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혁명가의 도시 구미, 통섭의 시대 김재규와 박정희의 화해를 위한 첫단추 필요하다

김도형 0 1,624

1.jpg

 

 

보수언론 혁신진보(?)의 아이콘 박정희와 보수우파였던 김재규의 슬픈 운명, 이제는 풀어야 할 때

통섭의 시대 진정한 지역의 화합과 상생을 원한다면, 영혼을 달랠 합동위령제 추진 필요 

청년 박정희 정신을 높이 평가한 장세용 구미시장, 지역 발전 위해 고 박정희 대통령 추모식 초헌관 맡아야

 

보수집단으로부터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년은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으로 인해 매우 불편한 관계였고 핵개발 시도로 인해 미국의 가시같은 존재로 각인됐던 시기이기도 했다.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배후를 짐작하게 하는 각종 정황들이 있긴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집단에서는 미국 성조기와 박정희 대통령을 함께 내걸며 보수의 상징으로 추앙하고 있는 코메디와 같은 현실을 연출하고 있다. 보수를 대표하는 언론인 뉴데일리에서는 일찍이 대한민국엔 진정한 진보주의자 두 분이 있었다며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을 손꼽기도 했다.

 

구미는 혁명가의 도시다.

 

혁명의 사전적인 의미는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과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하는 일 그리고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을 뜻한다.

 

10.26사건을 바라보는 일부 시각은 이 역시 혁명의 발로라는 견해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구미는 근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두 사람의 혁명가가 있다.

 

구미 선산이 고향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동향 후배이자 육사 2기로 동기이다.(이하 이름 호칭) 

 

김재규는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일본육군이라는 의견도 있음)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했다.

 

김재규가 장교로 재직 중 부대 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되어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하기도 했다. 1952년에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김재규는 1954년 육군 제5사단 36연대장을 거쳐 육군 제101연대장을 지냈고, 1956년 육군 준장 진급, 1957년 육군대학교 부총장을 지냈다. 1963년 부터 1973년 까지 보병제6사단 사단장으로 있었다.

 

김재규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된 사실이 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난 이후로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해 18년간 박정희 정권을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신징에 위치한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징 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박정희가 쓴 혈서 사건은 유명한 일화로 당시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기사에 실렸다. 이를 두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행위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오늘날 민주화투사로 이따금 회자되고 있는 김재규 역시 일본 해군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일제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기 위한 엘리트 장교로서의 행보를 걸었던 사실이 있다. 그렇다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제기한 박정희에 대한 친일파 규정은 형평성면에서 다소 어패가 있어 보인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났고 일제 점령국 세대인 박정희는 어린시절부터 일본으로부터 배운 교육관으로 인해 자신이 일본인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육에 임하는 태도와 패기는 그 어떤 학생들보다도 남달랐다.

 

박정희는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관동군장교로 근무했다. 1946년 7월에 귀국한 박정희는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복무, 형인 박상희가 구미항쟁 당시 경찰에게 사살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불타 남조선로동당원으로 활동했다.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박정희는 정보국에 남조선로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과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게됐다.

 

젊은시절 극적인 삶을 산만큼이나 박정희의 5.16군사정변 이후의 행보 역시 근대사에 있어 대한민국 변화의 마중물이자 큰 물줄기 역할로 족적을 남기며 18년 오랜세월 독재정권의 권좌에 머물렀다. 또한 항일 좌파 독립운동가를 제외한 독립운동선양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물론 박정희는 자신의 친일행적과 남로당 활동 이력을 덮고 만회할 기회로 삼았을 수도 있으나 현재의 대한민국은 독립운동가 선양에 있어서 성공적이다.

 

유신독재시절 당시의 국민들의 뇌리 속에 공고히 박힌 의식은 박정희 정권에 대해 저항만 하지 않으면 먹고살만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식되고 있고, 또한 보릿고개의 종지부를 찍고 배를 곪지 않게 해줬다는 것만으로도 위대한 인물로 묘사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춥고 배고팠던 시절의 기억은 대다수 궁핍했던 삶을 산 국민들에겐 평생을 잊지 못할 우리네 삶의 아픈 흔적이자 민중역사로 남아있기 때문이고 그 가운데에 보릿고개를 넘기게 해 준 박정희라는 영웅이 존재했다라고 인식하게 된 시대적인 절묘한 상황 탓이기도 하다.

