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25시] 구미시 송산서원 문화유적지 관리 실태, 유서 깊은 성리학의 고장 폐가망신 당할라

김도형 0 1,260

 

옛 역사의 향기는 사라져만 가고,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성리학 본고장의 민낯

청백리 송정 최응룡, 강직한 기술 관료 인재 최현의 정신을 이어 받은 송산서원 폐허로 남아

 

(전국= KTN) 김도형 기자= 경북 구미시 해평면 창림리에 위치한 송산서원의 기원은 1647년(인조 25) 지방유림의 공의로 안렴사공파 9세 송정공 최응룡과 11세 인재공 최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후 위패를 모신 것으로부터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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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의 인재를 키워 낸 조선시대 문화 유적지 송산서당(옛 송산서원) 강당 전경

 

1656년(효종 7) 현재의 위치인 창림리로 옮겨 사액서원으로 확장됐으며 병암 김응기, 신재 김진종, 주천 강유선, 경암 노경임을 추가 배향했다.

 

한국민족백과사전에 따르면 서원의 건립은 본래 향촌 유림들에 의하여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국가가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서원이 지닌 교육 및 향사적(享祀的) 기능이 국가의 인재양성과 교화정책(敎化政策)에 깊이 연관되어, 조정에서 특별히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그에 따른 서적·노비 등을 내린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특전을 부여받은 국가공인의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하며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했다.

 

사액을 받는 경우 조정으로부터 현판과 함께 예관(禮官)이 파견되어 배향인물에 대하여 치제(致祭)하는 특전이 베풀어졌다. 제도적으로 보장된 특전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사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국가에 의한 공인을 의미함으로써 그 서원 및 배향자에 대한 사회적인 권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하여서, 모든 서원이 사액을 받고자 경쟁을 하였으며 이는 그 서원에 출입하는 유생이나 배향자 후손들의 현실적인 사회활동에 배경이 되고 큰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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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서원 옛터에서 바라다보이는 창림저수지 풍경

 

송산서원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으나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송산서당으로 성격이 바뀌여 명맥을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최씨 집안에서는 송정선생과 인재선생 두분만 훼철 후 상당기간 제향했다고 한다


한편, 지금의 송산서원 터에는 동재와 서재 그리고 사당 건물은 없어지고 허물어져 가는 서당 건물만이 덩그라니 흉물로 남아있다. 전주최씨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8년도까지는 서당 출입문인 사주문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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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도 당시까지 확인됐던 송산서당(옛 송산서원) 출입문 사주문(사진 전주최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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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만 무성한 송산서원 강당 전경, 사주문은 온데간데 없다.


현재 남아있는 송산서원 터의 강당은 일제강점기 당시 중건 됐다고 하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협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간을 두었다. 가구는 종량 위에 원형 판대공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오량가 구조이다.

 

방치된지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송산서원 옛터의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 없고 처량하기까지 했다. 송산서원 옛터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에 버젓이 자리잡은 무허가 건물은 지방행정의 사각지대임을 상기시켜주고 있고, 100여미터를 걸어 들어가면서 보이는 폐허의 잔재는 지자체의 문화유적지 관리 실태에 대해 되짚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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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지의 보존할만한 가치의 유무를 논하기 이전에 사라져 가는 옛역사의 흔적을 복원하고 관리하는 것은 유구한 문화역사를 이어온 자긍심 높은 민족으로서의 기본적인 책임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송산서원에 최초로 배향했던 9세 송정공은 청렴한 관료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인물이며 인재공 역시 유능하면서도 강직한 기술 관료로서 후세에 그 이름이 크게 전해졌다.

 

영남인재의 산실인 선산 지역의 현재를 있게 만든 송정공과 인재공의 발자취를 살펴 보았을 때 서원을 다시 복원하여 그 뜻을 길이 전하는 것이 지역의 역사를 보존하는데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팽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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