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박사칼럼] 구미가 낳은 한국 최초 영화감독 김유영의 궤적을 찾아서 재조명하자!

김도형 0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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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대학교 평화문제연구소 연구위원, 구미회 부회장

 

 

 

 

한국최초의 영화감독 김유영은 누구인가?

 

김유영(金幽影, 1908. 9 ~ 1940)은 한국 영화의 기초를 닦은 최초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이다. '아리랑'의 나운규 감독보다 선배이며 동시대 인물로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의 대표적인 한국영화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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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원호리 들성지 태생 김유영 영화감독

 

김유영의 본명은 김영득(金榮得)으로 1908년 대한제국 순종2년에 경북 선산군 고아면 원호리 12번지에서 태어난다. 지금 현재 들성지 맞은편에 있는 원당골에서 선산김씨(善山金氏)로 지역에서는 일명 들성김씨로 불리는 집안이다. 도시개발의 영향으로 지금은 옛 모습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으며 김유영이 태어난 자리는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난 천재 영화인 김유영!

 

김유영이 태어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봐야 당시의 지식인들이 어떠한 길을 가게 되었으며 어떠한 사고를 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시대와 인물을 해석하고 제대로 평가 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시대적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살펴봐야 해답을 찾을 수가 있다.

 

민족주의 극작가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감독 김유영이 태어나던 때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던 때였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협상조약, 한일협약을 맺는데 이것이 을사보호조약이다.
 
국운이 다한 나라에 태어나 슬픔과 절망으로 산자들이 영혼은 과연 어떠할까?

 

국제적으로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일본의 가쓰라와 미국의 태프트가 밀약을 맺는데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관리 한다는 밀약을 맺는데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밀약이다. 1905년 8월에는 일본과 영국이 영일동맹조약을 맺어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도 감리 및 보호의 권리를 영국으로부터 인정받았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과 강압적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행하는데 김유영이 태어난 1908년에는 일본이 조선을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한일 협약에 대한 엄청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한일협약 체결에 스티븐스(Stevens)은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외교관이며 일본외무성에 일하고 조선의 외교 고문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선은 일본의 보호정치를 희망하고 바라고 있다” 라고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스티븐스(Stevens)은 결국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에게 사살된다. 김유영은 한국이 일본 식민지로 들어가는 초입에 우리가 살고 있는 구미에서 태어나게 난다.
 
구미에서 태어나 젊음을 한국영화에 씨를 뿌리다.

 

김유영은 1915년 구미보통학교를 입학하고, 1920년에는 지금의 대구 경북고등학교인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을 하여 1925년 졸업한다.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 영화계에 투신하였다. 이러한 것을 보았을 때 김유영은 당시 상당한 엘리트였으며 집안도 부유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카프(KAPF)의 연극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안종화(安鍾和)·이우(李愚)·이경손(李慶孫) 등이 1927년에 영화예술 연구를 위해 조직한 조선영화예술협회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카프파 영화인들을 끌어들였다. 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조직한 대표적인 문예운동단체이며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다.

 

1928년에 무산계급 농민의 저항을 그린 「유랑(流浪)」을 처음으로 감독하였으며, 1929년에는 무산계급 민중의 서러움과 투쟁을 그린 「혼가(昏街)」를 감독하였다. 1931년에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대립하고 싸우는 계급투쟁의 영화 「화륜」 제작한다. 김유영은 일제의 검열과 상업적 흥행성의 양면을 의식하면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작품을 실천해보고자 노력했다.

 

김유영은 청룡영화제의 전신인 조선일보영화제를 만든 장본인이다.

 

김유영은 1938년에는 이구영(李龜永)·이명우(李明雨)·김태진(金兌鎭)·안종화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제인 ‘조선일보영화제’를 개최하였고, 소리없는 무성영화 아리랑, 임자 없는 나룻배, 소리 있는 발성영화 심청전, 오몽녀 등이 입상하게 된다. 이 조선일보영화제가 현재의  청룡영화제의 전신이다.