 

혹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제일 평화로웠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북한은 미국에 관한한 적대적이었지 남한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청와대습격사건과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배제한다면 1970년대의 남과 북은 비교적 평온했다.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 선언을 발표함으로서 남북간의 군사적 대결을 지양했다. 같은 한민족간에 적대적 경쟁관계가 아닌 “어느 체제가 보다 국민을 더 잘 살게 하느냐?”고 하는 ‘선의의 경쟁’을 제의했다. 이와 동시에 ‘인도적 문제의 해결과 통일기반 조성에 기여할 획기적인 조치에 대한 의지도 피력하기도 했다.

 

당시의 역사적인 남북적십자회담으로 남북대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했고 남북간의 벅찬 감격과 기대속에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모두 7차례 개최된 사실이 있고 한반도는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남북간의 이념차이와 정치적인 괴리는 한민족 통일을 기약 없는 미래로 돌려 한반도의 앞날은 캄캄한 지경에 이른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 울려퍼진 몇발의 총소리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이는 유신독재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새로운 독재의 시작이기도 했다.

 

사건 당시 시대상은 내부적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등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 요구가 거세고 일고 있을 때였고 외부적으로는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서 주한민군을 철수시키겠다고 해 남북한 대치 긴장상황에서 악재로 거듭났다.

 

박정희 정권의 위기는 독재가 가져다 준 당연한 결과였으나 무엇보다 주한미군 철수는 당시의 남한 군사력이 북한에 비해 열세였던 것으로 인해 남한 군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던 위기 상황도 있었다.

 

발터 PPK권총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군사재판 1심 최후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체적인 내용으로 보아 김재규는 보수우파의 대표격이다. 오히려 혁신진보주의였던 박정희는 미국의 위협을 무릎쓰고 핵무기 개발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추구했고, 김재규는 나라의 안위를 위해 미국의 통제를 바랐던 것이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변론 내용 중 적화방지와, 혈맹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내용은 10.26의 발생 배경이 미국과도 무관치 않다는 사실을 짐작케해준다.

 

10.26 사태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으나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했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1년 1월 18일 한 재미 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다.


10.26사태 전으로 되돌아 가보면 당시 한미간의 긴장 분위기는 극한으로 치다르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줄기찬 요청에도 지미 카터는 주한미군철수를 철회하지 않았고 이는 결국 박정희가 ‘핵 카드’를 빼들게 만드는데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북한의 침략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방안이 바로 전략 핵무기뿐이라는 신념으로 박정희는 핵개발 의지를 지미 카터에게 강력히 어필했다. 이러한 시점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권력의 수장인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이 희대의 역사적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중앙정보부부장은 막강한 권력의 수장으로 대통령의 심복 중의 심복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였고 충성심이 명약관화해야만 오를 수 있는 자리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5.16군사정변의 2인자인 김종필이 만든 것으로 박정희 체제 유지의 시금석있다.

 

10.26사태가 발발하자 이 사건조사를 진두지휘한 합동수사본부에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안가의 소연회 자리에서 차지철 경호실장으로부터 모욕을 당한 관계로 순간 우발적으로 범행을 자행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0.26 사건 발생 전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완공기념식에 참석한 뒤 헬리콥터를 타고 안전가옥으로 귀경 중이었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전화를 걸어 연회 준비를 요청했다.

 

김재규는 박선호 의전과장에게 연회 준비를 지시했고, 박 과장은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 모델 신재순을 연회에 참석시키기 위해 대기시켰다. 한편으로 이날 김재규 부장은 차지철 실장으로부터 연회준비 요청 전화를 받은 후 엉뚱하게도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식사 약속을 한다.

 

궁정동 안가는 여러 건물 동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연회준비장 옆의 다른 동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술자리가 준비됐다. 이와 함께 김재규 부장은 중앙정보부 김정섭 제2차장보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저녁약속이 선약됐다며 대신 참석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김재규 부장의 범행이 합동수사본부에서 발표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즉,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모든 권력은 육군참모총장에게로 간다.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기 때문이다. 정승화 총장이 초청된 이유는 대통령의 유고를 염두에 둔 계획된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김재규 부장의 계획된 범행이라면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KCIA 김재규 부장은 CIA(미국 중앙정보국)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핵개발로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할려는 시점에 CIA 터너 국장이 김재규 부장을 미국으로 초청한 일이 있다. 박정희는 김재규 부장에게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철회를 위해 CIA가 나서달라는 부탁을 할 것을 지시했다.

