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구미의 자랑 박희광 선생이 모셔진 대구 두류공원과 구미시의 편중된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에 대한 고찰 <한국유통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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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의거의 불씨가 된 대구 2.28학생의거 기념탑

 

(전국= KTN) 김도형 기자= 대구는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도시이자 호국의 도시이며 항일의 도시이다.

 

일제시대 항일운동 역사로 유서 깊은 대구 시가지 구석구석은 옛 역사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나올법한 고장이다. 오래된 가로수와 오래된 건물 그리고 최신식 고층 빌딩이 즐비해 인간군상들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발전해 온 대도시 대구.

 

교육도시여서 많은 인구수 만큼이나 인재들 또한 많이 배출된 고장이며 실제로 대한민국을 이끌어 온 주인공들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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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구미지역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하며 구미 칠곡 출신 장진홍 독립투사는 대구에서 의거를 벌였고, 구미 칠곡 출신 권쾌복 지사는 대구에서 항일결사 다혁당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수행한 바가 있다.

 

특히 구미 선산 출신 박희광 독립투사는 친일파에 맞서 용맹히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흉상이 건립되어있다.

 

대구 독립운동의 역사

 

일제의 침략이 가시화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거점도시로서의 역할 수행과 근대적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된 곳이다. 예로 1907년 서상돈, 김광제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국채보상운동은 일제 침략의 마수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기 위한 일환으로 금연과 금주 그리고 주식인 쌀을 줄이는 운동을 펼침으로서 전국에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1915년 서상일 선생 등은 영남지역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비밀리에 조직해 훗날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조직으로 항일투쟁을 꾸준히 이어갔고, 193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히 전개됨으로써 민족항쟁의 본거지 도시가 됐다.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인 대구는 3.1만세운동 등 항일독립운동이 전국에서 가장 활발했던 곳이며 광복 뒤인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의 폭정에 항거해 '10월 대구항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대구항쟁은 해방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친일 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와 친일 경찰의 시민들에 탄압 또한 비일비재했던 시기여서 미군정 앞잡이로 활약한 친일파들의 처단과 폭정에 대한 항거를 목적으로 궐기해 그 역사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대구 항쟁 사건의 여파로 민중 항쟁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구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10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형인 구미의 박상희 선생을 중심으로 해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2000여명의 분노한 구미인들은 구미경찰서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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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항쟁 당시 모습. 대일 전쟁 패권자인 미군정의 폭정과 남아있는 친일 경찰 세력들의 득세에 분노한 대구시민들의 항쟁이었다.

 

당시 박상희 선생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성난 군중들로부터 경찰관을 보호하는데 애쓰기도 했다. 하지만 문헌에 따르면 구미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우익청년단체와 경찰이 발포한 총에 의해 박상희 선생은 선산 들녘에서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대구는 6.25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로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게 한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국군이 최초로 대승한 영천전투 등 조국과 민족을 위해 수많은 목숨을 국가에 아낌없이 헌납한 호국의 고장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해 대구인들의 자부심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강하다 할 수 있으며 대구인들의 드센 기질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더불어 대구는 4.19혁명의 횃불이자 시발점이 된 2.28민주운동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고도성장을 이룩한 배경인 새마을운동의 발상지이자 산업화의 중심지여서 그 역사적 의의는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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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민주운동 당시 대구지역 학생들의 활약 모습 사진출처 2.28대구민주운동 기념사업회

  

인물동산으로 근대의 역사적 인물들을 기리는 대구 두류공원

 

인구 약 250여만명의 대도시인 대구시 중심부에 위치한 대구두류공원은 1977년 조성됐다. 인근 두류산에는 구 우방타워랜드인 이월드가 들어서 있으며 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금봉산 등 대구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해발 135m의 야산을 개발해 만든 공원의 면적은 51만평으로 공원내는 대구시민들을 위한 운동과 힐링코스가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고 시민들의 아늑한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두류산은 산이 둥글게 펼쳐져 있다하여 '두리산'으로 불리던 유래가 있고 정식 명칭으로 한자화 될 때 '두류'로 바뀌었다고 한다.

 

두류공원에는 4.19혁명의 시발점이 된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의 의거를 기리기 위한 2.28학생민주의거기념 탑이 있어 언제나 그 숭고했던 학생들의 뜻을 기리게 만든다. 자유당 당시 부정부패에 항의한 첫 민주운동인 2.28학생민주의거는 어린나이에 나라를 위해 들고 일어선 용기가 오늘날에도 대구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큰 귀감이자 큰 자부심의 표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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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을 일삼는 정부에 대한 항의를 위해 달려나가는 학생들 사진출처 2.28대구민주운동 기념사업회

 

이곳엔 대구시민 헌장비를 비롯해 축구장과 야구장을 비롯해 각종 위락시설과 사립도서관 두류도서관이 있어 시민들과 학생들의 문화생활 함양에 기여를 하고 있다.

