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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향기] "길 위의 작가를 만나다." 객주문학관 탐방기

김도형 0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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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KTN) 김도형 기자=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 위치한 객주문학관은 장편소설 '객주'를 탄생시킨 김주영 작가가 태어난 고향의 폐교를 증축해 만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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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국가산업단지를 터전 삼아 살고 있는 필자가 거주하는 구미에서 수개월 전 마라톤동호회 동료들과 함께 청송트레일런대회에 참가신청을 했고 주최측에서 마련해 준 객주문학관 연수동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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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속의 고등어 굽기, 청송트레일런대회 주최 측의 배려로 객주문학관 주차장 한귀퉁이를 빌렸다. 

 

온 사방이 푸른 산과 녹음으로 둘러싸인 수려한 청송 객주문학관 주변의 풍경이 필자가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어릴적 고향인 봉화군 춘향면 산간 오지 계단마을을 떠오르겠 했다. 객주문학관은 폐교를 개조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신축건물인지 긴가민가하게 느끼게 하리만치 정리정돈이 잘 된 지역의 명소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망이 발달하여 이제는 오지마을이 아니라지만, 인구수 수만 밖에 안되고 게다가 넓은 산속 험지이자 오지 청송군에 민가들이 드믄드믄 산개해 있고 젊은 층이 소멸되어 가는 고장에 이렇게 번듯한 창조물이 있다는게 내심 혈세낭비의 전형이 아닐까도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옛적의 추억이 시나브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객주'는 필자가 청소년 시절 만화방을 안방 삼아 들락거리던 시절 감명있게 읽어 본 만화다. 원래 소설로 유명했던 작품이지만 다양한 만화를 섭렵한 필자의 견지에서는 만화가 이두호 작가 특유의 인물묘사 펜터치와 내공있는 글구성이 '객주'의 가치를 더욱 생동감있게 만들었다고 감히 평가해 본다.


'객주'는 말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이두호 작가는 우리네 민초들이 거친 풍파를 견디며 살아간 지난한 삶들을 한국적인 그림과 돌담길과 주막의 섬세한 표현 그리고 거친 황톳방의 실감있는 묘사와 강나룻 풍경, 대갓집의 솟을대문과 민초의 삶을 대변하는 거친 초가집을 비롯해 한국의 양반층을 상징하는 차곡차곡 지붕을 덮은 기와, 소쿠리와 멍석, 지게와 봇짐, 한국 고유의 장독과 농산물, 다양한 도구들 등 우리네 옛날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한편으로 소설 '객주'속에는 단 한 명의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객주문학관 설명에 따르면 의협심이 강하며 장사수완이 뛰어나지만 정의감으로 인해 번번이 고초를 겪는 천봉삼이나, 토호의 행패로 재산과 아내를 모두 빼앗기고 오랜 행고 끝에 다시 쇠전을 일으키는 조성준, 백정의 딸로 태어나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월이 등 잡초와 같은 생명력을 보여주는 무수한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없는 민중들이며 구한 말 옛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장삼이사의 필부들이다. 이처럼 '객주'는 지배층이 아닌,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상인계급을 주인공으로 삼음으로써 '세계문학사에 전례가 없는 민중문학의 전범'을 마련했다는 평이다.

이러한 우리나라 서민들의 애환을 질퍽하게 잘 그려낸 '객주'란 작품의 원작자인 김주영 작가의 고향 청송에, 게다가 지난 7,80년대 치열한 격동기를 맞이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명 일간지에 연재 되며 국민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명작을 탄생시킨 배경의 근원이 싹튼 곳에 들어선 객주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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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문학에 소질은 없다고 생각하나 펜대를 잡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문학을 하고 싶어하는 원초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탓에, 문학의 감동을 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객주문학관에 있는 내내 줄곧 머리속에 맴돌았다. 하룻밤 쉬어 갈 수 있는 객주문학관은 연수동에서 글쟁이들과 오손도손 둘러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필자는 객주문학관을 둘러보고 전시관의 글들을 체록 인용해 독자들에게 청송이라는 산간오지에 문학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을 다름이다.

