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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경북 스토리텔링클럽 상주클럽, 상주 및 구미 지역 이야기 소재 발굴 나서

김도형 0 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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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지역 스토리텔링은 북천전투를 비롯한 다양한 소재 논의

구미지역 스토리텔링 소재로 일리천전투의 영웅 김선궁 장군 활약상 발굴 논의

 

(전국= KTN) 김도형 기자= 10일 오후 경북상주도립도서관에서 경상북도문화콘첸츠진흥원 주관으로 '2019 경북 스토리텔링클럽' 모임이 진행되어 상주지역 및 구미지역을  소재로 한 스토리 발굴을 위한 커뮤니티 활동이 열렸다.

 

경북스토리텔링클럽 상주클럽 전담멘토인 영남일보 사회부 특임기자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백승운 부장은 참여 작가들이 발굴해 온 이야기 소재 발표를 경청하고 '위대한 봉길이' 이야기를 예로 들며 스토리텔링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으로 지역성을 찾기를 주문한 백승운 멘토는 팩트를 위주로 상세한 지역 소재 발굴을 강조했으며, 스토리텔링 방향성에 대해 픽션과 팩트로 구분해 작품활동을 할 것을 주문했다.

 

백승운 멘토는 스토리텔링 작가들이 오는 24일까지 중간 제출 작품을 목표로 지역 이야기 소재로 로그라인과 기획의도, 등장인물, 시놉시스 등 기승전결 구조를 짜서 20일까지 제출하기를 제안했다.

 

백승운 멘토는 이날 소개된 지역 스토리텔링 소재 중 구미 지역의 '일리천전투'에 대해 전투가 일어난 배경을 자료조사해 볼 것과 팩트 중심으로 왕건의 부하들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픽션도 가미된다면 좋은 내용이 될 수 있다며 조언했다.

 

본지에서는 일리천전투와 관련해 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을 만나 전투가 일어난 장소에 대해 자문을 구했으며 과거의 일리천이 흐르던 방향이 현재와는 달랐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일리천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내이며 현재의 감천이다. 일리천전투가 벌어졌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역사적인 자료로 밝혀진 것이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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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박 전 원장의 자료를 통한 설명으로 태조 왕건이 머물렀던 태조산의 위치에 대해 항간에 알고 있던 태조산과 냉산에 대해 혼동했던 사실을 알게됐다.


박은호 전 원장이 보여준 자료에 따르면 태조산은 선산부의 동쪽 13리에 있고 비봉산의 동쪽 줄기가 작은 산이 된 것으로 낙동강에서 멈춘다. 태조산은 고려 태조의 어가가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산 이름의 유래가 됐다고 한다.

 

한편 해평 도리사가 있는 냉산의 경우 선산부의 동쪽 15리, 해평현 북쪽 10리에 위치해 있으며 팔공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달리고 북쪽으로 달리다가 활 모양의로 웅진이 된 산이라고 하며 일명은 도리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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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전투가 벌어진 선산지역 일대 옛지도 사진 출처, 문화콘텐츠진흥원 자료 편집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김명진의 '고려 태조 왕건의 기병 운영에 대한 검토'에 따르면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 고려군의 편성을 살펴보면 마군이 4만, 제번경기 9천 5백, 기병 3백으로 도합 4만9천8백기로 약 57%가 기병으로 편제된 기병 중심의 군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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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천전투에 참가한 고려군의 편제, 총인원 8만7천500명(사진 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김명진)

 

당시 고려에서는 대체로 기병을 마군, 정기, 경기, 일반기병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들 간의 엄격한 구별은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전투의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 구분되었다고 한다.

 

편제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왕건의 군대에는 마군이 가득 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권의 고려 개국공신 4인방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도 마군장수로 추측되며 더우기 태조 왕건 스스로가 훌륭한 마군장군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사에서도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일리천전투는 (주)넥슨코리아에서 만든 삼국지조조전 게임에도 소재로 재미나게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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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주)넥슨코리아 삼국지-일리천전투 게임

 

역사의 변곡점이었고 현시대에 영향을 끼친 역사적인 전쟁들이 많다. 현재 구미 지역의 번성 기원은 과거의 역사적인 터닝포인트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936년 9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에 위치한 일리천에서 왕건이 이끈 고려군이 견훤의 아들 신검이 지휘하는 후백제군을 대파한 전투가 있었다.