 

1939년에는 최금동(崔琴桐)의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작인 「애련송(愛戀頌)」의 감독을 맡아 재기하였고, 1940년에 「수선화」를 감독으로 개봉을 앞두고 죽게 된다. 그는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침탈하고 공장에서 한국 노동자와 일반 민중의 삶을 수탈하는 것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던 민족주의적 영화를 만든 인물이다.

 

김유영은 카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김유영은 신흥영화동맹이라는 독자적 단체를 통해 영화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김유영은 카프가 1930년에 들면서 신흥영화동맹을 해산하고 조직을 개편하려는 결정에 반대하여 카프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한국문학의 거장들의 산실 “구인회”를 만들다.

 

김유영은 영화 '유랑'과 '혼가'의 흥행의 실패로 일본 유학을 떠나 1933년에 돌아와 카프 퇴맹계를 제출한 뒤 이종명과 함께 순 문학단체인 '구인회'를 설립한다. 1933년 7월22일 서울 광교의 양식당 '낙원그릴'에서 첫 발회식을 가진 구인회에는 김유영,이종명을 필두로 편석촌 김기림, 가산 이효석, 상허 이태준, 유치진, 조용만, 정지용, 이무영 등 당대 최고의 문학인 9명이 참여하게 된다.

 

당초 김유영은 카프에 대항하는 단체 조직을 모색했으나 조용만의 만류로 사상을 배격하는 순수 문학단체 조직으로 그 방향을 선회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인회는 1933년 김유영과 조용만,이종명이 만나 단체 결성을 하자는데 그 뜻을 같이한 것이 계기가 되어 태동하게 되는데, 동년 6월 13일 조용만이 정지용을 만나 단체 결성 취지를 설명하게 되고 정지용의 참여를 이끌어낸데 이어 정지용이 이태준을 추천함으로써 급진전되기에 이른다. 한국 최초의 순문학단체 “구인회”가 이렇게 해서 공식화되는 것이다. “구인회”는 상허 이태준이 제안한 것으로 당초 회원수를 9명으로 고정한다는데 따른 것이다.

 

이후 구인회는 이종명 · 김유영 · 이효석이 탈퇴하고, 소설가 박태원 · 시인 이상 · 시인 박팔양이 가입하였으며, 다시 유치진 · 조용만 대신에 소설가 김유정 · 평론가 김환태로 교체되면서 그 맥을 이어간다. 구인회는 1930년대 경향문학이 쇠퇴하고 문단의 주류가 된 이들은 계급주의 및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순수문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창립 4년 만에 해체된다. 구인회는 이상과 박태원이 중심이 되어 <시와 소설>이라는 동인지를 펴냈다.

 

암울한 시대를 극복하고자 진보적 문예운동을 펼치다.

 

1934년 2월부터 12월까지 카프(KAPF) 회원 80여 명이 검거된 사건인 “신건설사사건”(新建設社事件)으로 일명 전주사건이 일어난다. 김유영도 9월 전북 금산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극단 “신건설”은 진보적 문예운동을 추구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직속 연출극단이다. 1934년 신건설 창립작으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제작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했다.

 

 1934년 신건설이 지방 공연 중일 때, 전북경찰서 고등계가 중심이 되어 신건설사 회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처음에는 금산에서 한 학생이 가지고 있던 신건설의 전단이 빌미가 되었고, 전북 지역을 시작으로 차츰 확대되어 경성부와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등지에서 남녀 약 7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주로 학생, 교사, 기자, 배우 등 지식인들이었다. 김유영은 이 사건으로 박영희, 윤기정, 이기영과 함께 징역 2년형을 언도받은 뒤 석방됐다.

 

김유영의 영화 ‘애련송’은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가 주위의 모함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신년 설날 개봉에 맞춰 기획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김유영의 몸은 이미 정신적 방황에 이은 극도의 가난과 폭음으로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구미가 낳은 서른셋의 천재 엘리트! 안타깝게도 빛을 보지 못하다.

 

김유영은 자신의 유고작인 되어 버린 ‘수선화’를 찍을 무렵 이미 지병인 신장염이 악화, 수레에 실려나와 ‘레디고’를 외칠 정도였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돼서야 병원에 입원한 김유영은 결국 영화 ‘수선화’ 의  몇 장면을 남겨 놓은 1939년 11월25일 서른 세 살의 짧은 나이로 아쉬운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영화 수선화는 김유영 사후 조감독 민정식에 의해 완성됐다.

