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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뉴질랜드 캔터베리 지역의 옛 신문 기사 속에 박제된 흑백 사진들은 기다림이라는 행위가 지닌 시대적 무게를 새삼 일깨워 준다.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그 시절, 캔터베리 사람들에게 줄을 서는 행위는 단순히 차례를 기다리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 사회적 질서이자 열정의 표현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풍경이 동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기억 속 '줄 서기'와 묘하게 겹치면서도, 각기 다른 사회적 맥락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1년 6월, 랭카스터 파크(Lancaster Park) 담벼락에 기대앉아 캔터베리(Canterbury)와 브리티시 라이온즈(British Lions)의 럭비 경기를 기다리던 청년들의 모습은 한국의 뜨거운 스포츠 열기나 명절 귀성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뉴질랜드인들이 국가적 자부심인 럭비 경기의 좋은 좌석을 선점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는 인내를 발휘했다면, 비슷한 시기 한국인들은 서울역 광장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완행열차표 한 장을 손에 넣기 위해 며칠간의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에게 이 기다림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일종의 신성한 통과의례와도 같았다.
생존을 위한 기다림의 순간에는 더욱 처절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1970년대 후반 연료 부족 사태로 서비스 스테이션 앞에 길게 늘어선 캔터베리의 차량 행렬은 전 세계를 휩쓴 오일 쇼크의 파고를 그대로 보여준다.
같은 시기 한국 역시 석유와 연탄, 심지어 쌀을 배급받기 위해 끝없는 줄을 서야 했다. 특히 1974년 카쉘 스트리트에서 단 50개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모여든 426명의 여성의 모습은,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격랑 속에서 더 나은 삶을 갈망하며 구로공단과 평화시장 앞으로 모여들었던 한국 청년들의 절박한 눈빛과 궤를 같이한다.
뉴질랜드의 기다림이 비교적 시스템 안에서의 안정적인 인내였다면, 한국의 기다림은 생존을 향한 처절하고도 역동적인 투쟁에 가까웠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작가 데이비드 앤드류스는 줄 서기가 프랑스 혁명의 '평등' 정신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민주적 약속임을 강조한다. 캔터베리 시민들이 긴 줄 속에서도 질서를 유지했던 것은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이 '평등한 기다림'의 시간을 효율성으로 극복하며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를 꽃피웠다. 정적인 기다림을 견디기보다 기술적 혁신을 통해 그 시간을 단축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뉴질랜드가 기다림의 과정 자체에서 사회적 가치를 찾았다면, 한국은 그 기다림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세계에서 가장 빠른 행정 및 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길을 걸어왔다.
오늘날 두 나라 모두에서 이러한 물리적 줄 서기는 스마트폰 예약과 비대면 시스템으로 대체되어 점차 사라져가는 풍경이 되었다. 캔터베리 거리의 긴 행렬도, 서울역의 북새통도 이제는 박물관의 사진첩 속에서나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길고 지루했던 줄 속에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닌 타인에 대한 존중과 삶을 향한 진지한 태도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다. 효율성이라는 이름 아래 사라진 그 시절의 기다림은, 사실 우리가 원하는 가치를 얻기 위해 기꺼이 지불했던 가장 정직한 비용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문 지면 속 낡은 사진들은 오늘날의 편리함이 과거 선대들이 묵묵히 견뎌낸 인내와 기다림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임을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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