 

김재규 부장이 귀국 후 워싱턴 정가에서는 남북한의 군사력 데이터를 비교분석한 문서가 나돌기 시작했다.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월등히 우세한 관계로 주한미군 철수시 남한이 점령당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워싱터포스트’에 특집으로 게재됐으며 이로 인해 미국의 정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으로 주한미군 중위로 파견된 CIA요원 스티브는 김재규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미국의 사상을 주입시킨 인물이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핵개발을 미친짓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미국을 추종하는 성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김재규 부장을 스티부는 적극적으로 세뇌시키다시피하며 배후에서 한국사회를 견제했던 것으로 보고 있는 견해도 있다.

 

합동수사본부 심문 당시 김재규는 자신의 뒤에는 미국이 있다고 절규했다고 한다. 10.26 사건을 계획한 또다른 이유로는 김재규 부장이 부마사태 현장을 목격한 것 때문이기도 하다.  김재규는 부마사태 당시의 반정부 시위는 좌익과 불순 노동자 그리고 학생들 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도 가담한 큰 규모의 항쟁이라고 판단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주로는 더 큰 일이 날 것을 염려한 까닭도 김재규의 거사 의지에 일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한편으로 부마사태로 박정희 정권의 파행을 목격한 김재규는 그의 심복중의 심복이었던 김학호 중앙정부부 감찰실장과 ‘쿠데타 도상연습’을 숱하게 반복 연습했다.

 

도상연습은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요인 150여명을 밤새 연행함으로서 국가를 통제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김학호 감찰실장에 따르면 이때 도상연습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신로는 “김학호, 시작해”였다고 한다. 김재규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나라의 운명이 뒤집어질 수도 있었으나 막바지에 접어들어 중앙정보부 대신 육군참모본부로 가는 길을 택했다. 사건 직후 김재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중앙정보부로 향하던 중 100미터여를 앞두고 차를 돌려 용산 육군본부 벙커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충분히 준비했던 완벽한 시나리오대로 진행이 가능한 상황에서 김재규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10월 26일 사건 당일 밤 김재규의 영어 선생 역할을 해오던 CIA요원 스티브는 오산 미군 비행장에서 도쿄로 향했다. 오비이락과도 같이 나라의 운명을 뒤집은 큰 사건 발생과 동시에 스티브의 행동은 석연치 않은 의심을 갖게 만든다.

 

사건 당시 주한미군 정보공작 총책임자는 존 천이었다. 서울대 영문과 출신의 인재로 CIA에 포섭되어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 후 CIA본부에서 교육받은 정예요원이 된다.

 

존 천의 첫부임지인 도쿄 태평양사령부 근무 도중 5.16군사정변이 발생했고, 이와 동시에 존 천에게 한국 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에 대한 조사 임무가 떨어졌다.

 

군사정변의 주인공인 박정희에 대한 정보는 당시로서는 베일에 싸였다. 다만 박정희 과거 이력이 남로당 당원 출신인 것은 분명했다. 존 천은 한국으로 와 거사를 치룬 박정희를 만나 얘기를 들었다. 박정희는 감정이 격해져 눈물을 보이며 조국인 대한민국의 비참한 현실에 분개해 나라 재건을 위한 애국심의 발로에 봉기했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눈물에 진정성을 느낀 존 천의 보고서에 따르면 군사정변의 장본인은 좌익이 아니라 반공주의자이자 나라를 걱정하는 훌륭한 군인으로 기술되어 있다. 존 천은 박정희가 우국충정의 일념으로 거사를 벌인 것으로 봤던 것이다.

 

결국 이 보고서에 따라 미국은 박정희의 군사정변을 용인했고 존 천은 박정희의 최고 은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CIA의 뿌리를 가진 존 천은 주한민국 정보공작 총책임자의 위치에까지 오르며 박정희의 후견인 역할을 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존 천은 10.26 발생 이후 3일 뒤인 10월 29일 전역을 했다. 의문스러운 점은 존 천이 10월 26일을 기점으로 하여 감기로 10월 25일에 용산 미군병원에 입원을 하고 10월 27일 퇴원을 했다는 점이다.

 

대중소설가인 김진명 작가는 10.26사건의 역사적 진실을 알기 위해 수소문 끝에 존 천을 찾았다. 김진명 작가에 의하면 존 천의 갑작스러운 전역에 대해 묻자. ‘하우스먼’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고 한다. 하우스먼은 미군의 터주대감이자 한국 정계에서 유명인이었다고 한다. 하우스먼은 박정희는 물론이고 김대중과 김영삼과도 밀접한 교류를 가졌던 인물로 알려져있다.

