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한국사(1)] 구미가 배출한 영웅 박희광 애국지사, 그 용렬한 삶에 대한 재조명<한국유통신문.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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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경북의 독립운동가와 경북인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하게된 계기는 바로 구미가 배출한 박희광 애국지사 때문이다. 금오산 자락 금오지 앞에 우뚝 선 박희광 선생 동상 앞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위대했던 애국투사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모른채 의례히 보이는 동상인 마냥 무심코 지나치고 만다. 경북북부지방에서 태어나 91년도부터 구미와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필자에게 있어서 구미는 제2의 고향이며 아랫대가 살아나갈 만고의 터라고 생각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금오산 아래의 동상을 봐왔지만 지례짐작으로 구미의 불세출의 영웅, 박정희 대통령 동상이려니 생각하며 무관심했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문득 동상 아래 아로 새겨진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게 되었고 경북 구미 봉곡 땅에 태어나 머나먼 이국 타지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 목숨 초개같이 내놓은채 용맹무쌍하게 일제와 맞서 싸운 투사들의 일대기를 알게됐다. 불과 100여년도 채 안된 근세의 일들이 빛의 속도로 달려가며 매순간 변화를 겪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고리타분한 옛 이야기로만 치부되며 잊혀져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시대다. 물질적으로 풍족한 이 시대에 핍박받고 절박했던 옛 우리네 일제시대 역사를 되새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까?

 

역사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비롯해 잊혀져 버린 옛 일들의 사실관계를 있는 그대로 명료히 추적해 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이상의 그릇된 일을 범하지 않도록 반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런 이유로 필자는 학자들의 학문적인 업적과 식견을 존중하며 그들이 평생 이룬 지적노동의 산물인 역사서적에 대해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하지만 학자로서 느끼는 학문적(?), 사회적인 한계가 있어 자신의 주관적인 의견을 마음대로 피력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예를 들자면 이데올로기의 공고한 틀에 갇혀 마음껏 주장할 수 없었던 학문적인 한계가 있었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그것은 학문연구에 필요한 연구비 지원과도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는 부분이고 이데올로기 정책에 반하는 일은 모난 돌로 취급받을까 염려하는 학자들의 염려도 있었다. 새정부 들어서기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필자는 어디에도 거리낌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있는 사실 그대로를 면밀히 취재함으로서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역사적 사실들을 옛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세상에 까발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생(生) 한국사라고 명명하며 글을 이따금 올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이 가득한 세월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이 풍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일진대, 그 공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얼을 가슴 깊이 되새기려 하지 않는 오늘날의 세태 또한 바로 잡혔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간 취재했던 경북 독립운동에 얽힌 이야기들을 엮어본다. -기자 말-』   
 

구국애족(救國愛族), 불멸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를 기리며

 

2014년 2월 소통의 공간인 페이스북을 통해 어떤 한 분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실체는 독립투사들과 6.25 참전 용사들의 피와 숭고한 희생으로 이룩되어졌다"는 말을 접하고 그 글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자라나는 새싹들과 나이 어린 후손들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과거에 어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지금에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보인다. 뿐만아니라 역사 교과서에서 아무리 우리의 한국사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공감할 수 없는 과거의 사건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며,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가슴 뜨거운 애국심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작금의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강을 공고히 함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을 건국훈장이라고 하며 2005년도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이는 총 9,694명이며 이중 총 7,853명이 건국훈장을 받았고 건국훈장에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782명, 애국장 3,130명, 애족장 3,818명이다.

 

경상북도 구미지역 출신의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는 1968년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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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애국지사는 1901년 2월 15일 현재 지명인 구미시 봉곡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으로 경주 부윤 수홍공의 11세손이자 항일 의병운동가 윤하공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일 의병활동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 부친 박윤하를 따라 1912년도에 만주로 건너간 박희광 애국지사는 지금으로 치면 중고등학생이던 시절에 만주 봉천성에 있는 남성자학교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18세 되던 해인 1922년도에 만주 임시정부 무장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에 자진 입대, 특공대원으로서 항일의거와 암살 대원으로 조선 독립운동 일선에서 맹활약하게된다.