 

장돌뱅이와 같은 삶을 살아온 김주영 작가


발품 팔아 쓰는 소설가로 알려진 김주영 작가는 장돌뱅이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스스로 장돌뱅이가 되었다. '객주'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답사하였으며, 연재 기간에느 한 달에 이십 일 이상 장터를 찾아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옛 보부상과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면 시장 상인들과 막걸리를 나누는 것도 마다치 않았으며,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이야기하며 떠돌았다. 그렇게 전국을 유랑하며 면 소재 여관이나 여인숙에서 원고를 써서 서울신문 지국에 보내고 나면 또 다음 지역을 향해 출발하는 생활이 연재하는 5년 내내 이어졌다. 부초처럼 살았던 서민들의 세계와 애환을 그려낸 '객주'의 한 장 한 장은 그렇게 작가의 길 위에서 완성되었던 것이다.


장돌림들의 여로를 따라


'객주'는 조선팔도를 어우르는 유장한 보부상 길, 그 험난하고 고단한 행로와 함께 구한 말 저잣거리의 눈물겨운 희로애락을 속속들이 재현한 걸작으로 꼽힌다. 이는 '남쪽의 땅 끝에서 휴전선 턱 밑까지 전국을 샅샅이 밟아 뒤지고' 다녔던 작가 김주영의 치열했던 저잣거리 답사와 조선 후기 상업사에 대한 연구와 남다른 상상력이 빚어낸 탁월한 성과물이다.

 

'객주'속 등장인물들의 다사다난한 여로를 따라 그들이 활약했던 옛 장터들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서민은 고향을 잃어버린 대신 "객주"를 얻었다."

 

"역사와 허구의 이종교배를 달성한 한국어 서사물로서 '객주'는 위대하다."

 

황종연 문학평론가는 김주영의 '객주'에 대해 "소설연재 당시의 시점에서 한국사 연구가 다다른 가장 높은 수준의 실증과 추리를 바탕으로 보부상 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민중 생활의 박물지를 작성하는 동시에 음모와 폭력이 꼬리를 물고 의리와 애욕이 장단을 맞춰 흘러가는 토속적 로맨스를 완성했다"고 했다.

 

또한 '객주'는 고유 언어의 보물창고일 뿐만 아니라 "대중서사의 백과전서이기도 하다"라는 평을 내린 황종연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대대로 전수된 옛말과 속담의 활용, 민간에 유통된 비유와 사설의 구사, 민중 풍속에 밀착된 재담과 육담의 연출이라는 면에서 '객주'를 능가하는 소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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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치수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어떠한 사실에 입각한 역사책보다는 상상력의 도움을 받는 허구의 소설 속에 현실적 진실이 더욱 깊고 넓게 수용될 수 있다는 문학의 힘을 깨닫게 한다. 문학은 곧 말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이 작품은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라며 '객주'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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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김주연 숙명여대 명예교수는 "객주가 높은 문학적 가치를 지니면서 오랫동안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모든 소설들이 꿈꾸는 저 절체절명의 화평한 고지, 즉 서사와 서정의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조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해 소설로서의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객주'라는 작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작가의 고백 , 길 위의 인생을 돌아보며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난 이후 터득했다고 자부했었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 위한 허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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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시골의 읍내 마을에서는 닷새 만에 한 번씩 저자가 열렸다. 내가 살던 집의 울타리 밖이 장터였고 울타리 안쪽은 우리 집 마당이었다. 그러나 그 울타리는 어느새 극성스러운 장돌림으로 하여금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우리 집 마당에서 유기전을 벌이기도 하였고, 드텀전을 벌이는가 하면 어물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땀 냄새가 푹푹 배어나는 그들의 치열한 삶의 모습을 목격해 왔다.

명색 작가가 되면서 나는 그 강렬했던 인생들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형상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에 부대껴 왔다."

 

 '객주' 작가의 말 중에서......

 

작가는 누구인가 그리고 작가의 수집품

 

일생동안 끊임없이 이동하며 격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모든 소유물들을 몽땅 가지고 다닌다. 가재도구와 가축, 비단과 향수, 씨앗과 소금, 요강과 유골, 물통과 식칼, 빈대와 벼룩, 바람과 빛의 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예민한 촉각, 적대적인 환경과 싸워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 하물며 번뇌와 증오, 분노와 저주까지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작가도 그렇다.