 

박정희를 뒤에서 캐어해주는 역할이었던 것으로 보이던 존 천은 1979년 10월 25일 공교롭게도 감기 증세가 있었다. 하우스먼은 용산부대의 병원으로 갈 것을 권했고 주사를 맞게된 존 천은 깊은 잠에 빠지게 됐다고 한다. 존 천이 깨어나자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소식으로 미군 부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우스먼에게 배신감을 느낀 존 천은 곧바로 전역을 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다.

 

김진명 작가는 존 천과 하우스먼의 대화 내용을 존 천의 말을 인용해 알렸다.

 

하우스먼은 부득이한 상황에서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면 최후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존 천에게 알려주기로 했다고 하며, 이런 상황을 감지한 존 천은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과 담판을 지을 기회를 보장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라면 미국이라는 거대한 존재가 10.26 그날의 배후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하게끔 만들 수 있다.

 

김 작가는 김재규 부장이 사건 직후 중앙정보부 100여 미터를 앞두고 육군참모본부로 가도록 지시 또는 유도를 한 연락책을 스티브라는 인물로 보고 있다. 김재규 부장의 대한민국 역사의 전환점을 만든 쿠데타는 미스테리만 남긴채 실패했고 의문을 남게 만들었다. 그동안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비밀리에 축적되었던 핵 개발 관련 기술이 사라져 버린 일은 결국 핵 개발을 강행하던 박정희 정권의 질주를 막기 위한 미국과의 충돌로 귀결된다. 

 

지난 2004년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에서는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해 민주화 기여 여부를 두고 심사했다. 당시 김재규는 “정당하게 재평가받아야 할 것인가”와 “민주화 유공자에 대한 모독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며, 10.26에 대한 재평가가 사회적 논쟁으로 광장으로 나올 시점이었다.

 

당시 유족들은 “대통령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유신독재를 무너뜨리고 유신독재에 의해 파괴된 민주헌정 질서의 회복에 기여했다”고 주장했고 변호를 맡은 강신옥 변호사 등도 “10·26이 없었다면 유신독재를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겠느냐. 학생운동과 재야운동을 당시에 열심히 했지만 유신독재를 쓰러뜨릴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1980년 1월28일 김재규 부장이 재판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본인이 결행한 민주회복을 위한 혁명은 완전히 성공한 것으로, 10·26 이후 유신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자유민주주의는 회복되었다”라고 주장했다.

 

한편으로 현대사 연구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 정권은 당시 부마항쟁을 비롯한 일련의 민중저항을 통해 어차피 붕괴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며 김재규의 행위가 민주화에 기여도가 크지 않다라고 했다. 이는 후에 전두환 군사정권 체재가 들어선 것 등이 반증이 되며 당시 재야 원로인 백기완 선생 역시 “박정희 내부 권력의 모순이 더 격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사건”으로 보며 민주화 운동의 흐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입장을 밝힌 사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한민국 발전에 영향을 끼친 공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김재규 전 중앙정부부장에 대한 역사적인 인식 또한 다양하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한 오늘날 김재규 부장에 대한 인식은 민주주의 투사로서도 간간히 언급된다.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와 같은 김재규 평전에서는 10.26에 대한 역사적인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어 보인다.
 
미국의 개입설과는 다르게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김재규의 단독 행위였다고 보는 견해는 역사를 긍정의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일 수도 있다.

 

1인 소수자에게 정치권력이 오랜세월 집중되어 온 탓에 독재의 비참한 말로를 보게된 남한에 비해 김일성 유일주체사상으로 시작된 북한의 독재는 현재도 무소불위의 철옹성과도 같다.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쟁취한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은 혼란한 정치로 얼룩진 남한의 시대적 상황에서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기도 했다. 기존의 틀을 180도 뒤바꾼 5.16군사정변은 보수집단에서 박정희를 혁명가로 인정하고 있다. 박정희는 엄밀히 따지면 혁신진보주의자였던 것이니 이는 시대의 웃지못할 아이러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리는 곳이 보수의 성지라고 불리는 구미의 현실은 한편의 촌극이라고 볼 수 있다.

 

혁명가의 대명사 체 게바라, 혁명적인 삶이란?