 

박희광 선생은 대한통의부 제5중대에 배치되어 약 6개월간의 군사훈련을 마친 뒤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만철연선과 한만 국경지대에 잠복하여 관동군 진로 봉쇄작전에 최초 투입된다. '만철'이란 당시 일제가 만든 남만주 철도 주식회의 명칭이며 연선은 철길을 의미한다. 이후 암살과 테러에 필요한 승마와 수영, 사격, 폭탄제조법, 독침, 변장술 등의 교육을 받고 신분을 감춘채 대한통의부의 암살전문요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박희광, 김광추, 김병현 등은 3인조 암살 특공대를 결성해 임시정부로 부터 만철연선의 친일파를 토벌하라는 특명을 받고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1924년 6월 1일에 윤영기 동지의 안내를 받아 무순방면의 고등계 첩자로 활동하며 여순조선인회 서기였던 악질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암살 현장의 대문에 "정갑주, 조국을 배신한 첩자! 우리는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투사다. 너를 조국의 이름으로 처단하겠다." 라고 사형선고문을 붙여 놓았다고 한다. 그로 부터 얼마 되지 않은 6월 7일 대낮에는 보민회를 습격, 이용구와 더불어 친일파의 거두였던 최정규 암살을 시도하였지만 최정규가 미리 피신해 부하 허윤과 가족만을 사살했다. 또한 박희광은 만주 지린성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단체 의열단과도 지속적인 교류와 활동을 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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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파악한 박희광(박상만) 선생의 첩보 기록물

 

한편 같은 해 대련에서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녀이자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체포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한 배정자(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타코)를 다롄에서 암살 실패, 친일단체 일진회 회장 이용구 역시 암살 실패로 부상만 입혔다.

 

1924년 7월 22일에는 상해 임시정부로부터 지급받은 폭탄을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투척했으나 불발로 실패했고 같은 날 저녁, 일본 고관들이 출입하는 고급요정인 금정관에 침입해 거액 군자금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잠복한 중국,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 끝에 김광추는 현장에서 순국, 김병현과 박희광 애국지사는 체포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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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보다 더욱 감동적인 삼장사라 불리운 독립투사 김광추, 박희광, 김병현 선생 부조 조각상 친일파를 처단하기 전 사형선고문을 낭독하는 장면

 

 체포된 박희광 애국지사와 김병현 애국지사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시킬 정도의 혹독한 고문으로 수차례 기절하면서도 조직과 조직원 및 그동안의 활동상 등의 비밀을 지켜냈다고 전해지며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인해 거사의 공범이였던 조직원 윤영기와 조선일보 봉천성 기자 신명구도 같이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고 한다.

 

이들의 결연했던 의지는 관동성 지방법원 재판기록에 모두 남아있다.

 

 "모든 책임은 우리 세 사람에게 있소. 오직 조국을 위한 일념으로 그 일을 했을 뿐 배후는 없소."

 

박희광 애국지사는 1924년 대련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7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형이 확정, 여순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일본천황 즉위 때와 황태자 출생 때에 감형을 받아 20년 세월을 복역한 뒤 1943년 43세의 나이로 출옥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출옥 후 대련에서 동지 이성갑, 유하도와 함께 중국 충칭으로 옮겨간 임시정부에 합류하기로 했으나,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다 임시정부에 합류하지 못한채 1945년 만주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그후  박희광 애국지사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개인 사저인 경교장으로 찾아가 그간의 경과를 보고했고, 김구 선생은 박희광 애국지사의 손을 잡은채 한참을 눈물 흘리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오랜 세월 희생하고 헌신한 독립투사 박희광 애국지사를 위로하고 가슴 뜨겁게 맞이했다.

 

박희광 애국지사는 한동안 김구 선생과 그 측근들을 암살로 부터 보호하는 활동을 했다. 당시 해방 이후 상황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계 독립운동가, 무정부주의자 등으로 분열된 이념 및 파벌의 대립으로 인해 좌,우파간의 갈등이 고조됐던 시절이다.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은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한 뒤 박희광 애국지사를 비롯해 김구 선생의 일부 측근들은 흩어 지게 됐다. 그 후 정치적으로 어지러운 시기를 틈타 너도나도 애국자로 나서는 시절이었고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은 증명할 방법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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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활약상과 친일파 밀정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암살'(사진 쇼박스)

 

