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운파 최관호 선생의 뜨거운 삶, 71주기 추모제에서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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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KTN) 김도형 기자= 17일 오전 11시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239번지에 위치한 쌍암고택 인근 동산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운파 최관호 선생 71주기 추모제가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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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0일자 영남일보에 게재된 기사내용에 따르면 운파 선생은 20대 초반이었던 1925년 구산구락부를 창립해 선산지역 청년운동과 지역사회 진보진영을 이끈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라고 한다.

 

운파 최관호 선생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27년 신간회 선산지회 창립 지원을 비롯해 1929년 만주 북방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사비로 만몽일보를 창간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또 영남일보는 운파 최관호 선생이 1930년 8월에 대구 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장진홍 선생이 옥중에서 자결하자 만몽일보에 ‘민족이여 각성하라’는 사설을 게재해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하지만 '민족이여 각성하라'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는 상태다.

 

영남일보는 운파 선생의 업적에 대해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조직인 신간회가 해산된 1931년도에 경북도내 신문기자들로 결성된 ‘보도협조망’의 선산군 대표로 참여했다는 사실과, 1934년부터 동아일보 선산지국 기자로 활동을 재개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또 운파 선생은 1944년 독립운동가 여운홍, 안재홍, 심산 김창숙 선생과 함께 건국동맹을 결성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다 왜관경찰서에서 옥중 광복을 맞이한 사실이 있다고 한다.

 

한편, 광복 이후 극단적인 좌우이념 대립으로 치닫던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이 발생하자 그 여파로 10월 3일 구미의 박상희 선생을 중심으로 2000여명의 분노한 군민들이 구미경찰서를 공격하는 구미항쟁으로 이어졌다. 해방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 경찰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들끓었고 친일 경찰의 국민들에 탄압 또한 비일비재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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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 당시 모습. 대일 전쟁 패권자인 미군정의 폭정과 남아있는 친일 경찰 세력들의 득세에 분노한 대구시민들의 항쟁이었다.

 

조갑제 닷컴에 실린 박정희 전기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구미시 문화원 부원장 신기도(67)씨가 일제 당시 구미 일대에서 "최관호 김상호 박상희 이 세 사람을 두고 일관호,이상호, 삼상희라고 했다. 이들 세 사람이 모이면 그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사람들은 함 부로 접근할 수도 없었고한다. 그들은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는 젊은 영웅들이었다"라며 운파 최관호 선생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박상희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의 세째 형으로 박정희가 구미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구미역으로 나가 지역언론인으로 자립하며 박정희의 학업을 도와주며 정신적인 기둥이 된 인물이다.

 

구미항쟁 당시 박상희 선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성난 군중들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하는데 애썼지만 결국 군경이 쏜 눈먼 총탄에 비명횡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운파 최관호 선생 역시 구미항쟁 이후 구미지역 진압에 나선 미군정하 군인들에게 강제로 연행돼 10월 16일 구미시 해평면 해평지서 앞 농창(農倉)에서 재판 없이 즉결 처분돼 생을 마감했다. 즉결 처분 1시 간 뒤 당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운파를 즉각 석방하라'는 급전을 보내 처형 집행 정지 명령이 떨어져 운파 선생의 유족들에게 더없는 평생의 안타까움으로 남게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

 

현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김종길 상임대표(운파 생애와 경력 집필)는 운파 최관호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 일제 당시 동아일보에 실렸던 신문기사와 지인들과의 교환된 서신, 사진, 대구 언론연구를 비롯해 10월 구미항쟁 당시의 내용을 취합해 운파 선생의 삶을 재조명한 인물로, 구미 선산지역 근현대사 연구모임 대표를 역임했다.

 

영남일보에 보도된 김종길 상임대표의 증언에 따르면 운파 선생의 투철한 독립정신은 언론계와 대한광복회, 사회활동, 건국동맹활동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재조명되고 있다고 알리고 있다.

  

이날 운파 선생 71주기 추모제에서 김종길 상임대표는 자신이 직접 저술한 '운파 최관호 선생 보론'을 낭독하며, 운파 선생의 감동있는 삶의 여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했다.

 

김종길 상임대표의 보론에 기술된 바에 의하면 운파 선생이 장진홍 의사 의거 후 1930년 8월 중순 '민족이여 각성하라' 사설을 만몽일보에 실었고 동년 9월 최관호와 동지들이 결국 본 기사로 인해 일경에 체포돼 최초 하얼빈에서 기본 조사와 봉천에서 본격적인 혹독한 수사를 견뎌야 했다고 한다.

 

운파 최관호 선생의 보론에는 중국에서 체포된 이후 국내로 송환된 운파 선생이 1930년 12월 25일 신의주경찰서에 도착했다고 하며, 김종길 상임대표는 운파 선생이 송환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 송환된 사례의 예를 들어 유추하도록 설명하고 있다.

 

김종길 상임대표의 운파 최관호 선생의 보론에서는 운파 선생의 행적에 대해 1930년 12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와 1984년 아리랑, 님 웨일즈, 동녘 223쪽을 인용해 알리고 있다.

 

보론 낭독 후 왜관 출신 독립운동가 서구 최춘식 선생의 손녀 최희 여사(10월 항쟁 유족 지원활동가)의 추모사 낭독과 함께 김종길 상임 대표의 추모사로 이날 추모제는 마무리됐다. 

 

이날 김종길 상임대표는 지난 9월 19일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을 크게 확대하기로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운파 최관호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최세훈 유족 대표는 '대통령께 드리는 말씀'이란 제목으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 서신을 통해 "수십 년 가슴에 품어 온 한을 씻고 원통함을 풀고자 용기를 내어 서훈 신청을 하겠 됐다"며 지난 2017년 4월 8일 해평면 노인회 주관으로 치룬 운파 선생 추모제에서 많은 사람들이 애도해 준 사실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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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내용에는 혹독했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부인 운파 선생의 일을 거론하지 못하도록 금기가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친일잔재들의 무고로 존경받던 독립운동가가 졸지에 빨갱이로 몰려 그것도 광복된 조국의 경찰에 의해 재판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며 안타까웠던 과거를 회상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최세훈 유족 대표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과 광복절 경축 기념 식사를 통해 운파 선생의 서훈 신청에 용기를 얻게 된 사연을 담아 "오랜 세월 독재정권하에서 품어왔던 의혹과 불신 그리고 냉소를 거두고 대한민국의 당당한 국민으로 나서고자 한다"며 편지를 통해 간곡한 호소로 문재인 대통령에게 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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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 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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