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명소탐방] 칠곡군 839고지 탈환전 유학산 전투 현장과 다부동전적기념관을 가다. <한국유통신문.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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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한국유통신문) 김도형 기자= 우리는 '똘이장군'과 '배달의 기수'로부터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다.
 
어릴적에 주말이면 어김없이 방송되던 '배달의 기수'는 6.25사변 당시 공산당과 용감히 맞서 싸운 국군용사들의 무용담을 보여줬고, 어린 마음에 국군과 북한괴뢰군이 치열하게 벌였던 싸움은 마치 선과 악의 처절한 투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또한 80년대 초반, 북한 괴뢰군의 총수인 김일성을 큰 돼지로 묘사해 '날아차기'로 멋지게 맞서 싸웠던 똘이장군의 그 강렬했던 이미지와 노래는 여전히 가슴 속에 흥분으로 남아있다.
 
당시 '배달의 기수' 방송에 나온 국군은 모두가 듬직하며 미남이었고 괴뢰군은 모두가 악랄하고 웬지 '찌질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묘사된체 8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남아있다.
 
80년대 중반 중학교 시절에는 북한 귀순 용사의 강연과 함께 '반공 어린이 이승복'에 대한 영화를 접하게 되었고, 극악무도한 북한군의 만행에 몸소리를 칠 정도로 영화는 리얼했다. 예로, 돌로 이승복 어린이의 몸을 짓이기는 처참한 영화의 장면은 당시의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더 무서웠고 잔인했다. 
 
한편으로는 과연  우리가 그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순간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품게 하기도 했다.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추억이 있다.
 
영화와 더불어 강연을 온 귀순 용사는 다름 아닌 지난 1983년 2월에 미그19기를 몰고 와 한 때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전쟁이 났다고 호들갑을 떨게 만든 이웅평 대위였고, 미그기란 전투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이웅평 대위는 당시 강연에서 "우리 국군의 전투기가 미사일을 발사하게 되면 100km 밖에서 북한군 전투기가 뜨자마자 격추 될 수 있다."며 힘차게 얘기해, 강연을 듣던 학생들 모두가 박수를 크게 치며 열광하게 할 정도로 흥미롭게 얘기 전했고 우리의 애국심을 들끓게 만들기도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의 반공교육은 그랬다. 잔악무도한 북한군의 단면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줌으로서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증오심만을 키워만 준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14일 일요일 정오무렵, 인동의 동락공원에서 행사가 끝난 뒤 평소에 갈려고 마음을 먹었던 인근의 유학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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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은 해발 839m인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다.
 
구미 동락공원에서 가까운 칠곡군 석적을 지나 10여분 가량 올라가면 유학산장을 만나게 된다. 막다른 길에 위치했을거라 생각했던 유학산장은 알고보니 가산IC로 가는 길목이었고, 칠곡에서도 유학산을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
 
이곳에 도착해 보니, 어릴적에 배달의 기수라던가 반공영화를 통해 알려졌던 유학산 전투 현장이 바로 이곳라는 사실을 새삼 깨닿게 되었다.
 
유학산 839고지 탈환전
 
유학산 839고지는 북고남서의 특징이 뚜렷하고 6.25전댕 당시 다부동을 남북으로 5호, 25호 도로를 제압하여 대구를 공격하는데 가장 유리한 다부동 격전장의 제 1요지였다.
 
이 고지의 방어부대는 제1사단 12연대 1대대와 3대대, 그리고 11연대 3대대로 구성되었고, 1950년 낙정리에서 낙동강을 도하한 후 지연전을 하면서 이곳에 방어선을 형성한 것은 8월 12일 경이었다고 한다. 최고로 무더운 여름날,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사투를 벌였던 곳.
 
적군은 제15사단 2개연대가 공격에 가담했고, 8월 30일 이곳 진지를 미국 제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아군 제1사단 본대와 함께 영천 방면 전투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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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부터 미 제1기병사단이 이 지역을 방어하다가 북괴군의 총공세에 밀려 660고지(도덕산) 일대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나, 9월 16일 유엔군의 총 반격으로 미 제1기병사단과 아군 제1사단이 이 지역을 점령하고 적군을 소탕한 후 9월 24일 북진을 함으로서 처절했던 유학산 전투는 종결되었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벌어진 전투는 주야간 9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로 아군은 약 600여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칠곡군 일대는 낙동강 방어전투로 아군 1만여명과 적군 1만 7천여명 그리고 유엔군 약 3천여명이 희생되었던 전쟁의 아픈 역사가 흔적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무더운 여름날, 매순간 생과 사가 오락가락하는 유학산 일대를 오르내리며 피와 살이 터져나가고 고통에 몸부림치며 눈물 한방울 제대로 흘릴 겨를도 없이 처절하게 죽어갔을 아비규환의 생지옥과 같은 현장.
 