 

일리천 전투가 있기 1년 전 935년 3월 후백제의 내분이 발생해 견훤은 그의 장남인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됐으며 가까스로 탈출해 왕건에게 투항했다. 견훤은 자신의 복수를 위해 왕건에게 요청했으며, 왕권은 이를 수용해 후백제를 칠 전투를 준비했다.

 

일리천은 낙동강의 지류로 병력과 물자 수송이 용이한 지리적 이점이 있는 곳이며 고려에 귀의한 신라의 병력을 지원받기에 최적의 위치였다. 8만7천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군사를 일으킨 왕건에게는 훌륭한 부하들이 다수 존재했다.

 

후삼국 시기 고려에 대해 살펴보면 후백제와 신라와 비교해 군마의 수급이 원활했고 고려는 각 지역에 교통과 통신조직으로 역을 설치했고 각 역마다 일정 수의 말을 보유했다. 말갈, 여진, 거란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고려는 936년 9월 일리천 전투에 말갈인들을 고용해 흑수, 달고, 철륵 등 말갈계 정예기병(제번경기)이 참전했다. 이에 대해 말갈인 등으로부터 대족장으로 추앙받던 유금필 장군의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통일고려를 완성한 태조 왕건은 전쟁수행 능력이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전쟁수행 능력 중 우수한 기병 운영에 대해 오늘날 학자들은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고려 통일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936년(태조 19) 9월의 일리천전투에서 참전한 흑수, 달고, 철륵의 제번경기 9,500명은 말갈계통의 굳세고 강한 기병들로 태조 왕권이 여진의 말 1만 필을 빌림으로서 일리천전투 승리의 한 요인이 되었다.

 

여진나루 도하작전 감행한 고려군

 

일리천전투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등에서 살펴볼 수 있으며 역사극 드라마에서 종종 한페이지를 장식하기도 한다. 선산일대 평야는 예전부터 곡창지대였고 배들이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인물됨됨이는 물론이고 식량과 자금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왕건은 지방호족들을 규합해 세력을 키우고 자금력과 식량 확보가 많은 만큼 군사의 사기는 드높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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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MBC

 

어느시대든 영토확장에 대한 욕구는 원초적인 욕망에서 기인한다. 세력이 확장될 수록 더욱 담대혀져 가는 인간의 욕망은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게된다. 전장터에서 허무하게 목숨줄을 놓은 이름모를 병사들과 그를 기다리는 고향땅의 가족들의 가슴아픈 슬픈 사연들로 점철된 과거의 전쟁역사에 대해 우리는 민초들의 애환에 대해서는 들여다보지 않는다.

 

전쟁에 참가한 병사들 하나 하나가 현재의 사람들과도 유전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것인데, 인간은 과거의 무수한 죽음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일리천전투가 벌어졌다는 선산읍 고아 관심리 들 일대를 둘러보았다. 과거의 생사가 오가던 처절했던 전장터가 지금은 인간의 삶을 영위하게 만들고 곡식을 제공하는 평화의 땅이 되었다.

 

936년 9월 태조는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개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전략을 세운다. 승리를 확신하는 지도자는 승리할 계책이 충분하고 다양했다. 그러나 아직 싸우기 전에 전략에서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계책이 적기 때문이다.  승리할 계책이 다양하면 이기고, 승리할 계책이 적으면 이길 수 없다. 하물며 아무런 계책조차 없다면,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할 것이다.

 

전쟁을 해야 할 때와 해서는 안 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은 전략가의 근본 덕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손자는 전쟁에 앞서 기본 사상은 다섯 가지 전략적인 조건과 일곱 가지 계책으로 전쟁의 승패를 예측하되 승산이 없거나 적다면 절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고 강조했다. 

 

다섯 가지 전략적인 조건은 정치, 천시, 지리, 장수 그리고 군대의 법제이다. 또한 일곱 가지 계책이란 '지도자는 누가 더 명분을 갖추었는가, 장수는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 천시와 지리는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 법령의 집행은 누가 더 제대로 하고 있는가,군대는 누가 더 강한가,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었는가, 상벌은 어느 쪽이 더 명확하게 행하고 있는가' 등을 말한다.

 

왕건이 신검을 상대로 크게 이긴 일리천전투는 전쟁에 있어서 승리를 위한 전략적인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지방호족 15세 김선궁의 마음을 얻다. 


공산전투에서 대패한 왕건을 도우려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안타까운 상황이었으나 그런 와중에 선산 지역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아온 토착부호인 김선(궁)(일리천전투 후에 선궁이란 이름을 하사받음, 金宣弓)과 김훤술 등이 찾아왔다. 이들은 뛰어난 장부들이었다.