 

김주영작가에게는 철필과 저울추를 수집하는 이색적인 취미가 있다. 시골 5일장에서 흔히 쓰이던 재래식 저울추에는 그가 보부상 이야기를 쓰겠노라 결심하게 했던 그 옛날 시골 저잣거리의 정취가 진하게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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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울추 수집이 초심을 되새겨주는 취미라면, 사진은 소설적 묘사의 밑바탕을 제공하는 실용적인 취미이다. 1971년 데뷔 이후 본격적으로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 '객주' 연재 무렵에는 카메라가 10여 대에 렌즈가 2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사진에 빠졌었다.

이후로도 사진은 작가적 상상력의 폭을 넓히는 수단이자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의 길동무가 되어왔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한때 우산과 여행용 트렁크나 휴대용 서류 가방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는 독특한 취미도 있었다. 이들에 대한 맹렬한 수집욕은 그가 겪었던 어린 시절의 가난과 관계가 깊다는 얘기들이 많다.


그 외에 '객주' 취재 당시 전국 장터를 그와 함께 누비며 이 땅 구석구석 거리와 장바닥에서 삶의 언어를 채집해 온 녹음기들, 대학노트에 빽빽이 적은 초고를 원고지로 옮겨 적으며 사용했던 펜촉이 달린 철필들 또한 그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수집품들이다.

 

세상이 궁금한 꼬마, 김주영

 

가난했던 시절, 어린 김주영에게 버스정류장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자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혼자만의 극장이었다. 학교가 파하면 배를 쫄쫄 굶은 채 버스정류장에 앉아 낮선 이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서 어디로 가는 걸까' '저 버스는 어디로 갈까' '버스가 가는 그곳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머릿속으로 그리며 배고픔과 가난의 상처를 달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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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가보지 않은 그곳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훗날 김주영 문학의 토대가 되었다.

 

창작의 밀알이 된 어린 시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산골마을에서 보고 듣는 것들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으므로 내 일상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래서 하루의 대부분을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다니는데 소비했다." 

 

"바깥세상에 대한 그러한 호기심과 상상력은 오늘날 나를 구성하는 데 크나큰 영향력을 미쳤다.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것은 그래서 행운이었다."

 

소설가가 되기까지 소설가 김주영은 사방 100리 안에는 공장도 없고 기찻길도 없는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탯줄을 끊고 난 순간부터" 시달려야 했던 지독한 가난은 어린 그에게 멍에와도 같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선택한 시골 직장 생활 역시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삼심대에 접어든 어느날, 김주영은 홀연히 직장을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71년 '휴면기'로 등단하였다.

5년간의 자료 수집과 5년간의 장터 순례를 거쳐 4년 9개월간 서울신문에 연재된 '객주'는 김주영에게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나에게 소설은 재주가 아니라 뚝심이자 견디는 힘이었다." -김주영-

 

작가의 일대기


1939년 12월 7일 경북 청송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완전히 외톨이었다. 대구농림고등학교 축산과를 다녔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되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지금 굶는 것도 성에 안 차냐"며 온종일 울었다. 그렇게 지독히도 가난하고 어두었던 시절이었다.

 

1959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장학생으로 학교에 다녔다. 비장한 각오로 당시 서라벌예대 교수였던 박목월 시인에게 시 열 편을 읽어봐 달라고 요청했다. 박 시인은 "자네는 운문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했고, 더 이야기할 용기가 없었던 김주영은 고향으로 내려가 자원입대했다.
이 사건은 이후 그가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된다.

 

1964년 군대를 다년 온 뒤 고향에 정착한 그는 생계를 위해 안동엽연초 생산조합에 취직했다. 생계를 위해 안동엽연초 생산조합에서 경리사원으로 취직하였다. 문학에의 꿈을 접은 데다 그 무렵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슬픔이 더해져, 장 파열이 올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이 시절 김주영을 아는 고향 사람들은 종종 "주영이 너는 깡패가 됐어야 맞는데, 어떻게 글을 쓰는지 몰라."라고 말하기도 한다.


1970년 서른한 살 되던 해, 소설을 쓰기 시작해 그해 '월간문학'에 '여름사냥'이 가작으로 입선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 '월간문학'에서 '휴면기'로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등단 이후 그는 지난 시절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79년 6월부터 1983년 2월까지, 4년 9개월간 1,465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역사소설 '객주'를 연재하였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 5년 동안 전국의 200여 개 시골 장터를 모두 돌아다녔으며, 연재하는 약 5년 동안에는 집에 한 달에 열흘도 머무르지 못하고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1981년부터 1984년 창작과비평사에서 '객주' 초판 9권이 출간되었다. 이후 '야정''화척''활빈도'등 피지배층의 길바닥 인생을 펄떡펄떡 살아 숨 쉬는 토속적 어휘로 녹여낸 소설을 썼다. 이름 없는 민중의 삶과 가난, 이 두 가지는 김주영 문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이다. 이러한 작품경향은 '천둥소리''고기잡이는 갈대를 꺽지 않는다''홍어''멸치''빈집'등으로 이어졌다.


