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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독립운동사적지 답사에 나선 교육생 어르신들 제일 왼쪽은 지난해 제45기 자연관찰지도자 교육을 함께 받았던 장재근 회장님 |
(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22일 오전 9시 30분 구미시 임은동에 위치한 왕산허위선생기념관에서는 경북 정체성 선양사업의 일환인 『경북 독립운동사 바로 알기』구미 교육에서 3주차 일정인 '김천 구미의 독립운동사적 답사'를 목적으로 하루 교육 일정에 나섰다.
교육생들은 첫번째 경유지인 임은동에 위치한 왕산허위선생 생가터를 시작으로 인동동락공원내 순국의사 장진홍선생 동상 및 호국기림터를 답사한 뒤 금오산 자락 금오지 백운교 옆에 위치한 박희광 애국지사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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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허위선생 생가터 구미시 임은동에 위치해 있으며 왕산허위선생의 일대기와 동상이 있으며 주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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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큰 줄기는 왕산허위선생께서 항일 의병활동을 한 행선지를 따라 그 흔적을 더듬어 보며 옛 일을 기리는 의미도 있었지만, 외에도 구미와 김천에서 배출한 독립운동가와 의병항쟁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아우를 수 있는 차원으로 답사는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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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의사 장진홍 선생 조1927년 10월 조선은행 대구지부에 폭탄을 안겨 줬고 이로 말미암아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옥고를 치루며 1930년 7월 스스로 자결하셨다. 이 후 장진홍 의사의 아들인 장형옥씨는 경북 왜관에서 국가와 민족의 무관심 속에 극심한 가난과 싸우며 힘겹게 살아왔다고 한다. |
현장 강사로 나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한준호 학예연구원의 김천 구미지역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답사 현장의 이해도는 더욱 가슴에 와닿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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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의 자랑 박희광 애국지사 대한통의부 5중대원으로 친일파 처단에 용맹하게 앞장선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차남인 박정용 박희광 애국지사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의 오랜 노력으로 고인의 공이 구미지역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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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 12시 김천시 교동에 위치한 연화지에 도착한 교육생 일행은 다술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인근 김천향교에 들러 김산의병 창의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서려있는 사적지의 옛 일을 둘러 보게 되었다. 김산은 김천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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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생들의 단체 기념 촬영 대교육생들은 젊은 새댁을 비롯해 팔순이 넘으신 어르신들 등 다양한 구성을 보인다. 기자의 고등학교 시절 교장이셨던 김종승 교장 선생님도 함께 교육생으로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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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병은 1896년 1월 여영소, 여중령을 비롯한 김천 유생들이 김산향교에 모여 통문을 띄우고 의병을 계획 한 뒤 동년 3월 24일에 봉기하게 되었다.
당시 상주의 이기찬, 선산의 허위 등이 의병을 이끌고 김천으로 들어와 여영소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와 연합해 김산의병을 결성했다고 한다.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한 김산의병은 봉기 3일 뒤인 25일 김산향교를 출발해 대구부로 진격했고, 3월 26일 김천 지례에 이르렀으나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과 치열하게 맞섰으나 전투 경험의 부재와 무기의 열악함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3월 29일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흩어진 김산의병은 동년 4월 7일 김천 직지사에서 다시 의병을 창의해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한준호 학예연구원에 따르면 경북 일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로 이주하기 위해 반드시 거친 경로가 바로 김천이었다고 전했다. 만주에서 활동한 대다수 경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은 교통의 요지인 김천에서 출발해 만주로 이어진다.
일제치하에서 암울했던 우리나라와 민족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바친 선현들의 발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장을 답사함으로서 옛적의 비장했던 애국지사들의 마음을 십분의 일이나마 느껴 볼 수 있던 시간이 되었다.
오는 6월 12일 경북 독립운동사 바로 알기 6주차 마지막 교육으로 '청송, 안동지여 사적지 탐방'에 나설 예정이며 임청각, 이육사 생가, 진보의진 결성을 비롯해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방문함으로서 경북독립운동이 한국역사에 남긴 큰 발자취를 더듬어 확인하게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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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내에 있는 포월당김봉률화상행적비 김봉률선생(1897. 6.23 / 1949. 5.11)은 경남 합천(陜川) 출신으로 1919년 3월 합천 해인사(海印寺)를 비롯한 경남 지역의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내로 돌아와 문경 일대를 무대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경상도·충청도 일대의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경, 문경(聞慶) 금룡사(金龍寺)로 잠입하였으나 주지의 밀고로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21년 5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보훈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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