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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스토리텔링시리즈(1)] 일리천 전투의 영웅, 신궁 김선궁 태양을 쏘다

김도형 0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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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 전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사진 mbc)

 

작품명: 일리천 전투의 영웅, 신궁 김선궁 태양을 쏘다
(넌픽션을 바탕으로 한 상주 사화진 전투를 시작으로 선산.고아 지역 일천리전투 이야기-스토리텔링 작가 김도형)
 
로그라인: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일리천전투의 승리 요인 중 어린장수 김선궁의 용맹함과 활솜씨는 후백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왕건과 처음 만난 김선궁은 활을 꺼내들고 태양 빛이 강렬한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기획의도: 한국전투사에서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대전투현장이었던 일리천전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선산지역의 호족으로 현재까지 구미와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영남학을 활성화 시킨 선산지역의 김숙자, 김종직 등 명문일족의 뿌리가 된 김선궁에 대한 재조명
 
등장인물: 김선(궁), 왕건, 유금, 김훤술
 
시놉시스: 왕건은 20세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송악태수가 됐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출중한 리더십과 비상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 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다.

 

상주 태생인 견훤은 궁예와 함께 세상을 주름잡으며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견훤의 끊임없는 영토확장과 야욕은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드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상주는 고대농경문명의 발상지였고 영웅들이 거쳐간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곳이다. 

 

906년 왕건이 30세 되던 해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맞써 싸워 인근 30여 성을 점령한는 등 큰 전공을 올린다. 상주 사화진 전투는 30년 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장이다.

 

왕건은 후백제군의 숫적 위세를 두려워 하는 부하들에게 강인한 의지를 심어준 영웅으로 상주 사화진 전투를 통해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지도자라는 신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후삼국 통일의 장이 되었던 일리천전투에서 15세의 나이 어린 김선궁 장군 역시 왕건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마음이었고, 전투에서 후백제군의 태양이었던 신검을 쏘아 적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며 승기를 잡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일리천전투 이야기 시작>

 

왕건은 20세 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 송악태수가 됐으며 천부적으로 타고난 출중한 리더십과 비상한 군사적 재능을 타고 나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끈다.

 

상주 태생인 견훤은 궁예와 함께 세상을 주름잡으며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견훤의 끊임없는 영토확장과 야욕은 한반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드넓고 비옥한 땅을 가진 낙동강 유역에 위치한 상주는 고대농경문명의 발상지였고 영웅들이 거쳐간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인 곳이다. 

 

906년 왕건이 30세 되던 해 상주 사화진에서 견훤의 후백제군과 맞써 싸워 인근 30여 성을 점령한는 등 큰 전공을 올린다. 상주 사화진 전투는 30년 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장이다.

 

왕건은 후백제군의 숫적 위세를 두려워 하는 부하들에게 강인한 의지를 심어준 영웅으로 상주 사화진 전투를 통해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지도자라는 신념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서 앞장서서 싸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오랜 세월을 서두르지 않고 용장의 면모를 발휘하며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후 936년, 왕건이 하늘의 명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 후삼국 통일이라는 과업을 달성할 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

 

상주 낙동면에서 흘러내려오는 낙동강 본류 일리천을 경계로 왕건이 지휘하는 고려군 8만7천여명과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끄는 수만명에 달하는 후백제군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강물을 따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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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전투가 벌어진 선산지역 일대 옛지도 사진 출처, 문화콘텐츠진흥원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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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병력 편재, 군사 배치상황

 

청명한 9월의 가을 하늘 아래, 소리 없이 흐르는 낙동강물과 그 위를 유유히 날아가는 새들은 평화롭기만 했으나 강너머로 지는 붉은 해는 일리천 일대 들에서 벌어질 처절한 전투를 예고했다.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온 일리천 일대는 적막감이 감돌았으나 양쪽 진영에는 횃불이 하나 둘씩 강을 밝히기 시작했다.

 

신검은 부하들과 함께 최후의 일전을 다짐하며 날이 밝는 새벽녁에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전략을 세웠고, 고려군에 투항해 적진의 진영서 자신과 싸우려 하고 있는 아버지 견훤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결전을 앞두고 살기등등한 후백제군은 진격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강건너 멀리 고려군 진영에서 날아오는 한 발의 불화살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저렇게 먼거리를 날아오는 불화살이 있다니!”