 

일리천전투 이전에 일선부의 동쪽 13리에 고려 태조왕건의 어가가 머무르던 곳이어서 산 이름을 태조산으로 삼았다고 한다. 후삼군 격전지였던 태조산에 지역 호족이었던 일선김씨의 시조 김선궁과 해평김씨의 시조인 김훤술 등이 도와 냉산에 숭신산성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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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낙산 3리 칠창부락에 일곱개의 군창을 두고 견훤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둔 왕건은 낙동강을 건너는 나루를 여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현재도 낙산3리에 지명이 남아 있다.

 

<일리천전투와 15세 장수 김선궁 스토리텔링>

 

일리천전투의 영웅, 태양을 쏜 신궁 김선궁

 

로그라인: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일리천전투의 승리 요인 중 어린장수 김선궁의 용맹함과 활솜씨는 후백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왕건과 처음 만난 김선궁은 활을 꺼내들고 태양 빛이 강렬한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기획의도: 한국전투사에서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대전투현장이었던 일리천전투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선산지역의 호족으로 현재까지 구미와 우리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김선궁에 대한 재조명

등장인물: 김선(궁), 왕건, 유금,김훤술

시놉시스:

 

수만명이 넘는 후백제군을 상대하기 위해 왕건의 군사모집 사실을 듣고 찾아온 김선과 김훤술은 왕건의 활약상과 인물됨됨이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낸 왕건은 어리지만 총기 넘치는 눈을 가진 김선에게 물었다.

 

"강건너의 기세등등한 수많은 후백제군들을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느냐?"

 

"저는 100보 밖의 날아가는 새의 머리를 맞출 수 있습니다. 적들이 저의 화살에 두려움을 느끼고 놀라게 해 도망치게 할 수 있습니다."  

 

뼈속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진심을 담은 소년장수 김선의 말에는 결기가 넘쳐 흘렀다.

 

김선은 자신이 직접 만든 대나무 활로 왕건이 보는 앞에서 눈부신 태양을 향해 화살을 날렸고, 일순간 하늘 위에 맴돌던 까마귀 한마리가 맥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이어 두번째 화살을 꺼내든 김선은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떨어지는 까마귀를 향해 재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떨어진 까마귀의 머리에는 정확히 두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고, 이를 본 왕건과 장수들은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서 매 사냥이 유행했으며 특히 까마귀나 부엉이, 독수리 등의 조류는 하늘의 태양과 접촉할 수있는 신성한 새로 여겨 하늘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이 새의 깃털이나 가죽으로 옷과 장신구를 만들어 머리에 장식하거나 착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고대의 우리나라 샤머니즘에 따르면 초승달과 금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는 천문학적으로 태양과 달과 지구의 관계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로 연결된다고 인식했고, 여기에서 금성은 태양의 아들로 영혼을 지구로 전달하는 까마귀로 생각했다.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내려오는 금성의 기운인 까마귀가 왕의 영혼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 까닭에 고대 지도자들은 자신이 태양으로부터 선택받아 왕 또는 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에 새를 장식했다.

 

이렇듯 신성시 되는 까마귀를 두 발의 화살로 왕건의 발아래에 떨어뜨린 것에 대한 놀라움과 신궁으로 불릴 만큼 경탄할 만한 김선의 활솜씨는 일순간 주변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순간 왕건의 충성스러운 장수 유금(가상의 인물)은 무엄한 행동이라 여겨 김선의 목을 베려 검을 뽑아들었다.

 

백전노장인 유금의 번개같은 검은 김선의 목으로 날라들었다. 검으로부터 김선을 막기 위해 김훤술은 자신의 검을 전광석화와 같이 빼어들었고 유금의 칼은 두동강이 났다.

 

어이없이 일에 한번 더 놀라 왕건의 장수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금이 빼어든 칼에도 흔들림이 없이 침착하게 까마귀를 두손에 들고 왕건 앞으로 다가간 김선은 무릎을 끓고 말했다.

 

"이 까마귀의 깃털과 가죽은 응당 삼한통일의 왕이 될 왕건 장군의 것이 되어야 하옵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느냐?"

 

"태양의 아들(까마귀)을 제압한다는 것은 곧 삼한통일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이는 어리자만 단호하고 굳센 의지를 담은 김선의 말은 왕건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이내 호방한 웃음으로 흥분한 장수들을 진정시켰다.