 

1940년 8월 13일 서울 성보극장에서 열린 ‘수선화’ 시사회장은 김유영을 초모하는 수많은 영화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다시한번 애도하게 된다. 김유영에 대한 이 같은 애도는 곧 한국영화에 대한 만가(輓歌)로 이어졌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영화인협회(회장 안종화) 일본의 명령과 통제를 받는 단체가 기능 증명서 없이는 영화 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영화인등록제를 실시했다. 이는 일제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내선일체를 외치는 영화전선에 영화인들을 직접 동원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시대의 아픔과 괴로움은 김유영의 삶을 짓밟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김유영은 한국영화를 최초로 시작해서 이끌고 대중화를 선구자적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한국사람들 모두가 나라를 잃은 슬픔과 괴로움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아마 지식인이나 천재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한반도에 산 모든 이가 그랬던 것처럼 김유영의 삶도 격랑이었고 거칠고 모질었다. 요절한 김유영의 삶과 영화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평가받지도 정립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평론가 김수남씨는 “김유영의 후기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과 뚜렷히 구별되는 탐미적이고 서정적인 색채를 띠는 작품”이라며 “이는 일제 압력으로 그가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순수 멜로물을 만들 수밖에 없던 데 따른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 시기에 김유영의 영화 제작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는 영화평론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서광제 같은 카프 영화인의 경우 이미 1938년에 최초의 일제 어용영화라 일컬어지는 ‘군용열차’를 제작했으며 대다수 카프 영화인이 변절해 친일 행각을 벌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김유영의 작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여명기 한국영화사를 빛낸 작품으로서의 의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사에서 김유영의 요절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의 성과와 업적은 빛을 보지 못했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영화를 만들던 김유영은 서른셋에 죽었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을 살았다.

 

따라서 분단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21세기, 그가 남긴 성과물은 통일된 민족 영화사를 위한 남북영화의 의미 있는 접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재조명되어야할 부분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김유영 선생 사후 50여년이 지난 1993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여명기 한국영화를 밝힌 개척자로, 암울했던 일제시대 민족해방의 횃불을 높이든 민족주의자로서의 공적이 비로소 인정되는 순간이었다.

김유영을 위해 한국의 거장들이 눈물을 흘리다.

 

일제시대 소설 『상록수』, 시(時) 『그날이 오면』으로 유명한 심훈(沈熏)선생이 김유영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한 글이다.

 

뜻하지 않게 안타가운 일이 항용 우리에게 있는 줄 알면서도 존경하는 가까운 벗 그는 갔다. 영원의 문청이라고 지금으로부터 영화감독을 연구하겠다고 스스로 지어서 검사하였다. 이럼을 보아도 얼마나 바램이 큰 것을 알고도 남는다. 헌데 그만 가버리다니 설음이 넘쳐서 나는 울지도 못하겠다.

 

'천재는 일직이 죽는다'라느니 그래서 그는 아주 갔단 말인가. 평시에 날더러 '군은 약해서 탈이요 탈이야(혼자말로) 오래 살어야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거요 날보오 날보(배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짹기며) 엣참 어찌 그리 침울하며 사색이 깊소. 나를 우리집에서는 하도 명랑하고 잘 생겨서 화초라고 한다오. 하하하' 이런 말을 글세 여러번 되풀이 하였다.

 

그리고는 심신의 고심이 많은 나는 여러 벗의 한 사람으로서 심형은 내 무덤 앞에서 묵도하고 황혼의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리는 것을 상상한 일도 있었다. 이 무슨 나로서의 모순인가. 의리 내가 살어서 우리의 자랑 문당의 용아 영화계의 중진인 고 훈형의 별세를 설어워하다니-형의 몸은 갔으나 형의 예술은 길이 남어있으니 좀 그윽히 덜 설고나.

 

김유영의 추모비가 고향땅에 외롭게 서 있다.


