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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한국포도역사의 산증인 김성순 선생(1)-조선에 우두술을 전파한 사포 김익윤 선생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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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작은 증언

 

구한말 의성지역에 사셨던 이름없는 한 선비 김익윤(1825~1902) 고조 할아버님 무덤에 작은 묘석을 세우고자 합니다.

호는 사포, 자는 덕여라 하셨으니,
첩첩산중 의성 춘산에 나셨으나
넓은 바다를 사모하여
중국에 몇차례 가셔셔 우두술을 배워
팔도에 나귀타고 다니시며 많은 생명을 구하시고,
1896년 의성지역에 일어난
항일의병 싸움에 참여하셨습니다.(당시 71세)

숭례문이 불타고, 백두대간에 뱃길을 내겠다하는 이때에,
‘바다를 사모하는 큰 마음’
‘큰 너, 네가 크다’고 하신
교훈을 되세기며 할아버님 가신지 106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명복을 빕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때 : 2008. 4. 12
곳 : 의성군 춘산면 대사동

2008. 4.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 김성순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958년 김천시 다수동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최초로 포도원을 일군 김성순 선생은 1929년생이다. 한국 근현대 역사 속에서 농민운동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김성순 선생은 살아온 나날만큼이나 근현대사의 뒷이야기를 많이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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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날 김종길 지방분권운동구미본부 상임대표의 소개로 찾아뵌 김성순 선생에 대해, 김 상임대표는 김성순 선생이 한국 포도농사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분이라고 소개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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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생이시고 내년이면 구순인 김성순 선생은 귀가 다소 어두우신 편이지만 연세에 비해 건강하고 정정했다. 1970년 김천시 봉천면에 현 포도농장을 옮긴 김성순 선생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신은 또렷하고 생생히 과거에 경험했던 일들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조근조근히 장시간 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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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 선생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자 격동의 세월을 지내온 살아있는 역사라는 생각을 들게하는 인물로, 사단법인 한국포도회 명예회장이며 지난 2010년도에는 40년간 신봉해오던 기독교 대신 천도교로 개종했다.

 

대구사범학교 심상과(15기)를 졸업한 김성순 선생은 대구 칠성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김성순 선생은 1949년 김구 선생의 ‘남북협상, 단독정부수립반대운동’을 알리기 위해 대구사범대 동기생 친구와 유인물을 돌리다 체포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혼란스러운 정국속에 수감생활을 한 김성순 선생은 이듬해 1심 선고가 나기 전 6.25가 발발했고 당시 대구형무소에는 제주4.3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목포와 보성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말한다.

 

김성순 선생은 대구형무소에 같이 있던 이들 중 30명이 1심 공판도 없이 어느날 웃으며 나간 뒤로 볼 수 가 없었고, 들리는 소문에 거창 가산에서 희생됐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던 안타까운 일을 회상했다. 6.25 당시 대구형무소에 기결수와 미결수 등 8,100명이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들 중 3,700여명이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훗날 경산코발트광산을 찾아가 본 김성순 선생은 인간으로서는 자행할 수 없는 끔찍했던 일로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해 위령제를 가져 억울함을 달래줘야만 한다고 얘기했다.   

 

김성순 선생은 조부께서 변호사를 구해 1951년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연과 함께 출감증명서 하나만 달랑 손에 쥔채 세상으로 나와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얘기를 풀어냈다.   

 

7년간의 공군에서 군생활 후 고향 김천으로 돌아온 김성순 선생은 1958년도 부터 황무지를 개간해 포도농사를 시작했고 한국포도회를 창립해 대한민국 포도농업의 확산에 큰 기여를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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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이 발행한 '씨알의 소리'의 영향을 받은 김성순 선생은 대한민국 농민운동과 더불어 현재 포도회보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더불어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등 진보농민단체에서 활동하며 농민운동을 병행해온 김성순 선생은 1978년 ‘함평고구마사건’ 당시 열흘간 단식을 했고 ‘오원춘 감자사건’으로 안동경찰서에 20일간 구금됐다.

 

지난 10년동안 천도교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있는 김성순 선생은 수운 최재우 선생의 뜻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고조부 사포 김익윤 선생 이야기

 

김종길 상임대표는 우두를 우리나라에 최초로 전파한 분이 사포 김익윤 선생이며 경북 의성 일대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며 김성순 어른의 가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소개했다. 우두술을 최초로 전파한 인물은 지석영 선생으로 알려져 있어 김익윤 선생의 이야기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우두술에 대해 살펴보면, 서양 의학과 의술 가운데 조선 사회에 첫선을 보인 것은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1749∼1823)가 개발한 우두술(牛痘術)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여러 가지 전염병이 만연했고 특히 치명률이 매우 높았던 천연두가 크게 유행했다. 조선에서도 인두술(人痘術)로 천연두를 예방하는 노력을 했지만 사람의 두창을 사용하는 인두술은 소의 두창(우두)을 이용하는 우두술에 비해 부작용이 많았고 효과도 떨어졌다고 한다.