 

왕건은 김선의 배포와 뛰어난 활솜씨는 전장터에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것이고, 어린 소년 장수의 활약이 고려군의 용맹함에 사기를 더욱 배가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소년이 하늘의 왕을 쏘아 나에게 갖다 바친 격이니 어찌 내가 후백제군을 섬멸하는데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 

 

"그대들은 활과 검으로 나를 도와 후백제를 물리치기 바라네"

 

김선의 역량과 김훤술의 충성에 흡족해 한 왕건은 진심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김선에게 친히 자신의 활을 주고 김훤술에게는 검을 주어 그 기쁨을 나타냈다.

 

총명하고 담대했던 김선궁은 신궁으로 불릴 만큼 활을 잘 다뤘다.

 

왕건으로부터 ‘선궁’이란 칭호를 받을 만큼 활을 잘 쐈던 것으로 추정되는 김선궁은 15세의 어린나이었지만 일리천전투에서 등을 보이지 않고 최후의 일전을 겨뤘던 승부사의 기질도 엿볼 수 있다.

 

한편, 일리천전투에서 공을 세운 선산지역 호족인 김선궁은 참전 당시 15세였던 김선으로 활약했다. 왕건으로부터 활을 하사 받아 일천리전투에서 맹위를 떨쳤고 전쟁이 끝난 뒤 공을 인정 받아 김선의 이름에 '궁(弓)'이 더해져 김선궁이 되었다.

 

향토 역사자료에도 김선궁이 일리천전투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임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활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도 알 수 가 없다. 다만, 김선궁은 어릴적부터 성품이 담대하고 용맹스러웠으며 효심이 남달랐다고 알려져 있다.

 

김선궁의 활은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고 오늘날의 선산이 있게 한 일리천전투의 한요소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김선궁의 활은 왕건이 사용했던 활이며 고구려를 일으킨 신궁 주몽과도 연관성을 부여할 수 있겠다. 귀신같은 솜씨로 활로써 세상을 재패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운 법이다. 

 

김선궁의 아버지는 김알지의 29세손이며 신라 46대 문성왕의 7세손이자 신라 김씨의 마지막 왕손인 체의공이다. 김선궁의 어릴적 일화 중 아버지에게 해를 끼친 자를 죽이고, 제 발로 관청에 찾아가 자수했다고 한다.  효심이 남다르다는 점이 참작되어 풀렸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자료 제554호인 김선궁 유허비는 구미시 선산읍 완전리 59-2번지에 위치해 있다. 선산 낙산리 인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김선궁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을 통합한 공로로 삼한통합 벽상공신 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선산 사람들이 김선궁의 덕과 의를 기려 진만사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김선궁이 선산지방 호족으로서 태조 왕건이 선산 일리천지역에서 후백제 신검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자원해 전투에 나서 큰 공을 세웠고 숭신산성을 쌓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아래에 김선궁 묘소와 재사(齋舍)인 미석재(彌石齋)가 있고 매년 음력 10월1일에 이곳에서 향사를 지낸다.

 

이외에도 일천리전투의 접전지였던 지금의 고아읍 일대 평야에 대해 선산지도지 제 1지리편, 삼국사기, 선산의 맥락 등에 따르면 관심리 앞 들은'어갱이'라 불리며 송림리 앞 들은 '발갱이', 괴평리 앞들은 '점갱이'라 불리고 있따. 왕거은 이 평야지대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신검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음으로서 삼국 재통일의 과업을 달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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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일천리 전투, 왕건은 5천 7백여 명을 목베었다. 『高麗史節要』

 

한편, 전쟁에서 전술 전략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지리적인 요소로 작용한 낙동강전선 일대는 낙동강이 있어 수로를 이용해 군사를 움직이기 수월했다는 점과 당시에 대군을 이끌면서 해결해야할 식량문제들이 비옥한 환경의 선산 곡창지대가 있었기에 대군 상호간에 대치할 장소로도 선호할 만하다.

 

더불어 현재와 같이 수로정비가 되지 않은 과거의 낙동강 일대는 우기에는 범람으로 인해 시시때때로 강물줄기 또한 변했을 가능성도 있어 과거의 낙동강의 배치 상황에 대한 자료가 부족한 관계로 일리천 전투에서 군의 편제와 실체적인 활약상에 대한 묘사는 거의 찾아 보기 힘든 실정이다.  