 

강 멀리서 날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불화살은 신검의 발 아래 떨어졌고 연이어 소나기와 같은 불화살들이 일제히 날아들기 시작해 부하들과 말들은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불화살은 고려군의 공격 신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불화살 공격에 후백제군이 혼란해진 틈을 타, 이윽고 일리천을 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백척의 고려군과 기병을 실은 배들이 다가왔고 기세등등한 살인병기로 알려진 제번경기와 말갈족 기병들은 적진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신검에게 목숨을 위협하는 화살이 어디선가 집요하게 날라들었다. 제대로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어 싸움조차 불가능해진 신검은 관심들에서부터 발검들로 도망자처럼 쫓겨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기선을 제압당해 전투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린 후백제군들은 밤새도록 이어진 처참한 살육전으로 인해 점차 사기를 잃어만 갔고 점차 동이 트기 시작하자 일리천 일대 들판에서 수천명의 후백제군 병사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을 생각하며 살아남기를 간절히 바라며 도망을 치던 후백제 병사들에게 조차 말갈족 용병 기병들의 무자비한 창과 검은 인정을 용납하지 않아 슬픈 일리천 일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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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의 숭산(금오산)은 이들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처럼 후백제군과의 수십년간의 오랜 전투는 일리천전투에서 일방적인 고려군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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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을 교란시킨 단 한 발의 화살로 시작된 일리천 전투의 숨은 영웅은 바로 화살을 쏜 장본인인 15세로 나이 어린 김선궁 장군이었다.

 

김선궁의 활 솜씨와 용맹함을 귀히 여긴 왕건의 지략은 어린장수를 일리천전투의 승기를 잡을 영웅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일리천전투에 앞서 수만명이 넘는 후백제군을 상대하기 위해 왕건의 군사모집 사실을 듣고 찾아온 선산지역 호족 김선(후에 왕건으로부터 김선궁 이름을 얻음)과 해평지역 호족인 김훤술은 왕건의 활약상과 인물됨됨이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낸 왕건은 15세로 나이는 어리지만 총기 넘치는 눈을 가진 김선에게 물었다.

 

"강건너의 기세등등한 수많은 후백제군들을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느냐?"

 

"저는 100보 밖의 날아가는 새의 머리를 맞출 수 있습니다. 적들이 저의 화살에 두려움을 느끼고 놀라게 해 도망치게 할 수 있습니다." 

 

뼈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진심을 담은 소년장수 김선의 말에는 결기가 넘쳐 흘렀다.

 

김선은 자신이 직접 만든 대나무 활로 왕건이 보는 앞에서 눈부신 태양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일순간 하늘 위에 맴돌던 까마귀 한마리가 맥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이어 두번째 화살을 꺼내든 김선은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떨어지는 까마귀를 향해 재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떨어진 까마귀의 머리에는 정확히 두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고, 이를 본 왕건과 장수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서 매 사냥이 유행했으며 특히 까마귀나 부엉이, 독수리 등의 조류는 하늘의 태양과 접촉할 수있는 신성한 새로 여겨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이 새의 깃털이나 가죽으로 옷과 장신구를 만들어 머리에 장식하거나 착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대의 우리나라 샤머니즘에 따르면 초승달과 금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는 천문학적으로 태양과 달과 지구의 관계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로 연결된다고 인식했고, 여기에서 금성은 태양의 아들로 영혼을 지구로 전달하는 까마귀로 생각했다.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금성의 기운인 까마귀가 왕의 영혼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까닭에 고대 지도자들은 자신이 태양으로부터 선택받아 왕 또는 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에 새를 장식했다.

 

이렇듯 신성시 되는 까마귀를 두 발의 화살로 왕건의 발아래에 떨어뜨린 것에 대한 놀라움과 신궁으로 불릴 만큼 경탄할 만한 김선의 활솜씨는 일순간 주변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침묵을 깨고 순간 왕건의 충성스러운 장수 유금(가상의 인물)은 무엄한 행동이라 여겨 김선의 목을 베려 검을 뽑아들었다.

 

백전노장인 유금의 번개 같은 검은 김선의 목으로 날라들었다. 검으로부터 김선을 막기 위해 김훤술은 자신의 검을 전광석화와 같이 빼어들었고 유금의 칼은 맥없이 두동강이 났다.

 

어이없는 일이 연이어 눈앞에서 벌어지자 더욱 놀란 왕건의 장수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금이 빼어든 칼에도 흔들림이 없이 침착하게 까마귀를 두손에 들고 왕건 앞으로 다가간 김선은 무릎을 끓고 말했다.

 

"이 까마귀의 깃털과 가죽은 응당 삼한통일의 왕이 될 왕건 장군의 것이 되어야 하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태양의 아들(까마귀)을 제압한다는 것은 곧 삼한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장군께서 저를 등용해 주신다면 후백제군들이 태양으로 알고 있는 신검을 쏘아 적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단호하고 굳센 의지를 담은 김선의 말은 왕건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이내 호방한 웃음으로 흥분한 장수들을 진정시켰다.