'객주'를 출판하고 1984년 이 작품으로 제1회 '유주현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주영 [金周榮] - 삶의 아픔을 글로 토해낸 소설가 (네이버 지식백과, 인생스토리)


"소설 [객주]를 위한 취재 당시 청송 우시장에서. 김 작가는 [객주]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달 중 이십일 이상을 노트를 들고 장터를 찾아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다.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은 이때 얻은 것이다.

 

[객주] 때문에 생긴 별명입니다. 제가 [객주]를 쓰기 시작하면서 많이 떠돌아 다녔어요. 한 달이면 집에 머물렀던 기간이 열흘도 안 될 정도였죠. 한 달에 이십일 이상 노트를 들고 장터를 찾아 다니며 현장에서 글을 썼어요. 그 글을 들고 신문사 지국에 찾아가서 본사로 부쳐달라고 했고요. 그러니까 그때부터 떠돌아 다니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거예요. 시골에 있는 여인숙이나 여관에 머물면서 글을 쓰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숙박료만 지불하면 되니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밥도 먹고 싶을 때 먹으니 굉장히 자유로웠죠.

 

저는 기본적으로 조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현장에 안 갈 수도 없었어요. 제가 사학과 출신이 아니거든요. 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 아니어서 조사를 안 하고는 역사소설을 쓸 수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무조건 발로 뛰어다니게 된 거죠. 역사소설을 쓸 때 실수를 한다든지 얼토당토않는 말을 가져다가 집어넣는다든지 하면 비평가들에게 무식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죠. 독자들에게도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아주 철저하게 조사를 했어요. 그때 ‘길 위의 작가’라는 별명이 붙게 된 것입니다."

 

김주영 '객주' 속 문경세재 중 작가 어록

 

"이 소설은 앉았다 일어서면 엉덩이에서 구린내가 풀썩 하는 하층민들의 숨소리, 고린내가 등천하는 그들의 버선 짝을 뒤지며 그들에게서 회자되었던 상마로과 곁말과 구성진 노래들을 다슬기 줍듯 채집하며 기록하였다."

 

"산코숭이를 끼고 돌아가는 먼 길보다 까마득한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고개 너머 벼랑길을 선택하는 그들의 지름길에는 응당 과부하로 어깨를 짓누르는 고통이 뛰따른다. 치받이 길을 만나면 등에 진 짐짝과 함께 꼬꾸라질 듯 숨 가쁘다. 그러나 산국이 흐드러진 계곡 글에 안개 내려 쌓이고, 새벽닭이 홰를 칠 때까지는 겨냥하는 저잣거리에 때맞쳐 당도하는 것이 목숨처럼 절박했다. 자신들이 겪는 고초와 애환은 모두 한 주발의 막걸리와 술국으로 씻어내린다. 그래서 그들의 가슴에는 한이 맺힐 겨를이 없다. 일상사에 일어나는 갈등의 대부분을 담판으로 해결하고 사화술로 씻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지하고 우둔해서 역사의 행간에서 그대로 배설되어버린 딱한 인생들의 기록이며 섶다리 아래 꼬여드는 쉬리들처럼 하찮은 군상이 살다 죽어간 기록들이다. 그러나 쉬리는 쉬리대로 끈질기고 유장한 생명력을 지닌다. 그 작고 보잘것 없는 물고기가 이 세상과 함께 태어나서 지금까지 처음과 같은 쉬리란 이름 그대로 살아남은 것처럼"


"이 소설은 그처럼 지배층의 관점에서 쓴 공공의 영역에서 벗어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천민들의 애끓는 삶을 기록한 그들의 자서전이며, 미시사(미시역사, 서민역사)이다. 그뿐만 아니라 먼지가 풀썩거리는 봉놋방에 둘러 앉아 듣던 옛날 이야기책이며 박물지이고, 지리지이기도 하다."

