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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박춘태(교육학 박사)는 대학교 국제교류처장 및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뉴질랜드에서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박물관 유리관 너머의 삼국시대 금관이나 고려청자를 바라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경건함을 느낀다. 오랜 세월 보존된 유물은 역사를 특별하고 엄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왕조의 흥망성쇠, 외세의 침략, 위대한 인물들의 업적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가 우리가 배워온 역사의 중심을 이루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뉴질랜드의 역사학자 조크 필립스(Jock Phillips)가 보여주는 역사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는 뉴질랜드의 역사를 다양한 유물과 물건을 통해 풀어낸다. 그 목록에는 역사적 전환점을 보여주는 물건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일상의 물건들도 등장한다.
18세기 마오리 사회의 생활을 보여주는 도구에서부터 사회적 갈등과 변화를 상징하는 물건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물건이 한 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왕과 영웅, 전쟁과 정치의 기록에만 가두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찾아내는 방식이다.
뉴질랜드의 공식 온라인 백과사전인 ‘테 아라(Te Ara)’의 기획에도 참여한 필립스가 보여주는 역사관의 중요한 특징은 역사의 일상성이다. 역사란 박물관이나 교과서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공간과 사용했던 물건 속에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시선은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만약 ‘100개의 물건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만든다면 무엇을 넣을 수 있을까. 국보나 보물 같은 문화유산만이 아니라 1970년대 봉제공장의 손때 묻은 미싱,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장롱 속에서 꺼내 들었던 아기의 돌반지,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상징하는 응원 티셔츠, 그리고 코로나19 시대 우리의 얼굴을 가렸던 마스크도 그 목록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물건들은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땀과 눈물, 희망과 불안, 기쁨과 기억이 담겨 있다. 한 시대를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물건 하나가 역사책의 몇 페이지보다 더 생생한 기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역사 대중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역사 인식은 왕과 영웅, 국가적 사건과 같은 거대한 서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역사는 중요하다. 하지만 역사의 또 다른 얼굴인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함께 바라볼 때 역사는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역사가의 역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정답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기억 속에서 역사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내가 사용했던 물건, 부모님이 간직했던 물건, 한 시대를 상징했던 작은 물건 하나가 모두 역사의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의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역사를 박물관의 유리관 안에만 가두지 않고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내리는 시선이다.
역사는 금빛 왕관과 귀중한 문화재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미싱에도, 오래된 사진 속의 티셔츠에도, 서랍 깊숙이 간직된 작은 물건에도 한 시대의 삶이 깃들어 있다.
어쩌면 역사는 우리가 멀리서 경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일상의 물건을 통해 언제든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오래된 친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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