 

왕건은 김선의 배포와 뛰어난 활솜씨가 전장터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고, 어린 소년 장수의 활약이 고려군의 용맹함에 사기를 더욱 배가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소년이 하늘의 왕을 쏘아 나에게 갖다 바친 격이니 어찌 내가 후백제군을 섬멸하는데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

 

"그대들은 활과 검으로 나를 도와 후백제를 물리치기 바라네"

 

김선의 역량과 김훤술의 충성에 흡족해 한 왕건은 진심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김선에게 친히 자신의 활을 주고 김훤술에게는 검을 주어 그 기쁨을 나타냈다.

 

총명하고 담대했던 김선궁은 신궁으로 불릴 만큼 활을 잘 다뤘다.

 

왕건으로부터 ‘선궁’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활을 잘 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선궁은 15세의 어린나이었지만 일리천전투에서 등을 보이지 않고 최후의 일전을 겨뤘던 승부사의 기질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일리천전투에서 공을 세운 선산지역 호족인 김선궁은 참전 당시 15세였던 김선으로 활약했다. 왕건으로부터 활을 하사 받아 일천리전투에서 맹위를 떨쳤고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인정 받아 김선의 이름에 '궁(弓)'이 더해져 김선궁이 되었다.

 

향토 역사자료에도 김선궁이 일리천전투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활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도 알 수 가 없다. 다만, 김선궁은 어릴적부터 성품이 담대하고 용맹스러웠으며 효심이 남달랐다고 알려져 있다.

 

김선궁의 활은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고 오늘날의 선산이 있게 한 일리천전투의 한요소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김선궁의 활은 왕건이 사용했던 활이며 고구려를 일으킨 신궁 주몽과도 연관성을 부여할 수 있겠다. 귀신같은 솜씨로 활로써 세상을 재패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다.

 

김선궁의 아버지는 김알지의 29세손이며 신라 46대 문성왕의 7세손이자 신라 김씨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이다. 김선궁의 어릴적 일화 중 아버지에게 해를 끼친 자를 죽이고, 제 발로 관청에 찾아가 자수했다고 한다. 효심이 남다르다는 점이 참작되어 풀렸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554호인 김선궁 유허비는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 59-2번지에 위치해 있다. 선산 낙산리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김선궁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한 공로로 삼한통합 벽상공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선산 사람들이 김선궁의 덕과 의를 기려 진만사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김선궁이 선산지방 호족으로서 태조 왕건이 선산 일리천지역에서 후백제 신검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자원해 전투에 나서 큰 공을 세웠고 이전에 견훤과 맞설 당시 숭신산성을 쌓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아래에 김선궁 묘소와 재사(齋舍)인 미석재(彌石齋)가 있고 매년 음력 10월1일에 이곳에서 향사를 지낸다.

 

이외에도 일천리전투의 접전지였던 지금의 고아읍 일대 평야에 대해 선산지도지 제 1지리편, 삼국사기, 선산의 맥락 등에 따르면 관심리 앞 들은'어갱이'라 불리며 송림리 앞 들은 '발갱이', 괴평리 앞들은 '점갱이'라 불리고 있따. 왕거은 이 평야지대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음으로서 삼국 재통일의 과업을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일천리 전투에서 왕건은 5천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수많은 목숨이 들판의 이슬처럼 사라진 일리천전투가 벌어진 선산.고아지역 일대에는 아직도 그때의 전투와 관련된 지명의 흔적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드넓은 강만큼이나 일리천 일대 강주변도 넓은 평지여서 수많은 풀들이 무성히 자라있다. 일리천전투가 벌어진 달은 9월이다. 가을을 맞이한 시점에 낙동강을 접한 들판에는 곡식이 무르익어가고 있고 이즘에 필자는 일리천전투 당시 말 달리던 선산.고아 일대 들판을 달려봤다.

 

이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투로 인해 죽어나갔던, 역사적으로 고려군의 숫적 우세와 제번경기와 말갈군등의 전투력이 막강했던 기병들을 동원해 후백제군이 일방적으로 패하다시피한 곳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신검과 후백제군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발갱이 들(발검들)이라 하여 지금의 고아읍 송림리 및 지산동 앞들로 신검이 고려군에 패해 항복한 곳이다. 또한 괴평동 앞뜰에 진을 쳤던 신검의 진지를 왕건이 점령한 후부터는 '占劒(점검)평야'로 아는 곧 '점갱이들'이다. 이후 신검은 다시 지산동 앞뜰과 사기점(신평2동) 뒷뜰에 진을 쳤는 것으로 알려있으며 이곳에서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시켰으니 이곳을 '拔劒(발검)평야' 곧 '발갱이들'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갱이 들(어검들)은 지금의 고아읍 관심리 앞들 점갱이 들(점검들)로 고아읍 괴평리 앞들이다. 이는 고려군이 신검의 진지를 점령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36년 견훤의 아들 신검이 고아읍 관심리 앞뜰에서 왕건과 최후의 결전을 벌일 당시 왕건이 신검을 막기 위해 주둔한 관심(官心)평야를 일명 '禦劒(어검)평야'라 하여 지금의 '어갱이들'이라 불리며, 왕건이 진을 쳤던 곳은 '장대(세도방)'라고 부른다.