 

두류공원내 2.28학생민주의거기념탑 인근에 있는 인물동산은 대구를 빛낸 인물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으로 시인 이상화, 소설가 현진건, 애국지사 박희광,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기념탑, 애국지사 조기홍, 화가 이인성, 한시인 최양해, 시인 백기만, 시인 이장희 등의 흉상과 이들의 업적을 얼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고, 또다른 위인들이 들어올 자리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는 대구 두류공원과 같이 독립운동가들의 공을 기리기 위한 인물동산과 같은 특별한 공간 조성에 많은 배려를 한다. 이는 나라사랑을 일깨움과 동시에 숭고했던 역사적 인물들의 숨결을 느낌으로서 이 시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상기시켜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

 

특히 어린나이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박희광 선생의 일화는 학생운동의 본고장인 대구인들에게 큰 귀감이 됐다. 1901년 구미시 선주동 출생인 상만 박희광 선생은 18세때 임시정부 조선독립단 통의부 특공대원으로 활약한, 상해 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만철 연성에서 수차례 일본군 공격 작전 참가, 봉천 일본총영사관 폭탄 투척, 이등박문 수양녀이자 매국의 요화 배정자 암살 시도, 민족반역자 정갑주와 매국단체인 일진회 보민단 회장 최정규 총살 등 다수의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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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24년 군자금 확보를 위해 일본 요정 금정관에 침입, 중국경찰과 일본군경에 대치해 용렬히 싸우다 피채된 뒤 1심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다행히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돼 여순형무소에서 20년간 복역 후 출옥했다. 이후 김구 선생을 만나 선생의 보호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정부는 박희광 선생의 공을 기려 1968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구미의 자랑 박희광 독립투사를 기리기 위한 선양사업 왜 진척이 없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이자 산업도시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해 온 구미시는 역사의식과 문화적 기반이 약한 이유로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에 있어 절름발이 모양새를 하고 있는 양상이다.

 

지난해 12월 구미시의회 제7차 기획행정위원회에서 김복자 시의원은 구미의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에 대한 지자체의 불공정 사례를 지적했다.

 

김 의원은 구한말 독립운동가인 왕산 허위 선생 사당건립에 드는 예산 9억원에 대해 추가로 4억원씩 든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구한말 독립운동가의 선양을 위한 사당에 구미지역 독립운동가 7명의 위패를 함께 모실 수 있도록 건의했던 사안이 좌절된 것을 언급했다.

 

더불어 김복자 의원은 독립투사 박희광 선생의 기념관 설립을 위해 유치한 7억원 예산이 구미시 지원의 부재로 인해 국가에 반납된 점과 비교해 왕산허위선생 기념관 건립과 사당 건립 등 한쪽에 치우친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의 모순에 대해 질타했다.

 

구미시는 당초 사당 건립에 5억원 예산을 계획했지만 추가로 4억원을 계상했다. 반면에 박정희 선생 기념관 건립을 위해 아들 박정용 박희광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이 애써 확보해 놓은 예산 7억원에 구미시가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형평성을 이유로 예산 5억원 지원을 거절함으로써, 구미의 명소가 될 용맹했던 독립투사의 기념관 건립이 어이없이 좌절됐다.

 

독립운동의 역사적인 가치를 도외시한 구미시의 허술한 행정은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가 극에 달해 빈축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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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있는 독립투사 박희광 선생 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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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칠곡 출신 독립운동가 권쾌복 선생이 박희광 선생을 위해 올린 '민족혼의 횃불을 밝히리라' 시

 

구미시 김복자 의원은 지난해 12월 기획행정위원회에서 사람이 찾지 않는 왕산기념관 대해 "지금 왕산기념관에 하루에 그 몇 명이 오신 줄 아십니까? 거기. 한두 팀도 안 옵니다. 거기 가보시면. 주말에 겨우 많이 와야 4팀입니다."라는 말로 부실한 운영상태를 지적하며 연간 2억 2천만원에 달하는 왕산기념관 운영예산의 절감을 지적한 바가 있다. 

 

선양사업에 투자된 규모에 비해 그 쓰임새가 혀를 차게 만드는 왕산기념관이 지역의 명소로 거듭나지 못한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 것인가?

 

박희광 선생 기념관 사업이 예정대로 진행되어 구미시 봉곡동에 기념관이 건립이 되었더라면 그 용맹했던 독립투사의 업적과 활약상을 가까이서 지켜볾과 동시에 구미의 자긍심을 드높이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죽음을 무릎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맹활약했던 독립투사의 화려했던 일화들은 그 어느 영화의 소재보다도 더 감흥을 일깨운다. 지난해 영화 '암살'의 모티브 또한 박희광 선생과 같은 독립투사들의 활약상을 근거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역동적인 독립투사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은 관광객들이 찾을 수 있는 훌륭한 명소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며 이미 '그 남자의 자서전'을 통해 알려진 독립투사 박희광 선생의 일화를 기리 기억할 수 있는 역사적인 무대가 될 것이므로 지역에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은 당위성을 가진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박희광 선생이 밝힌 구국애족 불멸의 횃불이 다시금 구미시를 밝혀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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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구미시 한마음 대축제 개막식 현장

'위대한 구미 찬란한 구미'를 표방하는 구미인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찾는 길에 대해서도 모색해야 할 때다.

 

<한국유통신문 영남총괄본부장 김도형> flower_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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