 

"주막집 툇마루에 술단지를 끼고 앉아 해바리기 하며 길손을 기다리고 있는 들병이의 고쟁이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엄숙한 사학자들이 달가워 할 리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나와 같이 무지한 소설가의 몫일 테다."

 

"포구에 자리 잡은 여인숙이나 내륙 장터가의 여관방에서 사흘이나 나흘 동안 문밖 출입도 않고 원고를 쓰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발이 거친 형사들이 들이닥치고, 시골 다방에 들어가 길의 갈래를 꼼꼼하게 묻다가 붙들려 간 경찰서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객기 부리듯 쓰겠다고 뛰어들었지만 너무나 어려워 새벽 3시에 밖으로 나가 한강을 바라보며 울기도 하였고, 잠들지 않으려고 하룻밤에 열 잔 가깐운 커피를 마셨으며, 하룻밤에 담배 두 갑을 피워 종국에 가서는 폐기종 진단을 받아 지금도 기침을 참지 못한다."

 

"금전적으로는 자극적이었지만 감성적으로 보상받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는 말이 있듯이, 내게 있어 소설 '객주'는 금전적으로는 자극적이지 못했으나 감성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보상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객주'가 쉬리들처럼 오래 살아남아 읽힐 소설이 될지 아닐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필자인 나 자신은 오직 이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40대 초반에 가졌던 작가적 역량과 열정을 몽땅 동원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객주문학관 전시관 탐방 현장 체록 글 모음>

 

 

보부상에 대한 단상, 거래 트고 성애 한 잔

 

시장 가격은 같은 날이라도 들쭉날쭉하기 일쑤여서 가장 값이 비쌀 때 사면 이를 "상투 잡았다"고 표현했다. 만약 서로가 만족할 만큼 흥정이 잘 이루어지면 판 사람이나 산 사람이 술을 사기도 했는데, 이렇게 물건을 사고 팔 때 흥정이 끝난 증거로 옆의 사람들에게 술이나 담배를 대접하는 일을 '성애'라고 하며, 그래서 먹게 되는 술이 바로 '성애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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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들은 장터에서 만나면 첫 거래를 뜻하는 마수걸이나 싸게 파는 떨이, 인상 좋다고 말하거나 서로 덕담하기, 낯익은 고객에게 덤주기, 경매 붙이기, 물건을 바꿀 때 그 값을 쳐서 서로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놓는 뎃두리 등으로 흥정을 붙이고 거래가 성사되면 성애술로 서로 대접하며 정을 나누었다. 

 

길 떠나는 보부상

 

산길 걷고 물길 건너 조선팔도 저잣거리로 물품을 유통했던 보부상들, '길 위의 인생'을 살았던 그들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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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이란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합친말로, 부보상이라고도 한다. 부상은 비교적 양이 많고 값이 덜 나가는 물건을 등에 지거나 지게로 운반했으며, 보상은 주로 부피는 작으나 값이 나가는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메고 돌아다니며 팔았다. 이른바 보따리 장수인 보상들은 화장품을 비롯해 침선기구, 패물, 비단과 같은 수공예품을 방물고리에 담아 거래했고, 자연히 보상은 대개 방물장수로 불리는 여자들이었으므로 대갓집 본채(안채)까지 깊숙이 출입하면서 때로는 매파 노릇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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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짐장수로 일컷는 부상들은 지게를 지고 다녔는데 이들은 철물, 도자기, 건어물, 소금, 옹기, 유기, 목기, 곡식과 피륙같은 공산물들을 거래했다.

 

행로에 나설 때면 부상들은 목화송이를 단 패랭이에 짚신을 신고 감발이라는 발감개를 쳤다. 등짐은 매거나 지게에 졌으며, 지게에는 노숙하며 밥을 지어 먹을 새옹과 갈아 신을 짚신, 곰방대 같은 생활도구들이 매달려 있었다. 저고리 위에 누비배자를 걸쳤고 뱃구레(허리)에는 전대(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장단지에는 행전(각반)을 쳤으며 손에는 작대기 겸 호신도구이기도 한 물미장(촉삭대)을 들었고 머리에는 패랭이를 쓰고 다녔다. 보부상들의 신분증명서이기도 했던 신표 또한 잊지 않고 챙겨야 했다.