 

한국문화사에 따르면 8∼10세기의 한반도의 기후사항은 세계적으로 한랭 지수(寒冷指數)가 높아 한기에 해당하면서도 건습 지수(乾濕指數) 또한 높아 농업 경영에 있어 큰 어려움이 뒤따랐던 시기였다고 알려져 있다.  9∼10세기 농업 기상재해 기록을 보면, 서리가 내려 곡물을 상하게 한 경우가 모두 아홉 차례 기록되고 있고 3월이 세 차례, 4월이 세 차례, 5월, 7월, 8월이 각 한 차례 정도 발생했다. 결국 세계적으로 한기가 지속된 때에 한반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 기후는 불안정한 면을 보이면서 기상재해 등이 급속히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기후상황에서 왕건은 견훤이 전투를 서두르자고 재촉함에도 불구하고 9월로 결전을 삼은 것은  농번기의 민심 이반을 다스리기 위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다.

 

또한 김선궁을 비롯한 선산지역 호족세력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은 일천리전투를 완승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했던 왕건의 전략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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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韓國史)에서 가장 많은 기병이 동원된 전투 - 일리천(一利川) 전투|작성자 대경

 

가을 9월에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합쳐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 머물렀는데, 신검(神劒)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대항하여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고 견훤과 대상(大相) 견권(堅權)ㆍ술희(述熙)ㆍ황보금산(皇甫金山)과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지천군 대장군(支天軍大將軍) 원윤(元尹) 능달(能達)ㆍ기언(奇言)ㆍ한순명(韓順明)ㆍ흔악(昕岳)과 정조(正朝) 영직(英直)ㆍ광세(廣世) 등이 보군 1만 명을 거느려 좌강(左綱)이 되었다.

 

대상(大相) 김철(金鐵)ㆍ홍유(洪儒)ㆍ박수경(朴守卿)과 원보(元甫) 연주(連珠)ㆍ원윤 훤량(萱良) 등이 마군(馬軍) 1만 명을 거느리고, 보천군 대장군(補天軍大將軍) 원윤 삼순(三順)ㆍ준량(俊良)과 정조 영유(英儒)ㆍ길강충(吉康忠)ㆍ흔계(昕繼) 등이 보군(步軍) 1만 명을 거느리어 우강(右綱)이 되었다.

 

명주(溟州) 대광(大匡) 왕순식(王順式)과 대상 긍준(兢俊)ㆍ왕렴(王廉)ㆍ왕예(王乂)와 원보 인일(仁一) 등이 마군(馬軍) 2만 명을 거느리고, 대상 유금필(庾黔弼)과 원윤 관무(官茂)ㆍ관헌(官憲) 등이 흑수(黑水)ㆍ달고(達姑)ㆍ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강한 기병 9천 5백 명을 거느리며, 우천군 대장군(祐天軍大將軍) 원윤 정순(貞順)과 정조 애진(哀珍) 등이 보군(步軍) 1천 명을 거느리고, 한천군 대장군(扞天軍大將軍) 김극종(金克宗)과 원보 조간(助杆) 등이 보군 1천 명을 거느려서 중군(中軍)이 되었다. 또 대장군 대상 공훤(公萱)ㆍ원윤 능필(能弼)ㆍ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이 기병 3백 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 7백 명을 거느리어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이 되었다.

 

이에 삼군(三軍)이 전고(戰鼓)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모양으로 된 흰 구름이 우리 군사 위에서 일어나 적진 쪽으로 향하여 갔다.

 

왕이 공훤에게 명하여 바로 중군을 공격하게 하고, 삼군이 일제히 전진하여 양쪽에서 협격(挾擊)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장군 흔강(昕康)ㆍ견달(見達)ㆍ은술(殷述)ㆍ영식(令式)ㆍ우봉(又奉) 등 3천 2백 명을 사로잡고, 5천 7백여 명을 목베었다. 『高麗史節要』

 

일리천 전투는 후삼국 시대의 종말을 알린 전투로 왕건이 견훤의 귀순 이후 어차피 망해가던 후백제를 확인사살시킨 전투로 왕건이 이때 동원한 고려군은 무려 8만 7천 5백 명(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10만 7천 명), 유금필이 복속시킨 흑수말갈 · 달고 · 철륵의 정예기병 9천 5백 기까지 동원하여 기병의 수만 무려 4만 9, 800명에 이른다. 통주에 주둔했던 강조의 군 30만이나 주필산 전투에 동원되었던 고구려군 15만이 기병의 수가 더 많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일단 확인되는 숫자로는 한국사에서 가장 많은 기병을 동원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왕건의 선봉에 선 견훤(!)을 보고 전의를 상실해 자중지란을 일으켰으며 왕건이 3군을 모두 동원해 공격해오자 6천의 병력을 잃고 수뇌부가 항복하고 후백제는 결국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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