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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도시의 역사는 건물과 시설에만 남아 있지 않다. 사람들이 함께 쌓아 온 기억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 기존의 틀을 넘어 변화를 이끈 인물들의 발자취에도 도시의 역사가 담겨 있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의 랭커스터 파크(Lancaster Park)와 이 도시 최초의 여성 시장 비키 백(Vicki Buck)의 이야기는 도시의 유산과 변화가 어떻게 지역사회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지 보여준다.
1881년 10월 15일 처음 행사가 열린 랭커스터 파크는 1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크라이스트처치의 대표적인 스포츠·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첫 행사는 크리켓 경기가 아니라 육상 경기였다. 이후 크리켓과 럭비, 축구, 테니스, 자전거 경기 등 다양한 스포츠가 펼쳐졌으며, 열기구 시연과 축제 등 이색적인 행사도 열렸다. 이곳은 단순히 경기를 관람하는 장소를 넘어 시민들이 함께 모여 기쁨과 추억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랭커스터 파크의 역사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1912년 재정 위기로 부지가 분할 매각될 위기에 놓이자 지역 주민들은 꽃 축제(Floral Fete)를 열어 부채를 갚기 위한 자금을 마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는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 경기장 일부를 감자밭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경기장을 지키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후 경기장은 1998년 제이드 스타디움(Jade Stadium), 2007년 AMI 스타디움(AMI Stadium)으로 이름이 바뀌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2011년 2월 22일 발생한 강진으로 경기장이 심각하게 손상되면서 오랜 스포츠 역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철거 결정은 2017년 내려졌으며, 2018년 시작된 철거 작업은 2019년 10월 마무리됐다.
그렇다고 랭커스터 파크의 역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옛 경기장 부지는 스포츠 시설과 녹지 공간으로 재정비됐고, 2022년 6월 지역사회를 위한 공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과거의 경기장은 사라졌지만, 시민들이 모여 운동하고 교류하는 장소라는 본래의 역할은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랭커스터 파크의 역사는 공동체의 공간이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재정 위기에는 주민들이 힘을 모았고, 전쟁 중에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유지할 방법을 찾았다. 지진으로 경기장이 사라진 뒤에도 부지를 지역사회에 필요한 공간으로 되살렸다. 이곳의 역사는 시설의 흥망성쇠를 넘어 시민들이 함께 지켜 온 기억과 변화에 대응하는 공동체의 힘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변화는 물리적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도시의 정치와 행정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도전이 이어졌다.
1989년 10월 14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비키 백은 크라이스트처치 역사상 최초의 여성 시장으로 당선됐다. 당시 34세였던 그는 이미 19세에 뉴질랜드 최연소 시의원으로 선출돼 지방정치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여성의 정치 참여가 오늘날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던 시기에 시장직에 오른 그의 당선은 지역 정치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뉴질랜드에서는 지방정부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방행정 체계가 재편되는 가운데 새로운 행정 운영 방식과 지역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조율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백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시장으로서 시정을 이끌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힌 의회에서 의견을 조정하고 행정의 방향을 잡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그는 1989년부터 1998년까지 세 차례 시장으로 선출돼 재임했다. 시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지역정치와의 인연을 이어 갔으며, 2013년 시의회에 복귀해 부시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2016년에도 시의원으로 선출됐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최초의 여성 시장이라는 기록을 넘어 기존의 관행에 도전하고 지역행정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랭커스터 파크와 비키 백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크라이스트처치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나는 시민들이 함께 지켜 온 공간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와 행정의 경계를 넓힌 인물의 도전이다. 두 사례는 도시의 발전이 시설을 보존하는 일이나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변화에 대응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도시의 가치는 오래된 시설이나 역사적 기록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려움 속에서도 공동체의 공간을 지키려는 노력,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려는 용기, 그리고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도시의 미래를 만들어 간다. 크라이스트처치의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선택을 성찰하며 내일의 변화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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