 

보부상들의 고된 삶

 

부평초같이 떠돌이 신세였던 보부상들은 서로 배짱이 맞는 인생끼리 이동경로와 들려야 할 저잣거리 등을 미리 협의하여 패를 지어 다녔다. 잠자리는 낯선 사람끼리 어울리는 숫막(주막)의 봉놋방에서 새우잠으로 때웠으며 그것도 여의치 못할 경우, 새옹으로 밥과 푸새김치로 끼니를 때운 뒤 노숙도 마다하지 않았다. 봉놋방은 상하를 막론하고 함께 썼고, 몽치미로 부르는 목치만 있고 이부자리는 없었다. 주막 주인은 예로부터 음식 값은 받았으나 숙박료는 받지 않았다. 산적이 출몰하는 고갯길 아래의 숫막에서는 십 수 명의 길손들이 집결할 때까지 여러 날 유숙하기도 하였다.

 

떠돌수록 규율은 엄격하게, 인간다운 삶을 위한 부상들의  윤리관

 

보부상들이 어느 봉노에서나 만나면 함께 잠을 자며 서로 믿고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윤리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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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언하지 말 것, 행패 부리지 말 것, 도둑질하지 말 것, 간음하지 말 것 등의 네 가지는 부상 세계의 대표적인 규율이었다.

 

한편 처음 만나는 동료라도 같은 부상이면 병든 자는 치료하고 죽은 자는 장사 지내며(병구사장), 어려움에 처하면 십시일반으로 서로 돕는(환난상구) 규율도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죄가 가벼우면 태형으로 다스렸고, 죄가 무거우면 멍석말이했는데,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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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모에 불효하고 형제간에우애가 없는 자는 볼기 50대를 친다.
2.선생(조직의 우두머리)를 속이는 자는 볼기 40대를 친다.
3.시장에서 물건을 억지로 판매하는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4.동료에게 나쁜 짓을 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5.술주정하면서 난동을 부린 자는 볼기 20대를 친다.
6.불의를 저지른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7.언어가 공손하지 못한 자는 볼기 30대를 친다.
8.젊은 사람으로서 어른을 능멸한 자는 볼기 25대를 친다.
9.질병에 걸린 동료를 돌보지 않은 자는 볼기 25대를 치고 벌금 3전을 물린다.
10.놀음 등 잡기를 한 자는 볼기를 3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1.문상하지 않는 자는 볼기 15대를 치고 벌금 5전을 물린다.
12.계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 1냥을 물린다.
13.부고를 받고도 연락하지 않은 자는 볼기 10대를 치고 벌금으로 부조로 낼 돈의 두배를 물린다.
14.모임에서 빈정대며 웃거나 잡담하는 자는 볼기 15대를 친다.

<예산임방절목> 중에서

 

'객주' 끝없는 길 위의 여정


1984년 '객주' 9권이 출간되었으나 김주영은 '완간'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천봉삼을 비롯해 작품을 통틀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몇 등장 인물의 행적을 끝까지 쫓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아직 더 할 이야기가 남아 있음을 애두럴 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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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2009년, 그는 지금의 울진과 봉화 사이에서 보부상길(십이령길, 금강소나무길)이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울진 흥부장에서 봉화 춘양장으로 넘어가는 그 길은 조선 후기 울진의 염전과 내륙의 장시를 연결하는 유일한 길로서 보부상들의 삶의 동맥이었다. 울진.두천(말내)에 서 있는 보부상 반수와 접장의 불망비(철비)가 발견되었으며 주막과 장시의 흔적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봉화 오전리에서는 지금도 보부상들을 위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를 기초로 '객주' 10권 완간을 향한 작업이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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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김주영 작가는 "이 두가지 보부상 유적의 의미를 놓치게 되면, 지금까지 쓴 아홉 권의 '객주'는 알맹이 없는 소설이 되기 십상이어서 이 소설을 다시 집필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소설 '객주'의 마지막 장면은 천봉삼 일행이 정착한 생달마을과 천봉삼과 월이와 조소사, 그리고 신석주, 정한조와 같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삶을 궁금케 만든다.

 

울진의 십이령에는 정한조 일행의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고 봉화에는 그 시절 보부상들이 정착했던 마을터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긴 상호부조와 환난상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비석도 서 있고 제사도 정기적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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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아들과 딸은 알까? 어릴적 보았던 옛날 저울추의 아련한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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