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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네덜란드 레이던(Leiden) 베르엘트뮤지엄 레이던(Wereldmuseum Leiden)을 둘러보다 보면 뜻밖의 순간에 고국의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수많은 세계의 문화유산 사이에서 유독 시선을 붙잡는 한 점의 유물. 바로 조선 후기 한국 장교가 입었던 붉은색 군복과 투구다.
박물관은 이 유물을 19세기 후반 한국군이 서양식 체제로 변화하던 시기에 사용된 한국 장교의 복장과 투구로 소개하고 있다. 선명한 붉은 양모와 푸른 비단, 그리고 금속 비늘이 어우러진 모습은 강렬하면서도 정교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례가 많지 않은 데다 보존 상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유리 진열장 너머에 놓인 갑옷을 바라보는 순간, 유물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움직이는 듯했다. 한때 누군가의 몸을 감싸고 나라를 지키는 상징이었을 갑옷이 이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네덜란드에서 한국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붉은색은 강렬했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붉은 빛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조선의 군사문화와 장인의 손길, 그리고 급변하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흔적이 함께 담겨 있는 듯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이 유물이 한국 안이 아니라 네덜란드에서 한국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국의 박물관에 보존된 한국의 유물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곳에서 문득 뉴질랜드의 문화유산을 떠올리게 된다. 뉴질랜드 역시 마오리의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의복을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웰링턴의 테 파파(Te Papa)와 같은 박물관에서는 유물을 단순히 오래된 물건으로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화적 맥락을 함께 전달한다.
문화유산은 과거의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왔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그릇이다. 갑옷 한 벌, 의복 한 점, 생활용품 하나에도 한 시대의 기술과 가치관,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그렇기에 문화유산을 보존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오래 보관하는 일이 아니다. 그 유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국경을 넘어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소개하는 일이기도 하다.
레이던(Leiden)에서 만난 조선의 갑옷은 그래서 더욱 특별했다. 조선의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네덜란드라는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었다. 한때 전장을 향했을 갑옷이 이제는 세계인을 향해 한국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류가 음악과 영화, 음식과 패션을 통해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면, 이러한 문화유산은 훨씬 긴 시간의 깊이에서 한국을 이야기한다. K-pop이 오늘의 한국을 보여준다면, 박물관 속 한 점의 유물은 우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해외에서 우리 유물을 만나는 경험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준다.
문화는 국경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 작은 유물 하나가 먼 나라의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계와 공유되는 인류의 기억이 된다.
레이던의 박물관에서 만난 붉은 갑옷은 그렇게 백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오늘의 우리 앞에 서 있었다. 그 붉은 빛은 이제 장군의 기상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한 시대의 역사와 장인정신, 그리고 한 나라의 문화가 시간과 국경을 넘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고 있었다.
유산을 지킨다는 것은 과거를 박제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와 대화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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