었고 대립의 관계에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로 인해 후대에도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은 지역사회에서 논란 거리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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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평쌍암고택 종손의 허락으로 세워진 갑오동학농민군 집결지 표석
 
조선말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민중봉기에 대한 자료 연구는 동학 측의 자료인가와 관변 측의 자료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기도 하는 맹점이 있다.
 
동학혁명이냐 동학운동이냐 하는 것도 의견이 분분하며 동학농민운동을 가장해 지주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이 자행되었던 암울했던 역사의 뒷모습도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갈등 어린 역사가 1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앙금처럼 남아 후대의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개연성도 충분하다.
 
동학농민전쟁의 후손이 선대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선양사업을 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사실을 확대해석하는 것은 선대의 공을 희석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는 사실이므로 면밀한 자료조사와 함께 지역사회의 이해와 도움을 구해 보다 더 명료한 역사적 진실이 밝혀지길 바래본다.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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