지금은 푸르게 잘 자란 수목이 유학산의 슬픈 과거를 감춰주듯 아담한 산으로 자리잡았고, 이곳 표지판에는 '유학산 6.25격전지 순례탐사로'를 알리며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모우고 있다.
 
유학산장 옆 한켠 그늘에서 편안한 자세로 낮잠을 자고 있는 개의 모습이 참으로 세상 근심걱정없이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개집 옆을 지나 유학산 정상 향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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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장에서 한달음에 올라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보이는 유학산 정상이었지만 올라가는 길은 의외로 험란했다.
 
곳곳이 살육전이 벌어졌던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흙속에 파묻힌 6.25당시의 흔적들을 볼 수 있을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은 경치를 발아래 두고 즐겁게 산을 다니는 요즘에서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날의 슬픔과 아픔들, 누구를 위한 싸움이었는지 알겨를도 없이 맥없이 죽어간 전사들의 영혼은 너무나 한이 맺혀 남아 있을 법한 곳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상명하복의 군대는 전쟁터에서 적으로 만난 상대에 대해서는 한치의 관용도 없이 죽여만 하는 필연적인 의무가 있다.
 
왜 전쟁을 해야되고 왜 죽여야만 하는지 깊은 의미를 둘 필요가 없이, 오로지 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가 죽지 않기 위해서 무참한 살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이 세상 최악의 장소를 난 올라갔다.
 
만약 내가 그날의 현장에 있었더라면, 나 또한 살기 위해 적을 죽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주변을 돌아 볼 겨를도 없었지 않았을까.
 
늘 영화에서는 비장한 음악과 함께 전우애로 똘똘 뭉쳐진 멋진 장면들이 보여지지만, 과연 실제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나 아닌 타인을 위해 목숨을 걸었을지를 생각해 보게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사람의 목숨 가치가 탄알 하나보다 못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 만들어 지는 처참한 곳이 바로 전쟁터인 이유로 전쟁터는 미화해서는 안될 곳이다.
 
해방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이득으로 전리품을 얻기 위한 일환으로 우리나라를 38선 절반으로 갈라놓았고, 지정학적 요충지인 우리나라를 차지하고자 하는 강대국들의 열망으로 인해 해방된지 5년이 지나지 않아 전쟁이 발발했다.
 
한 역사학자는 "타국의 이익을 위해 전쟁을 치루는 나라는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는 것이 국가다"라며 얘기한다.
 
태평양 전쟁의 역사에서 보듯이 많은 참전국이 있었지만 연합군에 가담했던 수많은 나라 중 강대국들만이 승전국으로서의 지위에 올라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회담과 회의를 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을 나누기 위한 국가간에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인간의 추악한 욕심을 그대로 보여준다. 역사를 살펴보면 아무런 이득이 없이 전쟁에 뛰어든 나라는 전무하며 생목숨을 그대로 갖다 받칠 미련한 나라 또한 없다.
 
과연 자신의 일이 아닌 다음에야 그 누가 생목숨이 오가는 전쟁터에 참가 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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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유학산  839고지를 알리며 또한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 있다.
 
55일 동안 9번 주인이 바뀌며 수많은 주검들을 수습했던 이곳은 지금은 팔각정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내려 오는 길은 더욱 가파른 암벽지대였고, 암석들 군데군데에 행여나 6.25당시에 총탄으로 패여진 흔적이 있지나 않을까 유심히 살펴보며 내려갔다. 가파른 유학산 일대의 군데군데에 매복해 올라오는 적들을 순식간에 몰살 시켰을 지도 모를 장소도 지나쳐 보며, 깊은 골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산에서 총격전을 벌였을 상황도 떠올려 보게 된다. 행여나 저격병이 숨어서 사격했을지도 모를 무시무시한 산비탈을 사람들은 어떤 심경으로 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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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전우를 뒤로 한채 분노와 살기어린 눈빛으로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이성을 잃은채 백병전을 벌였을 유학산 일대.
 
전쟁은 인간이 인간이기를 거부한 최악의 상황이다.
 
2시간이 채 안되어 유학산장에서 유학산 정상을 올라 내려왔다. 내려 오는 길에 만난  도봉사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경건한 염불 외는 소리와 청명히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는 유학산에 서린 원혼을 달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들게 한다.
 
유학산은 여느 산과는 다르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이슬로 허무히 사라진 곳인지라, 이곳의 산길은 등산로가 아닌 순례의 길이라 함이 옳을 듯 싶고 가슴 무겁게 만든다.
 