김유영 선생의 기념비는 구미시 고아읍 원호리 원호초등학교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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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기념사업회가 2009년도에 구미시의 도움을 받아 세운 것이다. 당시 들성지 공원이 완공되면 공원 안으로 옮겨 준다는 구미시의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구미에서 한국최초의 영화감독 김유영의 영화제를 만들고 세일즈하자.

 

필자는 김유영 선생을 구미시가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유영선생이 만든 “조선일보영화제”가 한국영화계의 청룡영화제의 전신이다. 한국의 모든 영화배우들이 청룡영화제에서 상을 타고 싶어 한다고 필자는 알고 있다. 구미에는 문화가 없다. 관광자원도 없다. 억지로 만들어 내고 있는데 예산만 투입하지 다수가 즐기지도 못하고 소수만 즐기는 관광이나 문화가 많았다는 것이 정설일 것이다.

 

구미를 한국독립영화인들의 메카와 성지로 만들자.

 

필자의 생각으로 김유영선생을 재조명하면서 구미에 영화평론가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해서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전국의 독립영화인들을 초청하여 구미시가 한국 영화의 씨를 뿌린 곳이고 앞으로 한국영화에 많은 투자를 하는 메카가 될 것이다. 이렇게 비전(vision)과 로드맵(roadmap)을 제시한다면 단시간은 아니라도 한국영화의 성지가 될 수 있으며, 전국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지 않겠나 생각한다.

 

낙동강영화제, 영남영화제 이런 것도 기획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지금 한국에는 독립영화인들이 엄청나게 많다. 그들을 잘만 이용하면 구미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의 애니메이션과 만화가들은 부천시에 다 있다. 부천을 배우자.

 

우리나라의 만화가들은 인천광역시 부천시에 다 모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시와 부천시가 만화 애니메이션에 대한 투자와 지원을 하기 때문에 전국의 만화가들이 부천시에 다 모여 있다.

 

우리도 경북도와 구미시가 김유영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영화진흥에 대한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한다면 단기간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지만 점진적으로 문화가 척박한 구미에서 적어도 영화에 대한 담론이 일어나지 않겠나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관광과 도박의 도시는 사막 한가운데 만들어졌다. 하고자 한다면 할 수 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스는 미국 뉴멕시코주의 사막 한 가운데 인공적으로 도시를 벅시 시걸(Bugsy Siegel)이 만들었다. 당시 대다수가 미친 짓이고 안된다고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벅시 시걸은 개인의 돈으로 라스베이거스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성공한 도시가 되었다. 우리 구미도 영화, 음악, 미술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실리콘밸리도 사람의 손과 두뇌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그리고 미국의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를 한번 보자. 실리콘밸리는 캘리포니아주의 포도농사를 짓던 황무지 계곡에 인공적으로 건설된 기업도시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재가 모여들어 미국의 싱크탱크(Think tank)와 미래첨단산업을 이끄는 메카가 되었다. 그리고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전세계 인재들은 저마다의 미래와 첨단산업을 개척하고 현실로 펼쳐 보이고자 지금도 전세계에서 모여들고 있다.

 

 <매일신문 2009.4.28일자 보도내용>


민족성 짙은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여명기를 밝힌 영화감독 김유영(金幽影·1908~1940)의 추모비 건립 등 기념사업이 구미지역에서 추진되고 있다.

 

김유영 기념사업회(회장 김경모·상우 엔지니어링 대표)와 구미시에 따르면 김유영은 구미 고아읍 원호리 출신으로 구미지역 학계·영화인·문학인 등 지역문화계 인사 30여명은 지난해 10월 '김유영 기념사업회'를 발족했으며, 올 초 구미시의 지원으로 1차 기념사업인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기념비는 김 감독의 생가 마을인 고아읍 문성지 공원에 설치하며 오는 7월쯤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이와 함께 기념사업회는 올 하반기에 김 감독에 대한 학술대회 및 시사회도 열 계획이며, '김유영 단편영화제'를 개최해 이를 지역의 대표적 문화축제로 만들 방침이다.

