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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달서구 웃는얼굴 아트센터 청룡홀에서 26일 독립투사 박희광선생 오페라 공연

김도형 0 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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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거의 불꽃으로 살다간 영웅' 박희광 창작오페라, 일렉트릭 판소리 음악적 재미 더해

 대구경북 대표 독립운동가 재조명, 기존 틀 벗어난 리딩 형식 최초 접목

 

(전국= KTN) 김도형 기자= 26일 오후 5시 대구실 달서구(문화 회관로 160)에 위치한 웃는얼굴 아트센터 청룡홀에서 창작오페라 ‘박희광’ 공연이 진행된다.

 

달서문화재단 웃는얼굴아트센터 주최 웃는얼굴아트센터, 지트리아트컴퍼니, 박희광기념사업회 공동주관으로 열리는 이번 창작오페라는 코로나19로 인해 공연 기획이 취소될 수 있는 상황에서 오페라에 비대면 리딩 형식을 최초 접목해 무관중 공연으로 첫 선을 보이게 됐다.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시도해온 리딩 공연은 무대세트와 의상, 조명 등이 없이 배우가 대본을 보고 읽는 형식의 공연이다. 이는 정식 공연으로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창작의 한 단계이다.

 

이를 과감하게 오페라에 접목한 지트리아트컴퍼니 테너 현동헌 대표에 따르면 “2~3년 전부터 기획한 좋은 콘텐츠를 사양시킬 수 없어 리딩 형식을 바꿨다. 의도치 않게 새로운 형식에 도전하게됐다.”며 이번 창작오페라 '박희광'의 첫 추진배경에 대해 밝혔다.

 

이날 리딩공연은  주연, 조연 배우들과 합창단 및 정식 오페라로 무대에 오르기로 한 성악가들과 배우들이 모두 리딩 공연에 참가하여 정식 공연의 감동을 그대로 선사할 예정이다.

 

현동헌 대표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거리두기로 공연계에도 큰 타격을 입게 되어 작품에도 어려움이 있지만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어렵게 무관중 공연으로 오는 9월26일 토요일 오후5시에 웃는얼굴아트센터에서, 영상 스트리밍으로 쇼케이스형식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히며 유료티켓으로 관객을 유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올려진다고 해 코로나19를 극복한 비대면 공연 사례를 남겼다.

 

리딩공연은 영상촬영 후 10월에 온라인으로 오픈하게 된다. 창작오페라 '박희광' 리딩공연 영상 촬영 관계로 오페라 공연 5분 전에 입장해야 한다.

 

<창작오페라 '박희광' 리딩공연 연습 현장 사진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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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방문한 박희광 선생 차남 박정용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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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국애족의 불멸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
 

 

경상북도 구미지역 출신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는 1968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1901년 2월 15일 현재 지명인 구미시 봉곡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의 11세손이자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부친 박윤하를 따라 1912년도에 만주로 건너간 박희광 애국지사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만주 봉천성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 후 조선 독립의 의지를 다지며 18세 되던 해인 1922년도에 만주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 특공대원으로서 항일의거와 암살 대원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대한통의부 제5중대에 배치되어 약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만철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 잠복하여 관동군 진로 봉쇄작전에 최초 투입된다. '만철'이란 당시 일제가 만든 남만주 철도 주식회의 명칭이며 연선은 철길을 의미한다. 이후 암살과 테러에 필요한 승마와 수영, 사격, 폭탄제조법, 독침,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고 신분을 감춘채 대한통의부의 암살전문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은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하여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특명을 받고 숙청 작업을 하였다. 1924년 6월 1일에 윤영기 동지의 안내를 받아 무순방면의 고등계 찹자로 활동하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였던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하였다. 암살 현장의 대문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라고 사형선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로 부터 얼마 되지 않은 6월 7일 대낮에는 보민회를 습격, 이용구와 더불어 친일파의 거두였던 최정규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최정규가 미리 피신하여 부하 허윤과 가족만을 사살했다. 또한 박희광은 만주 지린성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 의열단과도 지속적인 교류와 활동을 했다.

 

한편 같은 해 대련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배정자(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타코)를 다롄에서 암살 실패,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 역시 암살 실패로 부상만 입히게 되었다.

 

1924년 7월 2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했고, 같은 날 저녁에는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해 거액 군자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잠복한 중국, 일본 경찰과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 애국지사는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박희광 애국지사와 김병현 애국지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킬 정도의 혹독한 고문으로 수차례 기절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동안의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켜냈다고 전해지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인해 거사의 공범이였던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 신명구도 같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고 한다.

 

이들의 결연했던 의지는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

 

라고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에 남아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1924년 대련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을 받아 20년 세월을 복역한 뒤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하였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그후  박희광 애국지사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인 경교장으로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고, 김구 선생은 박희광 애국지사의 손을 잡은채 한참을 눈물 흘리며 조국을 위해 오랜 세월을 희생 헌신하며 고초를 겪은 박희광 애국지사를 위로하고 가슴 뜨겁게 맞이해 주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한동안 김구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암살로 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고 당시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의 대립으로 인해 좌,우파간의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으며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한 뒤 박희광 애국지사를 비롯해 김구 선생의 일부 측근들은 흩어 지게 되었다. 그 후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너도나도 애국자로 나서는 시절이었고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은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요양과 안정을 위해 문화유씨를 맞아  칠곡군 왜관으로 이주하여 가정을 꾸리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졌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특히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상당수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적된 부외 인맥들을 통해 도리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더욱 가세가 상승하여 오늘날 최고의 부를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박희광 애국지사는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신문기사와 여러 증거 자료들이 모아짐으로서 행적이 증명되었고, 1968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 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게 되었다. 그로 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구국애족의 삶을 마감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 묘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박정용(64세)씨는 현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자 구미 금오산도립공원에 동상과,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내에 흉상이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생가 복원과 추모관 건립은 관계당국의 업무 떠넘기기로 인한 혼선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음을 2013년 3월 1일자 영남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바 있고, 2013년 10월 12일 매일신문 전병용 기자에 의해 다시 한번 거론되며 박희광 애국지사의 구국정신과 나라사랑의 뜻을 알리고자하는 기념사업회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동상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이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립하지 못하다가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하여 시보조금, 시민성금, 문화원 이사와 유족측에서 비용을 모아 1984년 12월 28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현재 둘째 아들 박정용씨가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박희광 애국지사와 관련된 사업을 구미 문화원과 함께 진행, 기간을 정해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혹자는 만주에서 임시정부와 싸우던 일본군 소속의 장교였던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가 적힌 애국지사의 동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겠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거 친일파 여부를 떠나 과거가 떳떳하지 못하고 일제시대의 잔재를 남아있게 한 인물의 글씨가 적혀 있는 박희광 애국지사의 동상 앞에서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역사의 아이러니를 얘기하기도 한다.

 

 2014.02.25 KTN한국유통신문 "구국애족의 불멸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를 기리며" 내용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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