산에서 내려와 유학산장에서 가까운 가산 IC 방면으로 향했다. 유학산 일대를 둘러보고 나니 문득 가산 IC부근의 다부동전적기념관이 떠올랐고, 6.25전쟁이 발발한 이유를 다시 한 번 되짚고 싶었다.
 
선량한 우리 민족이 전쟁의 화마에 휩싸이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서 부터 기인한 것일까.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재된 갈등이 응축되어 어느 시점에 폭발하게 되는 것이 전쟁이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잔인한 전쟁으로 인해 도리어 진보하고 발전해 왔다.
 
다부동전적기념관을 가득메운 6.25전쟁 당시에 사용된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전투기 더불어 미사일까지 그 위용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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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상을 위해 만들어 낸 인류 최악의 무기들을 멋있게 바라봐야만 하는 무서운 현실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6.25 전쟁 상황을 사진과 함께 잘 전시해 놓았다. 3년 1개월간 작은 한반도에서 전 세계의 남아도는 모든 무기들이 투입된 듯한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될 그 참혹한 시대의 아픔이 잘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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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전적기념관은 6.25전쟁을 기념하는 곳이 아니라, 또다시 일어나서는 안될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만들어 진 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전적기념관은 어린학생과 청소년들에게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제대로 인식시켜 평화주의자로서의 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으로서 활용되야만 한다. 따라서 전적기념관은 단순히 무기만 전시해 놓는 공간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만들어내지 않은 외국의 무기들이 왜 우리나라 이 땅에 버젓이 놓여져 전시되어야만 했을까. 그 아픈 과거에 대한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만 또다시 이러한 비극은 발생되지 않으리라.
 
6.25 사변은 왜 일어났을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가설은 스탈린 주도설과 한미공모설 그리고 내란확전설 등 요인이 많다.
 
역사의 주체를 어디에 둘 것인가에 따라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북한은 인민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남한은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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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주도설에 따르면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이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고 중국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해 발발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한미공모설에 의하면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고도 한다. 실제로 2010년 6월에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는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에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낮게 평가한 보고서가 작성된 기록이 있다. 당시 북한은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서 독자적인 전쟁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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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여러 번의 전투가 있었으며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6월 24일까지 벌어졌던 전투횟수는 총 874회였다고 한다. 큰 사건으로는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10월 19일에 일어난 여수·순천 사건 그리고 1949년 12월 24일에 일어난 문경 양민학살 사건이 있었고 큰 전쟁을 치루기 전의 혼란스러웠던 국내 사정을 보여준다.
 
더불어 내란 확전설은 6.25 사변에 얽혀 있는 강대국간의 알력싸움을 다시금 깨닿게 해준다.
 
내란 확전설에 따르면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시기별로 전쟁의 종류가 부분적으로 나뉘는 내란확전설은, 작은 전쟁인 6월 25일 이전 우리나라는 38선 부근에서 국지전이 계속 있어왔고, 제한 전쟁으로서 1950년 6월 25일부터 동년 7월 1일까지 북한은 대규모 무력 동원으로 서울을 전격 침탈해 통일 정부를 수립, 전면전쟁은 1950년 7월 1일 부터 동년 10월까지였다.
 
또한 1950년 10월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1951년 6월 압록강까지 진격한 확대전쟁으로 분류된다.
 
이때까지는 소련과 미국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1951년 6월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으로 고착전쟁이 되어 새로운 양상을 띄게 되었고 연합군의 총공세에 공산 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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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들은 북한을 중심으로 6.25사변을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더불어 미국 등 UN연합군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6.25전쟁 당시 교전국이자 자그마한 나라인 남한과 북한에 대해 수많은 국가들이 참전했고 피를 흘렸다.
 
휴전인 상태로 여전히 남아있는 한국 전쟁에 대해 베트남 전쟁 등에 가려 한국전쟁은 세계사에서 잊혀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는 승전국으로서 막대한 이득을 취해갈 수 있겠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 참전국들조차 막대한 피해를 입고 돌아간 것이 한국전쟁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 참전 용사들은 6.25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초토화 되었던 이 땅이 이 만큼 발전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워하기도 한다.
 
그들 또한 젊은 시절, 국익을 위해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의 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바쳤고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이 나라를 떠나갔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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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재를 유지하고 세계평화를 위해 수호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목숨들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과거의 가슴 안타까웠고 피비린내나는 전쟁의 참상을 겪고서도 여전히 우리는 위태로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금 이순간에도 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수출하며 더불어 강대국들로부터 성능좋은 무기를 수입해 오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기를 바라며 한시 바삐 통일이 오기를 기원한다. 
 
  
<한국유통신문 경북지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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