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명언] 친구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다. (아리스토텔레스)<경북한국유통신문자료제공> | 오늘의 명언

선비 0 4,183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는 대략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 시기는 기원전 384/3-367년에 이르는 마케도니아와 칼키아디케에서의 유년기이고, 둘째 시기는 367년으로부터 플라톤죽음에 이르는 348/347년 동안의 플라톤의 아카데이미아에 체재하던 기간이다. 셋째 시기는 348년 혹은 347년에서 335년에 이르는 헤르메이아스(Hermeias)의 초청을 받아 소아시아의 앗소스(Assos)에 갔다가, 다시 그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를 만난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에서 3년간 머무르고, 이어서 필립포스(Philippos) 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선생 노릇을 하며 마케도니아의 펠라 등에 체재할 무렵이다. 끝으로 335년 혹은 334년으로부터 그의 죽음에 이르는 322년까지의 기간인 아테네의 뤼케이온에서의 자신이 세운 학교의 수장(首長)을 맡았던 기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의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데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가 미친 영향사의 크기와 폭은 엄청난 것이다. 17,8세기 무렵까지 유럽과 지중해 연안의 국가들에서의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대부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수용, 전개 및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배적 권위가 상실된 시점에서도 그의 사유는 근대 지성인들의 체계적 학문활동에 중요한 방법론적 역할을 했다.

이미 그리스의 헬레니즘 철학자들은 그의 논리학, 자연철학 그리고 윤리학 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없었다면 헬레니즘 철학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했을 것이다. 헬레니즘 이후 고대 그리스 후기에 와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지속되었다. 그의 저작들은 집중적으로 주해되기 시작했다. 아프로디시아스 출신의 알렉산드로스의 주석, 포르피리오스의 주석, 심플리키오스의 주석 등이 그 중에서 두드러진다. 로마인들에 의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물론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이 다각도로 논의되었다. 로마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엄밀하고 지적인 문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에 대한 연구를 열정적으로 하던 또 다른 무리들은 중세의 이슬람계 철학자들이었다. 페르시아의 아비켄나(Avicenna)와 아베로에스(Averroes) 등이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들이다. 그리고 이중 아베로에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연구했다는 독특함을 갖는다. 그리고 이후의 영향력 있는 주석가로는 유대인 연구자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가 있다.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의 유대적 사유에서도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교부철학 및 그리스도교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서양의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6세기의 보에티우스(Boethius)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중개자의 역할을 했다. 특히 라틴 중세 11,12세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었으며, 이슬람 문화를 통해 매개된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영향이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그리고 희랍어에서 라틴어로의 수많은 번역서들이 라틴 유럽 세계로 밀려들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13세기 그리스도교 세계에 아리스토텔레스 르네상스가 일어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르네상스의 정점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위대함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다시 한번 증명이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학문적 논증 과정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방법적 기초로 사용함으로써 스콜라 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색채를 강하게 심어놓았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베이컨에 의해 사변적 철학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 손상을 입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근대인들에게도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경험주의적 색채, 상식에의 호소, 논리적 분석의 정신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생애 연보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동부 스타게이로스(Stageiros)에서 태어났다.

384/3-367년 마케도니아와 칼키아디케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367-348/347년 플라톤의 아카데이미아에 체재했다.

348년 혹은 347년-335년 헤르메이아스(Hermeias)의 초청을 받아 소아시아의 앗소스(Assos)에 머물렀다. 그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Theophrastos)를 만난 레스보스 섬의 뮈틸레네(Mytilene)에서 3년간 머물렀고, 필립포스(Philippos) 왕의 초청을 받아들여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선생 노릇을 하며 마케도니아의 펠라(Pella) 등에 체재하였다.

335년 혹은 334년-322년 아테네의 뤼케이온에서의 자신이 세운 학교의 수장(首長)을 맡았다.

322년 에우보이아(Euboia)의 칼키스(Chalkis)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년기를 접어두고, 대체적으로 그의 학적 편력의 시기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초기는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중기에 접어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탐구 방법을 따르면서, 생물학에 관련된 작품들을 주로 이 시기에 저술했다. 그는 355년에 아테네로 돌아왔다. 두 번째 아테네 체재 기간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심리학적이면서 생물학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작품을 저술하였으며, 또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

현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위작(僞作)일지도 모르는 작품을 포함하여 46권 정도(옥스포드 간행의 수정 번역본, 쪽수로는 2383쪽; 벡커판 쪽수로는 1462쪽)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그의 전체 저작 가운데 20-50% 가량만을 차지한다고 한다. 한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약 550권에 달하는 146개의 저서 목록 이름들을 전해주고 있다. 이만한 숫자라면 아마도 오늘날의 책의 쪽수로는 약 6천 쪽에 해당할 것이다.
 
출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역시 서울대학교는 학술적입니다. 읽는이로 하여금 딱딱함을 느끼게하여 깊게 몰입을 못하게 하는 특징이 있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릴적의 기억은 만화 위인전기에서 보았던 내용중에 나라에 침입한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태양빛을 한 곳으로 집중 시켜 적 배들을 태워 물리친 일화들하며 수학 문제를 흙바닥에 푸는데 몰두한 나머지 적군 병사가 쳐들어 온지도 모르고 적군 병사에게 문제 푸는데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가 어이없게 죽임을 당한 일화들인데 너무 허무한 죽음을 맞이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느끼기에는 늘 학문에 몰입한 훌륭한 학자의 자세가 엿보입니다.<김샘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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