 

김유영 기념사업회의 신상영 사무처장은 "시민들의 자발적 동참으로 김 감독을 기리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결집되고 있다"며 "김유영의 가치와 위상을 재조명해 국민적 문화관광 자원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김유영은 1915년 구미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검열에도 불구하고 1928년 최초의 카프영화 '유랑'(流浪)을 비롯해 '혼가'(昏街), 1931년 '화륜'(火輪), 1938년 민족주의 색채가 짙은 탐미주의적 성향의 영화 '애련송'(愛戀頌), 1939년 '수선화' 등을 발표했다.

 

또한 한국 순문학을 이끈 '구인회'에 직접 간여하며 창립을 주도했고, 현 청룡영화제의 전신인 조선영화제 창립을 주도하는 등 일제 강점기 영화예술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정부는 그에게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구미·이창희기자

                                                           

김유영 탄생 100주년 기념>>>>>>>>>>7편 

 

유성(流星), 그 짧고도 선명했던 삶의 궤적/시대적 격랑만큼 파란만장했던 생애

1934년 9월 전북 금산(錦山)에서 일어난 ‘신건설사(新建設社)사건’ 으로 검거된 사람은 정청산(鄭靑山) 이동규(李東珪) 홍진복(洪振福)ㆍ최정희(崔貞熙)ㆍ고영(高英)ㆍ나웅(羅雄) , 윤기정(尹基鼎)ㆍ송영(宋影)ㆍ한설야(韓雪野)ㆍ권환(權煥)ㆍ이갑기(李甲基)ㆍ김유영(金幽影)ㆍ백철(白鐵)ㆍ김기진(金基鎭)ㆍ박영희(朴英熙) 등이다.

 

 이 사건에 대한 제 1회 공판은  1935년 10월 27일에 있었으며, 피 고소인들은 같은 해 12월에 전원 불기소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극단 [신건설]은 진보적 문예운동을 추구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직속 연출극단이다. 1934년 신건설 창립작으로 에리히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제작하여 지방순회 공연을 했다.

 

 1934년 신건설이 지방 공연 중일 때, 양성순이 지휘한 전북경찰서 고등계가 중심이 되어 신건설사 회원들을 대거 체포했다. 처음에는 금산에서 한 학생이 가지고 있던 신건설의 전단이 빌미가 되었고, 전북 지역을 시작으로 차츰 확대되어 경성부와 평안북도, 평양, 경기도 등지에서 남녀 약 70여 명이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체포된 이들은 주로 학생, 교사, 기자, 배우 등 지식인들이었다. 김유영은 이 사건으로 박영희 윤기정 이기영과 함께 징역 2년형을 언도받은 뒤 석방되었다.

심훈의 죽음을 애도한 김유영의 추모글  

 

뜻하지 않게 안타가운 일이 항용 우리에게 있는 줄 알면서도 존경하는 가까운 벗 그는 갔다. 영원의 문청이라고 지금으로부터 영화감독을 연구하겠다고 스스로 지어서 검사하였다. 이럼을 보아도 얼마나 바램이 큰 것을 알고도 남는다. 헌데 그만 가버리다니 설음이 넘쳐서 나는 울지도 못하겠다.

'천재는 일직이 죽는다'라느니 그래서 그는 아주 갔단 말인가. 평시에 날더러 '군은 약해서 탈이요 탈이야(혼자말로) 오래 살어야 위대한 작품이 나오는 거요 날보오 날보(배를 내밀고 고개를 뒤로 짹기며) 엣참 어찌 그리 침울하며 사색이 깊소. 나를 우리집에서는 하도 명랑하고 잘 생겨서 화초라고 한다오. 하하하' 이런 말을 글세 여러번 되풀이 하였다. 그리고는 심신의 고심이 많은 나는 여러 벗의 한 사람으로서 심형은 내 무덤 앞에서 묵도하고 황혼의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리는 것을 상상한 일도 있었다. 이 무슨 나로서의 모순인가. 의리 내가 살어서 우리의 자랑 문당의 용아 영화계의 중진인 고 훈형의 별세를 설어워하다니-형의 몸은 갔으나 형의 예술은 길이 남어있으니 좀 그윽히 덜 설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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