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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 조선시대 열녀 향랑 시제 봉행, 향랑의 절의정신 되새겨

열녀 향랑추모회 내빈소개 영상(https://youtu.be/QmTwuEKDLqY)

 

(전국= KTN) 김도형 기자= 22일 오전 10시 구미시 형곡동 산21번지(형곡고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향랑묘소에서는 형곡 열녀 향랑추모회 주관으로 '열녀 향량 추모 시제'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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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9월 6일이면 ‘형곡 열녀 향랑 추모회’  주관으로 열리는 향랑 시제에 라태훈 구미문화원장 및 형곡동민 30여명이 참석해 열녀 향랑의 고귀한 정신을 기렸다.

 

향랑(烈女 香娘)은 형곡이 낳은 열녀이다. 조선 숙종(肅宗)때 사람으로 상형(上荊)마을에서 밀양인 박자신의 딸로 태어났다.

 

열녀 향랑은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되던 해 이웃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14세 임칠봉에게 출가했다. 계모밑에서 자란 향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씨가 온화하여 행동이 정숙했다고 알려져 있다. 

 

출가 후 시부모와 신랑 임칠봉의 극심한 학대와 구박에도 불구하고 하루같이 행실이 바르고 정숙했으나 친정으로 쫓겨나게 되어 의지 할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다.

 

친정의 삼촌 등 어른들은 재가할 것을 권하였으나 향랑은 "내 비롯 상것이나 이부종사야 하오리까"라고 주장하면서 정조를 지켜 오다가 숙종28년(1702년) 오태동에 야은 길재 선생의 충절을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지주중류비 앞 낙동강 오태소(못)에 20세의 꽃다운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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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산부사 조구상이 향랑전을 짓고 삼강행실도의 예에 따라 의열도를 그려 조정에 품신하여 숙종 29년(1703년 6월 5일) 정려가 내려졌다.

 

1992년 구미문화원에서 묘역을 단장하고, 매년 음력 9월 6일 구미시와 열녀향랑추모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향랑의 의열 정신을 후대에 오래도록 기리고자 2006년 5월 향랑을 기리기 위한 사당을 건립해 위폐를 모시게 되었다.

 

한편, 향랑이 죽기 전 초녀(나무하는 소녀)에게 지어주고 같이 불렀다는 애절한 노래는 지금도 산유 화곡(山有 花谷)에 실려 불리고 있으며 국문학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그 가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천하고원(天何高遠)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② 지하광막(地何廣邈)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고)
③ 천지수대(天地雖大) (천지가 비록 크다고 하나)
④ 일신미탁(一身靡託) (이 한몸 의탁할 곳 없구나)
⑤ 영투강수(寧投江水) (차라리 이 못에 투신하여)
⑥ 장어어복(葬於魚服) (물고기 뱃속에 장사 지내리)

 

당대의 문장가 청천(淸泉) 신유한(申維翰)은 산유화구곡을(山有花九曲)을 한문장(漢文章)으로 지었으며 지금도 전해진다.

 

매년 음력 9월 6일이면 향랑시제를 통해 한 남자를 향한 향랑의 절의정신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어 구미시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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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랑에 대한 이야기> 

 

‘열녀 향랑(香娘)’ 추모 시제 열려

봉건사회가 만들어 낸 여인의 한, 시제 통해 풀리길
(2001년 11월 5일 지역내일 기사 중 발췌)

 

 향랑에 관한 사연은 전설이나 소설 속의 허구가 아니라 불과 300여 년 전에 우리 땅에 실존했던 한 여성의 실화이다.


조선조 숙종28년 스무 살의 꽃다운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으로 투신한 박향랑, 당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봉건적 사회질서가 한 여성에게 가한 삶의 질곡을 느낄 수 있다.


열일곱의 나이로 네 살 아래의 임칠봉과 결혼한 향랑은 포악한 남편이 쫓아내는 바람에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계모가 박대하여 숙부에게 의탁하였으나 숙부가 개가할 것을 권하자 불경이부(不敬二夫·두 사람의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의 논리를 내세워 다시 시집으로 가 애걸하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결국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선생의 사당과 지주중류비가 있는 오태동 앞산 아래 낙동강으로 투신하였다.


향랑이 죽기 전에 만난 나뭇꾼 처녀에게 자신의 사연을 담은 노래를 지어주고 같이 불렀다는 6행의 애절한 가사는 형곡도서관 근처의 향랑 추모비에도 기록되어있으며, 지금도 산유화곡에 실려 불리며 국문학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듯 세간에 구전되던 향랑의 이야기는 선산부사 조구상에 의해 조정에 알려지고 숙종29년에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의 명이 내려졌다. 이에 구미문화원 주관 하에 향랑의 묘비가 발견된 자리에 가묘를 만들어 복원사업을 해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직 남아있는 또 다른 향랑의 모습


 일부에서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이 논의되고 있는 요즘 세상에 향랑의 사연은 이미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나 다른 나라의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추모시제를 지켜보던 주민 도경은(주부·형곡동)씨는 “조선시대의 이야기지만 아직도 비슷한 사연을 안고 사시는 제 주변의 한 할머니가 떠오르네요. 저희 시댁의 가까운 친지 분 중에서도 시댁에서 소박맞고 친정 오빠 집에서 사시다가 남편이 죽은 후 다시 그 시댁으로 들어가 큰집조카를 입양해서 키우며 노년을 보내시는 할머니가 계세요”라며 향랑과 같은 사례는 결코 먼 옛날 얘기가 아니라고 했다.


그 옆에 계시던 김남이(78·형곡동)할머니도 “그 당시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게야. 지금은 살기 좋아졌지”라고 거들었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우리 주변엔 향랑처럼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시대적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세뇌되어 살아온 세대들이 많이 실존해있다.


급변하는 현 세태 속에서 열녀 향랑의 추모시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시제를 보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교차되는 것은 변화의 과도기를 거치는 하나의 관문 통과 절차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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