 

서울대 의대 황상익 교수가 저술한 ‘근대 의료의 풍경(푸른역사)’ 책 내용에 따르면 우두술은 조선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 비롯, 서양 이외의 나라에서 서양 의술의 효능을 뚜렷하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동아시아 3국 모두 우두의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을 만든 것이 새로운 의료인 양성 기관의 효시가 된 점이 이를 입증하고 있고, 이와 같은 주장은 철저한 사료 비판과 약 1000장의 사진자료 등 충실한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황 교수는 우두술의 보급 등 한국 근대 의료 역사에서 지석영(1855∼1935)의 위상을 다각적으로 검토하면서도 1876년 개국 무렵 민간에서 우두술을 습득하고 시술한 사람으로 지석영 외에도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 다수의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개국을 전후해 누가 처음으로 우두를 시술했는지 지금까지의 자료로는 단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근대 의료 풍경의 역사에 누락된 인물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우두술과 관련해 새로운 역사적인 인물인 김익윤 선생의 이야기를 살펴 볼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소화 7년(1932년)에 발행된 의성지에 따르면 사포 김익윤 선생이 중국에 세 번 들어가서 우두술을 배워 조선에 전파했다고 기술되어 있고, 한정학 선생과 함께 중국 요양공주소화국에 함께 갔다고 한다.

 

김익윤 선생에 대해 기술한 의성지를 저술한 인물은 바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유상묵 선생이다. 유상묵 선생은 선산군의 박상희 선생, 최관호 선생 등과 함께 신간회에 참여하신 분이고 보도협조망에도 가입, 동아일보에 장문의 글을 기고한 동아일보 기자였다. 의성지는 일제시대 당시 의성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실은 책이다.

 

김성순 선생은 고조부인 사포 선생이 남긴 유일한 서신과 지석영 선생이 사포 선생에게 보낸 서신을 보여주며 의성지의 내용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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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순 선생에 따르면 고조부이신 사포 선생에 대해 어릴적 한약방을 하신 조부께서 우두술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사포 선생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고 한다. 김성순 선생은 역사책에 지석영 선생만이 언급된 점을 이상하게 여기게 됐다며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김성순 선생의 추측에는 지석영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을 하며 학교도 설립하고 해서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지셨으나, 고조부이신 사포 선생은 나귀를 타고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돈있는 사람은 물론 돈 없는 사람들에게 우두를 접종하며 인술을 펼친 까닭에 역사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추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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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선생이 김익윤 선생에게 보낸 편지

 

김성순 선생이 청송군 현서면에 장가를 간 뒤 처가에 계신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으로부터 고조부 사포선생으로부터 우두를 접종받았다는 사실을 얘기 들었다는 사실을 통해 사포 김익윤 선생의 활동 영역은 넓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순 선생이 보여준 의병 당시 동학2년 뒤인 병'신년 1986년 당시 의성의 의병장으로부터 창의대장으로 임명하는 찬핵 서찰에 따르면 김익윤 선생은 동학의병에 참여한 정황이 있다. 찬핵서찰에 찍힌 세개의 큼직한 낙인을 보면 그 당시의 결연함이 느껴진다고 말한 김성순 선생은 조부께서 족보에 넣고 간직해 오시면서도 고조부께서 의병 창의대장 찬핵 서찰을 받은 알려주시지도 않았다고 한다. 김성순 선생은 추측컨대 일제시대 당시 살벌했던 현실에서 일제의 눈에 띠었더라면 궂은 일을 당할까 싶어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며 암울했고 가혹했던 시대적 상황을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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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에서는 11월 2일자로 독립기념관 한준호 학예사에게 김익윤 선생의 행적과 관련해 자료 조사를 부탁했다. 한준호 학예사는 의병활동 행적을 밝히기 위해서는 서찰에 찍힌 직인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가 관건이라고 한다. 덧붙여 한준호 학예사는 "서찰에 직인만 찍혀있다면 의병활동하신 분들이 지금까지 직인을 찍어서 보냈을 때 의병대장이 찍어 보낸 것인지 아닌지 사실관계 확인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익윤 선생의 의병 창의대장 임명장에 찍힌 직인이 의성의진에서 사용된 직인이지의 여부가 확인된다면, 우리나라의 감쳐진 역사의 한 부분이 또다시 세상에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 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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