 

아르헨티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과 대학에 다니던 평범한 청년이었던 체 게바라는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 여행을 하던 중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과 고통을 체험하게 되자, 이들을 돕기 위해 1956년 쿠바 반정부 혁명군에 들어간다. 의사로서 부상병을 치료했지만 곧 전투에 참가해 큰 활약을 한 체 게바라는 혁명 성공 후 쿠바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됐고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국립 은행 총재와 산업부 장관 등 쿠바의 핵심 지도층이 된다.

 

쿠바 대혁명 6년 후 체 게바라는 집권자였던 카스트로에 이어 큰 권력을 가졌음에도 콩고, 볼리비아 등의 혁명을 지원하기 위해 진정한 혁명가답게 쿠바를 떠났고 1967년 게릴라군으로서 볼리비아와 대항하다 정부군에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이상적인 사회 실현을 위한 치열한 삶은 지금도 전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고 있다.
 
체 게바라를 생각하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반대를 위한 반대에 익숙했던 대한민국 정치역사에서 혁명가로서 민족의 안위를 위해 5.16군사정변을 일으켰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뒤 미련없이 권좌에서 물러났다면 세종대왕 이상의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간의 긴장상황과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견제 등 내외적으로 통제받던 한반도 상황에 그 누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제대로 뜻을 펼칠 수 있었을까?

 

역사적으로 돌이켜 보면 박정희의 장기독재집권은 미국의 용인없이는 불가능했고, 박정희는 어떤면에서는 미국에 당당했다. 이는 목숨을 내놓고 감행했던 5.16군사정변의 결기로부터 기인한다고 본다.

 

박정희와 고향이 같고 교사를 지낸 경력도 같아 가까이 지내게 된 김재규는 1954년 9월 5사단 36연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박정희가 사단장으로 부임하여 상관이 되면서 재회하게 된 인연으로 5.16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수행했다.

 

같은 고향의 인연이 끝내 악연이 된 두 사람이었으나 박정희의 김재규에 대한 신뢰는 두터웠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말하는 김재규에 대해 자신의 후원자요 부모형제나 다름없었던 사람을 살해한다고 하는 것은 그 목적과 동기를 아무리 미화하고 정당화한다고 해도 그 행위는 반인륜적이며 패륜적인 암살사건에 지나지 않다라고 보는 견해도 팽배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에서는 그렇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권유지의 희생양이 되어 부지불식간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민주화운동가들을 생각한다면 박정희의 운명이 불가(佛家)에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하고, 유가(儒家)에서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랜 악연을 끊고 새시대 새로운 기치를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나쁜 기억보다는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기고 과거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자세로 나아가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와 김재규간의 오랜 악연의 실타래가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며 지역에서 두 위인간의 합동영혼위령제도 추진되어 오랜 갈등이 해소되길 기원한다.

 

지난해 10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아시아포럼21에서 장세용 시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개인적으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에 동의하고, 청년 박정희의 현실 개혁정신은 남자로서 공감하는 바다"라는 말과 함께 “평가는 전임 남유진 시장이 퇴임 때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라 한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

 

장세용 시장은 민주화운동가로서 활동해온 과거의 이력이 있고 지난해 박정희 대통령 추모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핍박당했던 민주화운동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를 지키는 양심어린 행동이다. 하지만 구미에서 박정희의 과거에 매몰된 지역의 정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또한 정치적으로 역공만 펼치는 지역의 분란거리로 자리매김한지 이미 오래다. 따라서 지자체를 책임지는 지자체장으로서 지역 융화를 위한 차원의 초헌관 수락은 바람직한 것이다.

 

지역의 발전을 위해 한 도시에 좌와 우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행보를 보이는 것 또한 지자체장으로서의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보며 초헌관에 참석했다하여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또한 과거의 역사에 고착된 우매한 행위일 수 있다. 통일 준비가 시대의 화두가 된 오늘날 과거를 용서하고 밝은 미래를 추구하는 것 또한 국민의 의지에 달려있다.  

 

한편으로 천륜을 저버린듯한 끔찍했던 10.26 당일의 모습에만 매몰되어 김재규라는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 언급 자체를 터부시하고 갈등으로 치달을려고만하는 지역민들이 이러한 과거의 슬픔을 딛고 일어설 때 박정희 혁명정신의 참된 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간의 한맺힌 과거를 풀어주기 위한 지역융합 차원의 영혼 합동위령제와 같은 파격적인 첫발을 내디뎌야만 한다. 이는 통섭의 시대에 소통과 더불어 이질적이었던 것을 융합해 새로운 가치 창조를 해야만 하는 시대의 당면과제이기도 하다.

,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