 

숭신산성은 왕건이 해평면 송곡리 냉산(도리사 뒷산)에 후백제군과 싸우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아직도 그 흔적이 생생히 남이 있다. 산성 아래의 낙산리 일대에는 보급창인 군창을 일곱를 짓고 전쟁을 준비하여 이 마을은 현재까지 칠창리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다.

 

여진(余津)은 지금의 해평면 낙산리 일대의 낙동강 나루를 의마한다. 유래를 살펴보면 왕건이 "저 나루는 모두 나의 나루이니라" 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오랜 세월 기후 변화와 풍화작용 등으로 인해 낙동가으이 물줄기 역시 변형된 이유로 옛 전투 당시의 흔적을 찾기란 요원하다.

 

어성정(禦城亭)은 왕건이 군영을 설치한 곳으로 왕건이 축조한 낙동강 제방인 태조방천 등의 지명이 전해지고 있다.  왕건은 일선교 근처인 선산읍 생곡리 앞 '태조방천'으로 불리는 낙동강 연안에서 견훤과 후삼국 통일을 위한 싸움을 벌여 크게 이긴 사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이곳의 나루를 지나며 전승을 기념해 '나의 나루' 라는 뜻으로 '余津(여진)'이라고 이름을 명명했다고 한다.

 

이처럼 신검과의 일리천 전투 이전에 견훤과의 전투를 통해 선산지역 일대는 다양한 지명이 유래하는 곳이다.

 

한편, 전쟁에서 전술 전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지리적인 요소로 작용한 낙동강전선 일대는 낙동강이 있어 수로를 이용해 군사를 움직이기 수월했다는 점과 당시에 대군을 이끌면서 해결해야할 식량문제들이 비옥한 환경의 선산 곡창지대가 있었기에 대군 상호간에 대치할 장소로도 선호할 만하다.

 

더불어 현재와 같이 수로정비가 되지 않은 과거의 낙동강 일대는 우기에는 범람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강물줄기 또한 변했을 가능성도 있어 과거의 낙동강의 배치 상황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일리천 전투에서 군의 편제와 실체적인 활약상에 대한 묘사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실정이다. 

 

한국문화사에 따르면 8∼10세기의 한반도의 기후사항은 세계적으로 한랭 지수(寒冷指數)가 높아 한기에 해당하면서도 건습 지수(乾濕指數) 또한 높아 농업 경영에 있어 큰 어려움이 뒤따랐던 시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9∼10세기 농업 기상재해 기록을 보면, 서리가 내려 곡물을 상하게 한 경우가 모두 아홉 차례 기록되고 있고 3월이 세 차례, 4월이 세 차례, 5월, 7월, 8월이 각 한 차례 정도 발생했다. 결국 세계적으로 한기가 지속된 때에 한반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 기후는 불안정한 면을 보이면서 기상재해 등이 급속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후상황에서 왕건은 견훤이 6월에 전투를 서두르자고 재촉함에도 불구하고 9월로 결전을 삼은 것은  농번기의 민심 이반을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또한 김선궁을 비롯한 선산지역 호족세력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은 일천리전투를 완승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했던 왕건의 전략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IT를 활용한 정보 검색으로 모든 정보 수집이 가능한 현대이지만, 일리천 전투에 얽힌 인물들에 대한 세밀한 자료를 찾기란 쉽지가 않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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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강줄기와는 다른 낙동강 일대 지도

 

일리천 전투에서 공을 세운 지역 일선김씨의 시조인 김선궁 장군의 발자취에 대해 과거를 더듬지만 아련한 옛그림자만 다가온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아비의 복수를 위해 용감히 행동으로 옮겼던 일화는 김선궁이 전투에서도 적과 맞서 호락호락하지 않고 두려움없이 용맹히 싸웠을 것이라는 상상은 자연스레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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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지역의 청소년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고 호연지기를 불러일으 킬 수 있는 김선궁. 필자는 일리천 일대 지형에 익숙했던 김선궁이 나이는 어렸으나 용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말을 타고 활을 쏘며 넓은 들판을 기호지세로 종횡무진했던 역사의 흔적이 복원되는 꿈을 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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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스토리텔링 상주클럽 작가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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