박희광 애국지사는 요양과 안정을 위해 문화유씨를 맞이해 칠곡군 왜관으로 이주, 가정을 꾸리며 형무소에서 배운 기술로 양복점을 운영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쉬는 날이 많아 졌고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고를 겪었다. 특히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경우 옥살이로 인해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상당수의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축적된 부외 인맥들을 통해 도리어 해방 후에도 기득권을 유지하며 더욱 가세가 상승하여 오늘날 최고의 부를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행히 박희광 애국지사는 정부와 후손들의 노력으로 재판기록이 게재된 동아일보신문기사와 여러 증거 자료들이 모아짐으로서 행적이 증명되었고, 1968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 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 받게 됐다. 그로 부터 2년 뒤 1970년 1월 22일 71세의 일기로 서울 보훈병원에서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구국애족의 삶을 마감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묘소는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자 묘원에 안장되어 있으며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둘째 아들인 박정용(67세)씨는 현재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자 구미 금오산도립공원에 동상과, 대구 달서구 두류공원 인물동산내에 흉상이 있다. 박희광 애국지사의 생가 복원과 추모관 건립은 관계당국의 업무 떠넘기기로 혼선을 빚어 난항을 겪었던 사실을 2013년 3월 1일자 영남일보 사회면에 보도된 바 있다.

 

또 2013년 10월 12일 매일신문 전병용 기자에 의해 다시 한번 알려진 박희광 애국지사의 구국정신과 나라사랑은 그 숭고한 뜻을 알리고자하는 기념사업회의 의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구미 금오산에 있는 동상은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애국지사박희광선생지상'이라는 친필휘호를 써서 기념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건립하지 못했으며, 1983년 9월 5일 구미문화원에서 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시보조금과 시민성금 그리고 문화원 이사와 유족측에서 비용을 모아 1984년 12월 28일에 제막식을 가졌다.

 

현재 둘째 아들 박정용씨가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박희광 애국지사와 관련된 사업을 구미 문화원과 함께 진행, 기간을 정해 기념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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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 애국지사와 한 집안인 구미시 봉곡동에 거주하는 박세진 시의원은 2013년 11월에 '항일독립투사 박희광 선생 동상 옆 일본향나무 교체에 관한 청원서'를 구미시의회에 제출함으로서 한 동안 이슈가 된 바 있으며 구미지역 문화창작집단 공터다에서는 '그 남자의 자서전'이란 제목으로 박희광 애국지사의 일대기를 작품화 해 구미시민들에게 박희광 애국지사의 업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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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박정용 사무처장 인터뷰, 2015년 3월 18일 경북 구미시 봉곡동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회관 박정용 사무처장은 박희광 선생으로부터 생전에 독립운동 당시 일제로부터 고문을 당했던 이야기를 생생히 전했다. 박희광 선생은 피체된 후 재판을 받기 전 일본 경찰의 악독한 고문에 의해 수차례 기절을 했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수법은 대나무 껍질을 얇게 깍아 손톱사이에 끼워 고문한 것과 남성의 귀두를 뻣뻣한 털로 찌른 것, 불에 달군 쇠로 상처가 난 엉덩이 부분과 무릎팍을 지졌던 고문수법 등이라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삶과 업적을 되새긴다는 것은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반도의 상황과 중국과 특히 일본 문화의 무분별한 수용을 배제하고 확고한 국가관을 정립하는 효과가 있다.

 

목숨을 바쳐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한 독립운동가들의 웅대한 기상이 사라져 가는 오늘날,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비록 친일파 후손들에 비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없을지라도 어디에서나 당당하다. 그 이유는 선친들의 조국 독립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고결했던 정신과 마음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 한일합방으로 인해 한민족은 원하지 않았던 영욕의 세월을 보냈고 결과적으로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다. 100년 후인 지금에 와서야 되돌이킬 수 없는 일일지라도, 앞으로의 100년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과거 일제시대의 잔제들을 깨끗이 청산해야만 할 시대적 당면과제에 봉착했다.

 

<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KTN한국유통신문 인터넷 신문 발행인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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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HAL0MAN
박희광 선생에 대해서는 구미시민이라면 다아는독립운동가의 대명사로 이미 정평이 나있다.
왕산 허위를 비롯해 구미의 독립운동가는 선산 비봉산의 13위가 있고 기술하지 못한 분들이 수없이 많다고 본다.
특히 최근 70주년 추모식을 가진 운파 최관호 선생 등 구미시민이라면 새로운 국면으로 다시 재조명해서 나라를 위해 온몸을 불사른 것에 격에 맞는 추앙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